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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한자음을 단 게 틀린 게 있을 수 있습니다.


(2) 백제국 부흥운동의 진압


백제 사비성의 외곽지대에서 나당군에게 저항하는 백제군을 진압하지 않고 당의 주력부대의 대부분은 顯慶(현경) 5년(의자왕 30년 ; 660) 9월 3일 바다를 통하여 唐京(당경)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당군이 급히 철수한 이유는 그들의 사전 전략이었을 것이다. 즉 첫째 당의 의도는 처음부터 대군의 성세만 빌려주고 실제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백제를 정벌케 할 목적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당군의 참전은 사비성 함락에 그쳤고 이후의 백제군 진압에는 신라군을 동원하려 했다. 둘째 당군은 먼 海道(해도)에 지속적인 軍糧供給(군량공급)도 어려웠음을 감안했을 것이다. 셋째 백제정벌의 餘勢(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급습하려는 전략이 있었던 듯하다. 현경 5년 12월 소정방이 契苾何力(글필하력)·劉伯英(유백영)·程振名(정진명) 등과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로 알 수 있다. 결국 당은 직접 백제를 지배할 목적으로 사비성에 留鎭唐兵(유진당병) 1만 명을 남기고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진압시키려는 철저한 당 중심의 정책만을 펴갔다.


백제군은 당군이 떠나기 전인 8월 2일 사비성의 南岑(남잠)과 貞峴(정현)에서 저항했고, 佐平 正武(좌평 정무)는 豆尸原嶽/두시원악 (忠南 靑陽郡 定山面/충남 청양군 정산면)에 주둔하면서 나당인을 抄掠(조략)하였다. 또 8월 26일에는 신라군이 任存城/임존성(大興/대흥)의 大柵(대책)을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이 많고 지세가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그 小柵(소책)만을 공파했다는 것이다.0045) 바로 이 임존성은 문무왕 3년(663)까지 백제국 부흥군의 본거지가 되었고 黑齒常之(흑치상지)·沙吒相如(사타상여)·遲受信(지수신) 등의 지휘하에0046) 3만 부흥군을 거느리고 2 백여 성을 탈환하는 등 자못 그 형세가 대단해서 소정방군도 이들에게 패배한 채 돌아갔던 것이다.0047)


또 한편 백제 遺臣(유신)으로 武王(무왕)의 從子(종자)인 福信(복신)과 중 道琛(도침)은 周留城/주류성(韓山/한산?)에 웅거하면서 의자왕의 왕자로 倭國(왜국)에 인질로 가 있던 扶餘豊(부여풍)을 맞아 백제왕으로 삼았더니 西北部(서북부)가 모두 그들에게 호응하였다는 것이다.0048) 이 주류성에는 부여풍 외에 왕자 扶餘忠勝(부여충승)·扶餘忠志(부여충지) 등도 부흥군을 지휘하고 있었다.0049) 이는 이미 패망한 백제왕실의 왕통을 다시 계승하여 부흥군의 지주를 삼고 백제유민을 귀일시키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이 백제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보다 강력한 항전기반을 구축했던 것인데, 이런 주류성·임존성의 부흥군 세력은 서로 犄角之勢(의각지세)로 호응하였다.


