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pUCHm1 (문서파일)
"해동성국 발해 : 제2부 발해의 문화 - 김동우" 중 "[문제제기 2]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계승국일까?"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문제제기 2]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계승국일까?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존재한 거대한 나라였으며, 그 구성원들도 복잡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더불어 여러 말갈족들이 살았다. 그리고 발해는 당, 일본, 신라, 거란 등 주변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기 때문에 발해 문화의 성격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전에는 발해사 귀속문제와 맞물려 발해 문화를 일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즉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를 무시하고 오직 고구려 계승국으로서 발해 문화의 고구려적 요소만을 강조한다거나,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무시하고 말갈 문화만을 보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자는 북한에서의 연구에서 두드러지며 후자는 중국 학자들의 견해들이다. 이것은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바라보는 시각차에서 기인되기도 하지만 발해 문화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부족한 것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면 발해 문화는 매우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계승국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고구려 문화만을 계승한 것은 아니다.
먼저 고구려적인 요소를 들면 묘제에 있어서는 석실묘, 특히 말각식으로 천장을 마감한 것은 고구려 양식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리고 주거문화에 있어서 온돌과 같은 난방시설, 연화문 와당, 네 귀 달린 항아리 등이 있으며, 성터에서도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 옹성과 같은 것들이 그대로 보인다. 또한 이불병좌상과 같은 불상은 고구려 이래의 신앙이 동경 지역에서 지속되어 온 결과이며, 양식 면에 있어서도 당의 것이 아닌 북위 양식을 이은 고구려 불상의 특징과 비슷하다.
다음으로 발해 주민으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말갈족들의 문화 요소도 보인다. 토광묘라든지 각종 도기 및 토기에서는 고구려적인 양식보다는 말갈의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갈적인 요소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가 대부분이 상류층 문화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많이 남아있지는 못한 형편이며, 토광묘나 그 유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 문화와 함께 발해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당 문화이다. 상경성의 구조가 당의 수도 장안성과 비슷하고, 유학 이념으로 가득 찬 발해의 정치기구와 여러 가지 정치제도가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정효공주묘비의 문장이 당에서 유행하던 변려체이며, 일본 문인들과 재주를 겨루었던 한시, 발해 삼채 등은 당에 유학생을 보내거나 활발한 교류를 한 결과일 것이다. 이밖에 발해 영토에는 위구르인, 실위인, 소그드인이 살았고 담비의 길과 같이 시베리아나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교와 샤머니즘의 흔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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