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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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주댐 건설 이후 망가진 회룡포... MB 녹색성장의 결말
14.10.07 20:27 l 최종 업데이트 14.10.07 20:27 l 장호철(q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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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포 앞을 흐르는 내성천. 물은 아직 맑지만 왼쪽 모래톱 쪽에 육화(陸化)가 진행되고 있다. ⓒ 장호철

영주댐 건설 이후 시름시름 앓는 내성천

지난 9월의 셋째 주말, 경북 예천의 회룡포를 찾았다. 나는 2005년부터 한해 걸러 한 번씩은 내성천이 마을을 한 바퀴 휘감는 회룡포에 들르곤 했다. 

지난 9월 20일, 예천 민예총과 소내 선생이 준비한 예천 아리랑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가 회룡포 마을에서 열렸다. 시인 안도현과 조성순을 불렀다며 내성천에 오라는 김소내 선생의 전갈을 받은 것은 열흘 전쯤. 나는 무엇보다 영주댐이 건설된 후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는 내성천의 안부가 궁금했다. 소내 선생을 비롯한 예천의 옛 동지들과 고교 동아리 후배인 두 시인과의 만남도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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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변 백일장에 모인 아이들에게 안도현 시인이 금모래강 내성천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장호철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회룡포 마을에서 시인 안도현, 조성순과 만났다. 두 친구는 고교 동문이면서 1989년 전교조 해직 동기다. 안도현은 호명, 조성순은 감천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났다. 나는 20년 전 복직하면서 그들이 일찌감치 떠난 고향 예천에서 7년간 두 학교를 거쳤다.   

'강과 자연의 건강을 비는 고유제'로 시작된 행사는 인근 시군에서 모인 중고생들의 백일장으로 이어졌다. 오전인데도 햇볕이 따가웠다. 안도현이 천막 아래 모인 아이들 앞에 섰다. 그는 "스무 살 때 쓴 시 '낙동강'은 사실 내성천의 이미지를 빌려 왔다"고 말했다. 

이어 동료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볕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회룡대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TV 방영으로 전국에 알려진 이후, 회룡포를 찾는 이들이 급격히 늘었다. 한적한 농촌마을 대은리는 주말이면 외지인들로 붐볐다. 덕분에 회룡포의 명물인, 이른바 '뿅뿅다리'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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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끝에 새로 생긴 제2뿅뿅다리. 원 다리와 달리 건축공사장에서 쓰는 비계용 철판 대신 콘크리트로 지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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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제2 뿅뿅다리와 회룡포 마을 모래밭. 다리가 끝나는 부분부터 육화현상이 진행되어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 장호철

"원래 물살이 이리 급했던가?"
"글쎄 말이야. 아직 9월인데 수량도 적은 거 아냐?"
"영주댐이 물을 막아 버려 그렇겠지?"
"아마도. 모래가 떠내려오지 않게 되면서 이미 이곳도 육화가 진행되고 있거든."

강 가장자리로 여뀌 등의 풀이 자라고 있었다. 이미 풀이 빽빽이 자란 곳은 모래밭에서 육지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는 듯했다. 물과 모래톱이 만나는 가녘에서부터 자란 풀은 마을 쪽으로 시나브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른바 모래밭이 육지로 변하는 '육화(陸化)현상'이다.  

30여 분 만에 회룡대에 올랐다. 정자 아래 전망대는 예전과 달리 방부목 데크로 단장돼 있었다. 전망 공간이 늘면서 회룡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이 다소 커진 것처럼 보였다. 새 다리 쪽으로 공원이 들어서고, 옛 다리 쪽으로도 오토캠핑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마을 둘레를 도는 둘레길이 생기고, 주차장과 펜션, 커다란 식당 따위가 들어서면서 아홉 가구만이 살던 마을은 이제 관광지나 진배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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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관광지로 알려지기 이전의 한적했던 시골마을 회룡포. 2005년 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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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포의 겨울. 그러나 마을을 둘러싼 모래톱은 가장 넓다. 2006년 12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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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르익은 가을의 회룡포. 백사장과 강물이 맑고 깨끗하다. 2007년 10월.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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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의 회룡포. 모래톱에 거뭇거뭇 돋아난 것은 물과 모래의 경계에 번지고 있는 풀이다. ⓒ 장호철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내성천도 예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2005년과 2007년에 들렀던 회룡포는 마을을 안고 흐르는 드넓은 백사장이 하얗게 선명했다. 물과 모래톱의 경계 부분도 모래 빛깔 때문에 선홍빛으로 빛났다. 

황금빛 모래 대신 검은 띠...육화 급속도로 진행

그러나 지금 물과 모래가 만나는 지점은 검은 빛이 두드러져 보인다. 지난 여름비 끝에 쌓인 오물 때문일까, 모래 대신 가장자리로 밀려나 가라앉은 진흙 탓일까. 거무스레한 띠는 마치 내성천에 당도한 재앙의 전조 같은 느낌을 줬다.