이 같은 부흥군은 무열왕 7년(660) 9월 23일부터 대거 진출하여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것은 부흥군이 단순히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한 백제인을 구출할 목적만이 아니라 사비성 탈환을 위한 공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0050) 이때 유인원 휘하의 당·신라병이 응전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신라에 원병을 요청한 듯하다. 따라서 무열왕은 직접 태자 법민과 諸軍(제군)을 거느리고 그 해 10월 9일부터 11월 7일까지 약 1개월간 대대적인 백제국 부흥군 진압에 나섰다. 이에 따른 논공행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才質(재질)에 따른 백제인의 임용이다. 이런 조치는 백제인들을 흡수 융합하려는 懷柔政策(회유정책)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함락한 尒禮城(이례성)에「官守/관수」를 설치했다는 것은 신라가 신라병을 留守(유수)케 했다고 보인다. 이는 당이 백제를 지배하더라도 그 지배질서가 확립되지 못했고 백제국 부흥군이 지배하고 있는 곳은 더욱 방기상태에 있었으므로 그 지역을 신라에서도 ‘官守’(관수)하지 않으면 부흥군 진압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지배를 둘러싸고 나당 사이에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당시에 있어서 관수가 분쟁의 도화선이 아닐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백제에 대한 지배권은 당이 행사하면서 신라는 그 당을 도와 攻取地域(공취지역)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二重苦(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후 나당간의 분쟁으로 보아 이 신라병의 留守地域(유수지역)은 실제 신라가 지배했던 것이며 당도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미묘한 상황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당은 左衛郎將 王文度(좌위랑장 왕문도)를 熊津都督(웅진도독)으로 임명해 왔으나 무열왕 7년(660) 9월 28일 신라 三年山城(2년산성)에서 갑자기 죽었으므로 다시 檢校帶方州刺史(검교대방주자사)라는 직함을 가진 劉仁軌(유인궤)가 부임하여 신라군의 도움으로 사비성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대개 이 기간은 무열왕 7년(660)말·8년초로서 사비성의 당병은 신라로부터 공급받던 糧道(양도)가 끊어지고 1천 명의 당병이 부흥군에게 섬멸당하기도 하였다.0051)


이렇게 백제국 부흥군의 사비성 공격이 치열하자 무열왕 8년 2월 왕은 이찬 품일을 大幢將軍(대당장군), 迊湌 文王(잡찬 문왕)·大阿湌 良圖(대아찬 양도)·阿湌 忠常(아찬 충상)을 大幢副將軍(대당부장군)으로 삼고, 잡찬 文忠(문충)을 上州將軍(상주장군)으로, 아찬 眞王(징왕)을 副將(부장)으로, 아찬 義服(의복)을 下州將軍(하주장군)으로, 武剡(무섬)·旭川(욱천) 등을 南川大監(남천대감)으로, 文品(문품)을 署幢將軍(서당장군)으로, 義光(의광)을 郎幢將軍(낭당장군)으로 삼아 당병을 구원케 하였다. 3월 5일에는 品日軍(품일군)이 豆良尹城/두량윤성(錦山郡 富利面/금산군 부리면)에서 백제 부흥군에게 패배했고 12일에는 古沙比城/고사비성(臨陂/임피)에서 豆良尹城(두량윤성)을 한달 6일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下州軍(하주군)은 賓骨壤/빈골양(古阜/고부 동쪽)에서 부흥군과 싸워 많은 兵器(병기)를 잃었다. 왕은 大軍(대군)의 敗報(패보)를 듣고 金純(김순)·眞欽(진흠)·天存(천존)·竹旨(죽지) 장군으로 增援(증원)했던 바, 加尸兮津/가시혜진(高靈 加耶川/고령 가야천)에 이르러 대군이 加召川/가소천(居昌/고창의 加川/가천)에 후퇴했다는 말을 듣고 증원군도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백제국 부흥군에서는 더욱 사기가 오른듯, 도침은 領軍將軍(영군장군), 복신은 霜岑將軍(상잠장군)이라 하고, 使者(사자)를 유인궤에게 보내어 말하되, 당이 백제인의 老少(노소)를 죽인 후 백제국을 신라에게 넘겨준다고 하니 죽음으로써 싸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0052) 이에 인궤는 그 부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신라와 함께 진압할 것을 당 고종에게 청하는 것을 보면 역시 나당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신라군이 부흥군에게 계속 패하는 것은 무열왕말에서 문무왕초라는 전환기에 귀족들의 해이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신라군의 소극적 대응이 더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문무왕 원년(661) 당의 고구려정벌에 신라군의 호응을 요청받아 문무왕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여 진군하던 중, 留鎭唐兵(유진당군)의 요청에 따라 백제국 부흥군을 甕山城/웅산성(大德郡 懷德面 鷄足山城/대덕군 회덕면 계족산성)·雨述城/우술성(대덕군 회덕면)에서 격파하고 항복한 達率 助服(달솔 조복)은 級湌(급찬)에 古陁耶郡 太守(고타야군 태수)로, 恩率 波加(은솔 파가)는 급찬에 田宅(전택)·衣物(의물)을 주었다.


