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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부 고대에는 요동반도가 조선반도였다" 중 한사군 관련 내용만 묶었습니다.

한사군은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


난하가 요서 문명과 황하 문명 경계선


1592년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아(임진왜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3000여명을 이끌고 참전하게 했으나 조승훈 군은 평양 전투에서 참패했다. 조승훈이 이끌고 간 부대는 양자강 일대에서 활동한 ‘남군(南軍)’이었다. 남군은 더운 지역에서 물가 싸움을 많이 하는 군대라 춥고 지상전투를 해야 하는 조선전쟁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교체한 부대가 이여송(李如松)부대다. 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은 요서 지역인 요녕성 금주(錦州)에 포진한 군벌이었다. 이 때문에 이여송은 만주지역에서 훈련한 ‘북군(北軍)’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여송이 금주 지역의 군대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것은 요서 지역의 지배권이 중국(명)에 넘어갔음을 뜻한다.


그러나 명나라도 요동 지역을 확실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지자 이곳에 있던 여진족의 8기(八旗)군이 일어나 조선을 공격하고(병자호란, 정묘호란) 이어 중원을 공격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淸)나라를 열었다. 청의 중국 지배는 요서 문명이 황하를 포함한 전 중국 문명을 지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것을 계기로 요서는 물론이고 요동 지방도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조선과 고구려,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요하 일대에서 일어난 세력은 항상 중국 세력과 다투려고 했다. 이들은 한반도에 있는 세력과도 싸웠지만 결전(決戰)은 대개 중국 세력과 벌였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시절을 비롯해 여러 차례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고구려가 중국과 국경선으로 삼은 것이 ‘난하’였다. 고구려가 난하쯤에서 공격을 멈췄다는 것은 고조선 때부터 이곳이 황하 문명과 요서 문명의 접경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 세력이 커지자 고구려는 산이 많아 방어에 유리한 국내성-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조금씩 동쪽으로 밀려났다.


그래서인지 중국은 난하에서부터 시작되는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자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곳이 오래전부터 중국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해문화 발굴을 계기로 중화제1용이니, 중화제1촌이니, 세계 제1옥이니 하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연나라 시절의 가짜 장성 만든 중국


난하 옆의 연산(燕山)에는 중국이 국경선 삼아 만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연산에서 동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요서지방에도 만리장성이 등장한다. 노노아호산 주변을 뱅뱅 돌아다닌 답사팀은 하가점을 지날 즈음 흙색을 드러내는 산에 흰색 시멘트로 만든 것 같은 ‘연장성유지(燕長城遺址)’란 글자를 발견했다.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의 장성(만리장성)이 이곳에 있었으니 요서 지역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영토라는 의미다.



적봉시 하가점 마을을 지날 때쯤 차창으로 본 ‘연장성유지’란 글귀. 이곳에 연나라 시절에 만든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주장인데, 이는 허구다. 

연나라 군대가 이곳에 들어와 일시적으로 성을 쌓았을 수는 있어도 항구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킨 적은 없다. 일시적인 지배를 항구적인 영유라고 한다면, 지금 이라크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이라크는 미국 땅이어야 할 것이다. 이 지역엔 만리장성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중국은 만리장성이 있었던 것 같은 교묘한 정치공작을 펼치고 있다. 연장성유지와 사해 유적은 중국이 어떻게 중화 문명 저수지론을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에는 중국 상나라 사람인 기자가 조선 땅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단국대 윤내현 교수 등은 기자는 고조선의 영역에 들어와 제후국 개념의 나라를 이끌었다고 주장하나, 중국 학자들은 “고조선은 설화 속에만 있는 실존하지 않은 나라다. 따라서 고조선이 곧 기자조선인데,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세웠으니 고조선은 중국사의 일부다”라고 주장한다.


기자조선으로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이 들어와 쿠데타를 일으켜 기자조선의 준왕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 이때 준왕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조선과 기자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면 쿠데타를 당한 준왕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갈 수 없다. 준왕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려면 그는 요서 지역에서 배를 탔어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고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판단해왔다. 고조선(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4군을 설치했다. 이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들은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었다.


옛날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은 문서(주로 목간이나 죽간이었다)를 주고받을 때,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가 문서를 열어보지 못하도록 진흙을 발라 봉인했다. 이를 ‘봉니(封泥)’라고 하는데 북한의 평양지역에서는 낙랑군 태수의 봉니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로써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봉니는 보내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낙랑군과 함께 4군으로 꼽히는 것이 임둔군이다. 발해에 면한 요녕성 조양시 남쪽에는 ‘여아하(女兒河)’라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 호로도(葫蘆島)시 남표(南票)구 여아가(女兒街) 태집둔진(邰集屯鎭)이라는 마을이 있다.