더 심각한 곳은 백사장이 시작되는 곳으로 마치 버짐처럼 번지고 있는 풀밭이다. 강을 건널 때는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이미 반원형의 호(弧)를 이루며 흉물스럽게 강둑 쪽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내성천이 '금모래 강'이라고 불리는 것은 강폭보다 넓게 펼쳐진 고운 모래톱 때문이다. 천혜의 모래밭은 영주의 무섬마을, 예천의 선몽대와 회룡포 같은 아름다운 풍광을 낳았고,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2014년 현재, 내성천은 '금모래 강'이라는 이름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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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포 마을 끝의 내성천. 아직 제2 뿅뿅다리를 놓기 전(2005년 10월)인데, 백사장이 맑고 깨끗하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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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대에서 내려다 본 내성천. 제2 뿅뿅다리 끝이 육화현상 현상으로 거뭇거뭇하고, 물과 모래톱의 경계가 거무스레하다. ⓒ 장호철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높이 55m, 길이 400m의 대형댐 건설을 시작하면서 내성천은 조금씩 그 모습을 잃어갔다. 영주댐 건설은 4대강 사업의 마지막 사업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내성천을 막고, 대형댐을 세웠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낙동강 중하류 지역의 수질 개선을 위한 하천유지 용수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8년 시행된 조사에서도 경제성이 기존 조사보다 더 낮게 나왔지만 이명박 정부는 공사를 강행했다. 목적도 불분명한 데다 경제성도 없는 대형 댐은 금모래 강 내성천을 황폐화하는 주범이 됐다.

봉화에서 발원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금천, 낙동강과 함께 합류하는 내성천에는 연간 22만 5천 세제곱미터의 모래가 흘러들어 간다. 한국수자원공사 시뮬레이션에서도 영주댐이 내성천에 공급되는 모래의 80% 이상을 막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영주댐 위에 모래차단 댐을 설치해 모래 대부분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댐 아래 내성천은 모래 유입 없이 기존에 쌓여 있던 모래가 쓸려 내려가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모래가 흐를 수 없게 된 내성천은 더 이상 '금모래 강'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녹색 성장인가

2011년까지만 해도 내성천은 고운 모래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2012년과 2013년을 지나면서 기존의 모래가 쓸려 내려가기 시작했고, 강은 황폐화의 길을 걸었다. 내성천 모래톱에 풀까지 자라는 육화 현상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육화 현상은 영주댐 아래의 무섬마을부터 시작해 내성천 110km 가운데 중하류 약 70km 구간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회룡대에서 바라본 내성천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더 이상 모래가 흐르지 않는 내성천은 죽은 강이 될 터였다.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뽑은 결과로는 가혹하구먼. 멀쩡한 강을 파 뒤집어서 망가뜨리는데 임기만으로도 충분했네. 그이는 아직도 '녹색성장'을 되뇌면서 자화자찬에 빠져 있을까."
"불과 몇 년 사이에 저지른 무모한 토목공사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따위는 그들 70년대식 사고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하지 못할 거야."

당사자들에 대한 몇 마디 비난으로 파괴된 자연과 생태가 일부라도 회복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결국 한갓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밀로 만든 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안도현과 조성순, 두 시인과 함께 승용차로 회룡포를 출발했다. 내성천 물길을 따라 영주댐까지 다녀오는 일종의 답사길이다. 감천의 천연기념물 석송령과 <국순전>의 고려 문인 임춘을 모신 옥천 서원을 거쳐 영주에 닿은 것은 4시가 다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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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댐 아래 내성천. 모래차단댐이 세워지고 모래 유입이 끊기면서 육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오른편 풀밭은 지난봄까지만 해도 모래톱이었다고 한다. ⓒ 장호철

영주시민회관에서 열린 내성천포럼, '모래강과 영주댐 이야기'에 잠깐 참석했다가 다시 영주댐 쪽으로 차를 몰았다. 댐이 완공되면 수몰될 마을 평은면 금강리. 마을 앞 다리 위에 차를 세웠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게 내성천. 육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내성천보존위원회의 젊은 활동가가 다리 밑을 가리켰다. 

"보세요. 이미 육화가 진행되고 있지요? 지난봄만 해도 풀이 자라나 있는 부분은 모래밭이었지요. 저 위에 토사 방지댐을 만들면서 더 이상 모래가 유입되지 않은 겁니다."

강폭이 꽤 되는 구간인데 육화는 이미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풀이 번지지 않은 삼 분의 일쯤 되는 부분만 간신히 물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안도현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호명면 황지리 쪽으로 가 보고 싶어 했다. 그 고향 마을 앞에 흐르는 냇물 역시 내성천이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안도현의 발견'에서 그는 '내성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향 사람들은 강변을 '갱빈'이라고 불렀다. 금모래 속에 몸을 묻고 놀다가 지치면 모래무지가 보이는 물속에 뛰어들었다. 여름 홍수 때를 제외하고 강물은 늘 내 허벅지 높이만큼 흘렀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를 따라 내성천을 건너 예천 장까지 걸어가는 날도 있었다. 

큰물이 질 때는 멍석말이하는 것처럼 붉은 물결이 밀려왔다는 말, 아버지가 장에 내다 팔 땔감을 지고 건너기도 했다는 말, 여기서 잡은 '가을고기'는 맛도 좋다는 말... 올가을에 만난 내성천은 울상이었다. 모래가 반짝이고 있어야 할 백사장에 이미 퇴적물이 쌓여 듬성듬성 갈대밭을 이루고 있었다. 

몹쓸 인간들아, 영주댐 공사를 당장 중단해라. 
 
- 한겨레 칼럼 <안도현의 발견> 중 일부 (2013.10.15)          

그는 어린 시절의 내성천을 추억했고,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시 '낙동강'에서 노래한 대로 그 강은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 가는 / 외로운 세상의 강 안에서 /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이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강이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회룡포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두 사람은 읍내로 나가 술자리를 갖자고 했으나 나는 다음날 방송고 수업을 핑계로 그들과 작별했다. 며칠 후 찍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는 10여 년 전의 묵은 내성천 사진과 현재를 비교해 보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 유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 전국적 관광지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었다. 동시에 토건을 여전히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몰아붙이는 성장 패러다임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금모래 강, 내성천과 회룡포. 이들이 우리에게 되묻는다. 인간과 함께 흘러온 강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생태인가, 개발인가" 이 질문은 동시에 인간은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싣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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