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581433200689101310


<3> 마한 백제국과 고대국가 백제는 죽순과 대나무의 관계인가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2020년 02월 12일(수) 


[마한과 백제의 관계]

마한-백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구분돼, ‘비류’는 마한계 선주민, ‘온조’는 고구려계 이주민


한성백제박물관의 서울 석촌동고분군(사적 제243호) 발굴조사 광경. 100여년전 유적분포 조사에서는 300기에 달하는 고분들이 밀집분포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지만 강남지역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10여기만 유적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2012년 11월 23일, 백제 건국에 대한 학술회의가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렸다. ‘백제, 누가 언제 세웠나’를 주제로 개최되었던 이 학술회의에서는 ‘누가’와 ‘언제’에 대해 문헌사와 고고학 분야에서 2인씩 발표하였다. 발표는 4인이 25분씩하였는데 토론은 좌장과 3인의 토론자가 동참하여 4시간 동안 이루어진 집중토론회였다.


주제발표와 종합토론 내용은 정리되고 총론이 부가되어 2013년 2월 28일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백제학연구총서 쟁점백제사 1’).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학의 정립과 확산을 위해 기획한 ‘쟁점백제사’ 시리즈의 첫 주제이자 백제 연구의 근간을 이루는 ‘누가’와 ‘언제’라는 주제에 대한 야심적인 집중토론의 결과물이었다.


백제 건국 주도세력에 대해 문헌사 분야의 발표에서는 서울 강남지역으로 남하한 부여계 이주민 집단으로 보았다. 온조 설화나 개로왕의 국서에 나오는 ‘與高句麗同(源) 出扶餘’는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 한다는 것에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대등하게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보았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필자가 발표하였는데 서울 강남지역은 청동기시대 이후 서북한의 고조선 세력, 동북한의 예 세력, 서남한의 마한 세력, 동남한의 변진 세력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후경부터 동북지역으로 이어지는 중도문화 세력이 들어오면서 변화를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이후 2세기 후반에 서북한 고조선계 토광묘 세력이 이주하였지만 큰 세력이 아니었고, 3세기 초에 분구묘 세력이 들어와서 마한 백제국(伯濟國)을 이루었으며, 3세기 중엽경에 고구려계 적석총 세력이 이주하여 고대국가 백제(百濟)를 출범시킨 것으로 보았다.


서울 석촌동 분구묘에서 출토된 목제 노(櫓) 보존처리 광경. 분구묘 주인공이 배와 관련된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서울 석촌동 분구묘 츨토 중국 육조 청자. 분구묘 주인공이 중국 문헌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마한 세력자임을 말해 준다.


◇ 백제 건국에 참여한 마한 백제국


서울 지역의 첫번째 역사적 실체는 마한 백제국이었지만 다른 마한 제국과 마찬가지로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적석총 세력은 새로운 이주민이었지만 이미 고구려의 국가 체제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손쉽게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정치도 신기술과 마찬가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백제 건국 주도 세력이 온조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서울 강남 일대에서 확인된 고구려식 적석총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이 적석총들은 고구려 중심 지역과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 임진강 유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3세기 전반의 적석총과 연결되고 있다. 고구려 이주민들이 한동안 임진강 유역에 머물다가 서울 강남지역으로 내려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 서울 강남지역에는 마한 백제국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내려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서울 강남지역 이주 뒤에도 단독으로 백제를 건국하지 못하였던 고고학 증거로도 입증된다.


서울 석촌동 1호 적석총은 대규모 쌍분인데 북분은 선주민인 마한계 분구묘가 변화된 백제식 적석총이고 남분은 순수한 고구려식 적석총이다. 고구려계 이주민과 백제국의 마한계 선주민이 연합하여 고대국가 백제가 출범하였음을 말해주는 고고학 자료이다. ‘삼국사기’에도 왕비를 배출하였던 진(眞)씨 집단이 내신좌평, 병관좌평 등을 맡아 큰 세도를 누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한 백제국의 성립에 대해서는 문헌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혀내기 어렵지만 황해 지역을 따라 확인되고 있는 분구묘 세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강 하구 김포 지역에서 성행하고 있었던 분구묘 세력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서울 강남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이들은 고조선계 토광묘 세력을 압도하면서 백제국을 이룬 다음 중국과의 교류를 주도하면서 성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주몽의 아들이자 형과 아우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형인 비류는 마한 백제국을 만든 선주민에 해당하고 아우인 온조는 고대국가 백제를 건국한 고구려계 이주민에 해당한다.


경기도 연천군 삼곶리 적석총. 고구려식 적석총으로서 서울 석촌동 고구려식 적석총에 선행하기 때문에 서울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하기 전에 머물렀던 백제 하북위례성과 관련될 것이다.


서울 석촌동 1호분. 고구려식 적석총과 백제식 적석총으로 이루어진 쌍분으로서 고구려식은 고구려계 왕, 백제식은 마한계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십제’, ‘백제국’, ‘백제’ 3자의 관계


고대국가 백제 건국은 역사적 사건이다. 관련된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십제(十濟)와 백제국(伯濟國)은 고대국가 백제(百濟)의 건국과 직결된 키워드이다. 하지만 백제 건국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 가운데 어느 세력이 문헌기록에 나오는 역사적 실체에 해당하는지 하나하나 특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십제는 문헌사 분야에서 백제 건국 이전 단계라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마한 백제국의 다른 명칭이거나 마한 백제국과 병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제는 백제와 관련되어 있을 뿐 마한 백제국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십제가 마한 백제국과 병행하였다면 ‘삼국지’에 함께 명기되었을 것이지만 찾아볼 수 없다. 십제가 마한 백제국과 병행하였음에도 ‘삼국지’ 집필 당시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십제에 해당하는 고구려 세력의 남하 이전에 ‘삼국지’ 집필에 이용되었던 자료들이 수집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십제로 표현된 고구려 세력의 남하는 ‘삼국지’ 집필 자료가 수집되었던 때보다 약간 앞선 시기였을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고고학 자료는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들일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마한에 천도 사실을 보고한 기록이 나온다. 하남위례성은 서울 풍납토성을 가리키고, 마한은 아산만 지역에 위치한 목지국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하북위례성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북한산이라는 견해, 중랑천 일대라는 견해 등이 있지만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긴 것을 천도라고 표현하기는 어색하다. 임진강 유역에 남아있는 적석총들을 감안하면 이 지역을 하북위례성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격적인 고대국가로서의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판단되는 세력은 3세기 중엽경에 임진강 유역에서 서울 강남지역으로 남하한 고구려 적석총 세력인 십제라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선주민인 마한 백제국 세력과 연합하여 본격적인 고대국가 백제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마한 백제국과 고대국가 백제는 죽순과 대나무 관계처럼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정확하게 구분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보다 이른 시기의 중도문화 세력은 마한 백제국에 이어 고대국가 백제의 기층세력을 이루었는데 동북한으로 이어지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사비 천도 이후 부여계임을 표방하였던 역사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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