한사군은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


1997년 중국학자들은 이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발굴하다 2개의 봉니를 발견했는데 이 중 하나가 임둔군 태수의 봉니였다. 그때까지 임둔군은 실존이 불분명한 존재였는데, 봉니 발견을 계기로 임둔군은 실재한 것임이 밝혀졌다.


토성은 중국인들도 쌓았다. 그러나 이 봉니가 출토된 토성은 청동기 시대의 토성과 형태가 달랐다. 요서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토성은 지형지물을 따라 토성이 흘러가나, 태집둔진의 토성은 네모꼴이었다. 방형(方形·네모꼴) 토성을 쌓은 것은 중국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태집둔진의 토성은 황하 문명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쌓은 것이 분명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임둔군 태수의 문서를 주고받았다. 이곳이 임둔군이 있던 곳이라면 위만조선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 태수 봉니가 발견되었기에 북한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한다면, 임둔군 태수의 봉니가 발견된 태집둔에는 임둔군이 있어야 한다. 낙랑군과 임둔군은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북한의 평양과 중국의 호로도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대에는 육로보다 뱃길이 훨씬 더 수월한 통로였다. 호로도시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면 금방 요동반도 남단에 도달할 수 있다. 요동반도 동쪽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면 쉽게 대동강 하류에 도착할 수 있다. 요서나 요동반도에 있는 낙랑군은 뱃길을 통해 대동강 지역과 교류한 것이 아닐까.


북한에서 나온 ‘조선단대사(고구려사1)’ 119쪽에 실려 있는 고조선 유민 세력의 집결지와 고구려 서쪽 경계선, 그리고 한나라가 설치한 락랑, 현도, 림둔군의 위치를 그린 지도. 북한 사학계는 상당한 자료를 근거로 한4군이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판단한다.

중국 사서들은 한4군을 한반도가 아닌 예맥의 땅에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4군이 요서와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예맥 족 위치에 대한 비정도 바뀌어야 한다. 예족(동예)에 대해 중국 사서인 ‘삼국지(편자는 진수)’는 ‘예는 남으로는 진한,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렀다. (필자인 진수가 살고 있는) 지금의 조선 동쪽은 모두 예의 땅이고 호수는 2만이었다(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라고 적어놓았다.


한국 역사학계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는 표현을 근거로 동예를 지금의 동해에 면한 함경남도에 있었다고 비정해 놓았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에 언급된 동해는 지금의 동해가 아니라 요동반도 동쪽의 바다, 그러니까 압록강 하류와 접해 있는 서해(서한만)일 수도 있다.


한사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면 이 가설은 상당한 신빙성을 갖춘다. 이렇게 되면 동예와 옥저 그리고 고구려의 위치는 전혀 달라진다. 좀 더 개연성이 높은 쪽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점박이 물범이 사는 서해


요녕성 호로도시 남표구 태집둔진에서 발견된 토성. 네모형을 이루며 반듯하게 나가는 전형적인 중국 토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4군의 하나인 임둔군 태수의 봉니가 출토됐다.(좌) 백령도 인당수 부근 바위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점박이 물범. 요동반도에 있었던 동예는 이 물범을 잡아 가죽을 중국에 수출했을 것이다.(우).

중국 사서는 동예는 반어피(斑魚皮)를 중국에 수출했다고 적고 있는데, 반어피는 얼룩점이 있는 물범 가죽을 가리킨다. 지금의 동해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는 1950년까지 ‘강치’라고 불린 물개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독도 동남쪽에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오키(隱岐)제도와 러시아 연해주, 사할린 지역의 무인도에만 출몰하고 있다. 현재 오키 제도에 출몰하는 물개는 얼룩점이 없다. 과거 동해에 얼룩점이 있는 물개가 살았다고 해도 그 수는 서해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얼룩점이 있는 물개는 서해에 서식한다.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는 백령도 부근에 있는 바다인데, 인당수 일대의 무인도는 대표적인 점박이 물범의 서식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점박이 물범은 요동반도까지 몰려가 살았음이 분명하다. 동예인들은 이를 잡아 가죽을 중국에 수출했을 수 있다.


동예가 요동반도에 있었으면 진수가 살았을 때의 조선은 요서와 요동 지역(요동반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동예가 요동반도에 있고 그 북쪽에 고구려가 있어야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다는 중국 측의 기록,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한국과 중국 측의 기록이 일치한다. 이로써 고조선이 요서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니, 요서 지역에서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주인공은 고조선족이 된다. 이러한 발견은 환단고기 등에서 한민족은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을 거쳐 발전해왔다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6.html 
(연장성 사진)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7.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8.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9.html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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