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거리 일대에 분포된 유적들을 발해시기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부거리 일대의 성곽은 평지성과 산성, 주변의 봉수대로 하나의 완벽한 방어체제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부거석성을 평지에 두고 교통요새의 남쪽에 위성으로서의 두 개의 작은 산성을 쌓아 부거석성을 호위하고 있으며 주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 11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여 철벽같이 부거석성을 지키고 있다. 이는 부거석성이 아주 중요한 성이었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다른 지역의 발해성곽에도 잘 반영되고 있다. 중국 경내 영안 발해진의 상경성, 화룡 서고성, 훈춘 팔련성 등 중요한 발해성곽의 방어체제가 이와 흡사하다.
2) 부거석성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무덤들이 유적의 연대를 확정하는 데 주요한 근거가 된다. 부거리 일대의 무덤은 대체로 석실봉토분, 석곽봉토분, 석관봉토분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연차골과 다래골 무덤은 전부 석실봉토분으로서 규모가 크고 다른 고분군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이 공존하지만 석실봉토분의 수가 많다. 돌로 무덤을 축조하는 것은 발해 무덤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부거리 일대의 무덤 구조와 기타 지역의 발해 무덤을 비교하면 같은 점이 뚜렷하여 발해시기로 판단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3)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특히 토기는 부거리 일대의 유적연대를 판단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무덤에서는 일정한 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태질, 기물형태, 제작방법 등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발해시기의 토기와 같거나 흡사하다. 이는 부거리 유적이 발해시기의 유적임을 유력하게 증명하고 있다.
4) 부거리 일대에 분포된 유적을 발해시기의 것으로 판단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구체적으로 발해의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 지금은 결론짓기 어렵다. 여러 곳에 떼를 지어 분포된 몇 천 기의 무덤이 한정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거리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국 동북 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교하면 발해 초기에 일정한 양을 차지하는 쌍진통형관(雙唇筒形罐, 말갈식 토기라고도 함)은 거의 보이지 않고 태질이나 구운 온도가 높은 윤제(輪制)된 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유적의 연대가 발해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지만 이 지역이 본래부터 고구려의 영토였고 민족구성에서 말갈인들의 수가 적거나 없으므로 하여 발해 초기 유적에서 흔히 보는 쌍진통형관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부거리 일대의 유적이 꼭 발해 중기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부거리 일대는 발해시기 동경용원부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원용원부가 설치되면서부터 형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으며 이렇다면 대체로 발해 중기 이후부터 형성된 유적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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