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Ⅱ.고조선의 성장과 교통로 -  2.위만조선의 성립과 교통로의 확대" 을 가져왔습니다.

위만조선의 성립과 교통로의 확대
이도학 1997년
 
B.C.2세기경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위만조선은 한(漢)과 교역을 하였다. 그 수출품으로는 낙랑단궁(樂浪檀弓)과 과하마(果下馬), 바다표범가죽, 담비가죽, 표범가죽과 같은 특산물이었다.22) 여기서 낙랑단궁은 뒤에 낙랑군이 설치되는 범역에서 생산되는 박달나무로 만든 활이 되겠다. 과하마는 과일나무 밑으로 타고 다니면서 과일을 딸 수 있는 작은 말을 가리키는데,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자리잡은 동예와 뒷날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흥기하게 된 고구려 지역에서 산출되는 강인한 체질의 말이다. 바다표범가죽은 동해안인 함경남도 덕원(德源)에서 산출되는23) 물산이고, 담비가죽과 표범가죽은 그 산출지가 내륙의 산간 지역이었다.

위만조선이 한(漢)과의 교역에서 수출품으로 내세웠던 물산을 통해 그 교역권 즉, 교통로의 개척 문제와 더불어 지배 범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낙랑단궁은 고조선의 직할지에서 산출되는 물산이라고 할 때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과하마는 동예나 고구려 지역의 특산물이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이 이들 지역과 교류없이는 장악하기 어렵다. 바다표범가죽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보겠다. 여기서 위만조선은 적어도 지금의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자리잡은 동예세력과 공납을 징수하는 형태이든 어떻든 물산의 교류가 있었다.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통로를 확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교통로는 위만조선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 지역이었던 만큼, 평양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언진산맥을 넘어 곡산을 지나 원산만으로 올라갔다가 동해안을 따라 남하(南下)하는 교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의 팽창은 위만이 요동태수를 통하여 형식적으로 한(漢)에 조공함으로써 외신(外臣) 관계를 맺었고, 이것에 대한 대가로 우세한 병기(兵器)와 재물(財物)을 얻어내 주변의 세력들을 정복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24) 위만조선은 자비령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소재한 진번국을 정벌하였고, 함흥평야 지역에 소재한 임둔국을 정벌하였다.25)

위만조선이 진번국을 정복함에 따라 평양에서 자비령을 지나 개성으로 하여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의 지배가 가능하였다. 이는 진번국 남쪽에 소재한 진국(辰國)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켜 주었다. 위만조선은 진국(辰國)이 한(漢)과 직접 통교하려는 것을 차단시키고 중개무역으로 강성해지면서, 한강 이남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아울러 위만조선이 임둔국이 소재한 함흥평야를 끼고 있는 동옥저 방면의 동해안으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소금과 해산물의 확보는 물론이고, 동해안로를 따른 세력 남하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위만조선의 세력권으로는 그 밖에 현도군이 설치되는 압록강 유역과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한 일대가 되겠다. 이곳은 B.C.128년에 예군 남려(濊君 南閭)가 위만조선 영향권에서 이탈하여 요동군에 내속(內屬)을 청했던 지역으로, 당시 2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26) 이러한 사실은 B.C.128년 이전에 위만조선이 이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뜻한다. 요컨대 고조선은 남부의 진번국과 동부의 임둔국, 그리고 북쪽의 뒷날 현도군이 설치되는 지역에까지 진출하였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한 교통로를 따른 팽창의 산물로서, 교통로의 개척을 전제하고 있다. 

위만조선 말기의 권력 핵심부에 이계상 삼(尼谿相 參)이니 조선상 역계경(朝鮮相 歷谿卿) 등과 같이 지명(地名)에 상(相)을 관(冠)한 고관(高官)들이 보이고 있다.27) 이는 그 지역의 지배세력들이 중앙에서 활동하였음을 뜻하며, 당시 위만조선은 이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제시키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뜻한다. 위만조선은 정복 지역의 수장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여 공동으로 정사를 보는 연합정권적인 권력형태였던 것으로 보겠다. 이와 관련해 위만조선 말기의 왕인 우거왕(右渠王)의 이름이 퍽이나 시사적인데, 좌거왕(左渠王)의 존재를 상정하게 하는 시각이 있는데 흥미있다고 본다. 위만조선의 권력 구조가 연합정권 형태였고, 게다가 흉노와의 관련설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흉노의 좌,우현왕제도(左․右賢王制度)의 영향 가능성도 고려해 볼 때, 그러하였을 개연성은 존재한다. 우거왕이 소재하였던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 일대이므로, 이러한 추리가 맞다면 좌거왕은 자연 함경남도와 강원도 방면을 관할했던 것으로 보겠다.

위만조선은 정복과정에서 개척한 교통로를 이용하여28) 교역으로써 강성하였고29) 나아가 그 교통로를 이용하여 군대진출을 시도하여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토로써의 편제라기보다는 공납의 징수나 타협 속에서 그 지역의 수장들을 중앙정계로 흡수하는 경우를 그려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은 당시 요동으로의 진출보다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의 진출에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조선이 한문제(漢文帝, B.C.179~157) 초(初)에 중국을 엿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30) 창해군 설치과정에서 보듯이 요동과 압록강 중류 지역을 잇는 교통로의 개척이 용이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위만조선은 교통로의 미개척이 한군(漢軍)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유리한 점이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한군(漢軍)이 왕검성으로 쳐들어 올 때 육군보다 수군에 크게 의존한데서도 방증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 본 위만조선의 팽창은 교통로의 개척을 가져왔다. 이때 개척한 교통로는 훗날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가 주변 세력들을 비교적 신속하게 복속시킬 수 있었던 요체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주석

22) 조선전사 2, p.104.
23) 李丙燾, 韓國史 古代篇(1959) p.259.
24) 史記 권15, 朝鮮傳.
25) 李丙燾, 앞의 책, p.10.
26) 漢書 권6, 武帝 元朔 元年條.
27) 史記 권15, 朝鮮傳 및 三國志 권30, 韓 條.
28) 製鐵과 토목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교통로의 개척을 도왔다고 본다.
29) 崔夢龍,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易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pp.65~75.
30) 史記 권25, 律書, 第3.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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