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82642800690136310


<4> 4세기 마한병합설 근거와·문제점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2020년 02월 26일(수) 


교과서에 나오는 전남지역 마한병합 4세기설은 확실한가?

4세기 병합설의 근거는 ‘일본서기’ 연대·내용 등 불확실…부정 견해도



‘일본서기’와 신공기 49년 3월조를 토대로 그린 ‘국사화첩 대화앵'에 실린 삼한정벌도’(1930년대) (신공기 49년 3월조 ; …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 오랑캐 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이 항복하였다.)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출범한 백제는 이후 마한 제국들을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백제의 마한 병합은 가까운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언제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기 어렵다. 특히 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제국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병도 박사의 4세기 병합설이 교과서에 반영되어 있지만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수용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한 이병도 박사의 견해(1959년 한국사 고대편 왼쪽)와 이 견해를 반영한 고등학교 교과서 역사부도


◇ 4세기 병합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병도 박사의 4세기 병합설은 1959년 발간되었던 ‘한국사’ 고대편에 처음 보이는데 그 근거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들고 있다. 신공왕후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와 가야 7국을 공략한 다음 침미다례를 정복하자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이 항복하여 이를 모두 백제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일본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임나일본부와 관련시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게 된 사건으로 인식하였지만 이병도 박사는 군사 활동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보았고, 공략 지역을 전남지역 마한 잔읍으로 보았으며, 정복 시기를 신공기 49년(249년)에 2주갑을 더한 근초고왕 24년(369년)으로 본 것이다.


◇ ‘일본서기’ 기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4세기 병합설의 근거가 되었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관련 기사는 한때 일본에서 정한론의 역사적 명분으로 삼기까지 한 바도 있었지만 지금은 기록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비롯하여 정복의 주체와 시기, 구체적인 정복 지역, 정복의 이유, 정복 이후의 관계, 백제-왜 공동 군사행동의 목적, 정복에 동참한 왜의 실체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수 많은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백제가 주체이고 왜가 동참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있어서도 왜의 실체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으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북방계 기마민족의 일파, 야마토와 여러 지역의 연합체, 규슈 북부 백제계 왜구, 규슈의 해적 집단, 규슈의 구노국(狗奴國) 혹은 이도국(伊都國) 등으로 보는 대단히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 군사 활동의 1차 목표이자 먼저 정복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는 신라와 가야 7국에 대해서는 백제의 병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차 목표였던 마한 제국만 병합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막연한 대세론적 관점에서 나온 것일 뿐 논리적으로 설득력을 갖춘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와 온조왕 27년조, 탈해왕 5년조, 태조왕 70년조(왼쪽부터) : '진서’와 마한조, 장화전 (동이열전 마한조) 武帝 太康元年·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八年·十年, 又頻至. 太熙元年), 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 明年又請內附. (무제 태강 원년(280)과 2년(281)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7년(286)·8년(287)·10년(289)에도 자주 왔다. 태희 원년(290)에는 동이교위 하감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함녕 2년(277)에 다시 왔고, 이듬해(278)에 또 내부를 청하였다.) (열전 장화전) 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 ((282년에) 동이에 속하는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들이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살았다. 유주에서 4천여리 떨어져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 20여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우리의 ‘삼국사기’에는 관련 기록이 없는가?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구체적인 기록들이 실려 있다. 백제 온조왕 10년에 왕이 사냥을 나가 신령스러운 사슴을 잡게 되자 마한에 보냈다는 내용에서부터 온조왕 24년에 백제가 마한과의 경계 지역에 목책을 세우자 마한왕이 항의하였는데 온조왕이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목책을 허물었다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마한이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많다. 이때의 마한은 54국을 대표하는 목지국으로서 그 위치는 아산만 안쪽, 현재의 천안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마한과 백제 사이의 우열 관계가 역전된 것은 온조왕 26년부터이다. 온조왕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거짓으로 사냥을 나간다고 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국읍을 병탄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온조왕 27년에는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이 항복함으로써 마한이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연대에 따르면 서기 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탈해 이사금 5년에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서기 60년에 해당하므로 백제본기에서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연대보다 52년이 지난 시기에도 마한이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본기에도 태조왕 70년에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기 121년에 해당한다. 같은 ‘삼국사기’인데도 백제본기,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중국 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는가?


서진에서 동진까지 156년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 동이열전 마한조에는 태강원년(太康元年, 280년)을 시작으로 태희원년(太熙元年, 290년)에 이르기까지 마한이 9차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진서’는 당시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마한은 최소한 290년까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가 8년에 마한을 병합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차이가 크며 290년은 병합된 시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기록에 대해 마한은 이미 백제에 병합되었거나 힘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에 서진에 사신을 보낸 주체는 마한이 아니라 백제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마한과 백제를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진서’ 함안2년(咸安二年, 372년)에 ‘견사배백제왕여구위진동대장군령낙랑태수(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백제가 사신을 보내오자 영동대장군 낙랑태수에 봉했다는 내용으로서 백제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진서’ 장화전(張華傳)에는 20여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282년에 해당하는 기록인데 앞의 ‘진서’ 동이열전의 마한과 구분되는 다른 지역의 마한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앞의 마한은 천안지역의 목지국이 중심이었고 뒤의 마한은 전남지역의 신미국이 중심이었다. 이는 마한 제국의 대외교류 활동이 권역별로 각각 그 맹주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 교과서의 4세기 병합설은 정설인가?


백제의 전남지역 마지막 마한 제국 4세기 병합설은 현재 다수설이 되어 교과서에 반영되어 있지만 모든 연구자들이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나 가야 7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회성 강습에 불과하였다는 견해, 왜와 안정적인 교역체계를 갖추기 위해 교역 거점을 설치한 사건이었다고 보는 견해, 475년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 병합한 것으로 보는 견해, 문제의 기사는 픽션이거나 후대 백제측의 현실과 기대감이 표출된 것일 뿐이라는 견해 등 이병도 박사의 4세기 병합설과 다른 견해들이 많이 있다.


2019년에는 문헌기록으로는 더 이상 4세기 병합설을 입증할 수 없다고 단언한 중견 역사학자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가장 최근이자 가장 분명한 견해인데 관련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백제학보’(29집)에 실려 있다. 60여년간 지속되었던 4세기 중엽설이 더 이상 수용되기 어렵게 되었음을 천명한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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