이런 속에 문무왕 2년초에는 평양 부근에서 敗戰(패전)과 饑寒(기한)에 떠는 소정방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신라는 대병력과 물량을 동원하여 運糧(운량)을 왕복하면서 고구려군과도 싸워야 했다. 이때 백제에 臣屬(신속)했던 耽羅國主(탐라국주)가 투항해 오고 백제평정을 자축하는 잔치를 배설한 점으로 보아 신라측에서는 백제국 부흥군의 저항을 지극히 경시했던 듯하다. 문무왕 2년(662) 8월, 신라는 19장군의 대병력을 동원해서 內斯只城/내사지성(儒城/유성)을 討破(토파)했고, 稱病(칭병)하며 國事(국사)에 무심하다는 이유로 大幢摠管 眞珠(대당총관 진주)와 南川州摠管 眞欽(남천주총관 진흠) 및 그 一族(일족)을 죽임으로써 문무왕의 새 체제를 정립하는 동시에 이미 안일로 흐르기 시작한 일부 귀족들에게 一罰百戒(일벌백계)로 肅正(숙정)했던 것이라 보인다. 이렇게 해서 문무왕 3년부터 다시 부흥군 진압작전이 크게 진행되어 欽純(흠순)·天存(천존)의 군대가 居列城(居昌/거창)을 攻取(공취)하여 7백 급을 참하고 居勿城(거물성)과 沙平城(사평성)을 함락시켰으며 德安城/덕안성(恩津/은진)을 쳐서 1천 7백 급을 참하였다. 이렇게 보면 신라군은 사비성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외곽지대의 부흥군 진압에 주력했고, 사비성은 당병에게 맡기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도 金仁泰(김인태)의 7천 병력이 유진당병을 돕고 있었다.


한편 사비성에서는 끈질긴 복신 등의 부흥군 공격을 받아 유인원 등은 孤立無援(고립무원)으로 포위되었는데 유인궤가 신라병을 이끌고 복신 등이 점거한 眞峴城(진현성)을 점령함으로써 비로소 신라 運糧(운량)의 길이 통했다는 것이다.0053) 당병을 이같은 위기에 몰아넣을 만큼 강렬한 백제국 부흥군 내부에서는 이미 문무왕 원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병력을 앗아 임존성으로 들어가 전횡했고, 그 이듬해에는 부여풍이 다시 복신을 살해함으로써0054) 그들 상호불신이 번지는 속에 부여풍과 흑치상지가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으나 이런 내분은 파국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다.


또 유인원이 唐(당)에 더 많은 군대를 요청하자, 문무왕 3년(663) 右衛將軍 孫仁師(우위장군 손인사)가 7천 병력을 이끌고 덕물도를 거쳐 웅진부성으로 들어왔다. 손인사는 杜爽(두상)과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夫餘隆(부여융)을 대동했는데 이는 당병은 물론 신라에도 督戰(독전)의 새 기운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문무왕이 김유신 등 28(30)將軍(장군)을 거느리고 부흥군 진압에 나섰다.


유인궤는 두상·부여융을 별장으로 삼아 손인사·유인원의 당병 및 신라왕이 거느린 제군과 합세하여 먼저 豆良尹城(두량윤성)과 周留城(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扶餘豊(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했고 왕자 扶餘忠勝(부여충승)·扶餘忠志(부여충지)는 무리들과 항복했지만 지수신은 임존성을 고수했다. 이 주류성이 함락되자 다른 성은 저절로 무너졌다. 한편 유인궤의 수군은 白江口(백강구)에서 백제부흥군을 돕는 倭兵船(왜병선)과 회전하여 4백여 척을 불살랐다. 이 전투로 부흥군의 핵심세력이 모두 무너져 사타상여·흑치상지도 항복했다. 유인궤는 사타상여·흑치상지 등 降將(항장)들을 앞세워 임존성을 공파하자 지수신도 고구려로 망명하였다.0055)


백제국 부흥군 진압작전을 보면 신라군의 단독진압, 당병 단독진압, 나당병의 연합작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나당군을 분리하여 분석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金仁泰(김인태) 7천 병은 언제나 당병과 행동을 같이 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당병이 본토의 원병까지 동원했더라도 그 主力(주력)은 신라군이었으며 신라왕이 직접 대병력으로 참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유인궤의 武功(무공)으로 기록된 주류성전투도 신라의 驍騎(효기)가 선봉에 서서 격파했던 것이다.0056) 백제 殘衆(잔중)이 泗沘山城/사비산성(扶蘇山城/부소산성)에서 항거했다는 문무왕 4년(664) 3월의 기록은 있으나 부흥군의 대부분은 문무왕 3년(663)까지 진압되었다.


요컨대≪삼국사기≫가 많은 독자적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위 부분은 中國史書(중국사서)에 근거한 기록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연대와 사건을 정확히 일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고 판단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신라는 4년간 엄청난 국력으로 백제국 부흥군 진압에 절대적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留鎭唐兵(유진당병)의 요청과 지휘에 의하여 당을 돕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를 패망시키지 못한 시점에서, 당은 백제 전 지역을 자의대로 지배하지 못했던 시점에서 나당 서로가 불가피했던 것이 곧 백제국 부흥군 진압과정의 시기였다. 이는 양국의 상반된 이해관계 속에서 신라는 대가없는 전쟁으로 당에게 굴종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0045) ≪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0046) ≪新唐書≫권 108, 列傳 33, 劉仁軌.


0047) ≪舊唐書≫권 109, 列傳 59, 黑齒常之.


0048)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


0049) ≪新唐書≫권 108, 列傳 33, 劉仁軌.


0050) ≪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무열왕 7년조에는 “謀略生降人(모략생항인)” 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0051) ≪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0052)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龍朔(용삭) 원년.


0053) ≪新唐書≫권 108, 列傳 33, 劉仁軌 및≪資治通鑑≫권 200, 唐紀 16, 高宗 上之下 龍朔 2년. 위의≪資治通鑑≫에서는 “初仁願·仁軌等屯熊津城”이라 했고 그 注에 “考異曰 去歲道琛·福信圍仁願於百濟府城 今云尙在熊津城 或者共是一城 不則圍解之後 徙屯熊城耳”라 하여 혼동된다. 이것만으로는 사비성을 백제부흥군이 상당기간 奪還(탈환)하지 않았나도 의심된다. 그런데≪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무열왕 7년조에서 “九月三日 郎將劉仁願以兵一萬人 留鎭泗沘城 王子仁泰 與沙湌日原級湌吉那 以七千兵 副之”라 하고, 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조 王의 答薛仁貴書에는 “同鎭熊津”이라 하였고 “圍逼府城 熊津請兵”, “熊津漢兵一千”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필자는 9월 3일조의 사비성에서 당병과 신라병 7천이 끝까지 주둔했다고 보고, 백제부흥군이 포위한 ‘府城’(부성)도 사비성으로 보았다.


0054)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龍朔 원년(661) 및 2년조에 의함. 권 6, 新羅本紀 6에는 福信(복신) 등의 初起(초기)를 문무왕 3년(663)조에 몰아서 언급하여 내부 변화의 연대가 무시되었다.


0055) ≪新唐書≫권 108, 열전 33, 劉仁軌傳이 이 부분의 중요 자료이다.


0056) ≪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조의 答薛仁貴書 龍朔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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