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부 고대에는 요동반도가 조선반도였다" 중 마지막 페이지만 묶었습니다.

황하 문명에 연패한 요서 문명

황하 문명에 연패한 요서 문명

청동기 문명을 일으킨 고조선은 왜 황하 문명을 일군 세력에 밀린 것일까. 그 이유는 요서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기가 황하 지역에서 생산되는 청동기보다 적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비파형 청동검만 주로 발굴되나 황하 일대에서는 무기류를 넘어서 ‘정(鼎)’으로 불리는 의식용 제기 등도 다량 출토된다. 이는 황하 문명의 청동기 생산량이 요서 문명보다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인구 증가에서 요서 지역이 밀린 것을 거론할 수 있다. 지금 요서와 요동 지역은 상당히 건조하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와 체감온도가 매우 낮다.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주지로는 마땅치 않은데 요서 문명이 꽃피던 시절엔 농업을 하기 좋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후 변동이 일어나 건조해지고 추워지면서 농업생산량이 급감해, 사람들은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먼저 철기 문명을 일으킨 황하 문명이 요서 문명을 공격했으니 요서 문명인들은 싸우면서 동남진해 지금의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는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들어오기 전인 춘추 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5만의 병력으로 조선 땅 2000여 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고조선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고구려족 예족 맥족 부여족 여진족 등을 지배하고 있던 고조선의 힘이 크게 약화되고, 이 부족들이 독립해 패권을 다투는 춘추 전국시대와 유사한 열국(列國) 시대가 열렸다.

이 경쟁에서 부여가 패권을 잡다가 이어 고구려가 떠올라 통일을 이룬다.이때 황하 문명권이 수와 당에 의해 통일되었으니, 두 문명은 또다시 쟁패를 하게 된다. 1차전인 수나라와의 싸움에서 고구려는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렀다. 그러나 2차전인 당나라와 싸움에서는 패배했다. 고구려는 연나라와 한나라에 당한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요동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졸본→국내성→평양의 동남(東南) 방향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은 황하 문명권의 공격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도읍을 옮겼다고 하여 모든 국민이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같은 자리에서 생활한다.

고구려가 패망하자 이들은 발해를 일으켰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난 위치에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당나라는 요서와 요동을 상시 지배하지 못했다. 무주공산이 된 요서와 요동 지역에서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인들이 일어나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무너뜨리고 이어 여진족이 일어나 금나라를 세웠다.

요와 금은 서로 싸웠지만, 두 나라 모두 황하 문명권을 공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를 세운 황하 문명권을 상당히 압박했으나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즈 칸 세력의 공격을 받아 패망했다. 그러나 명나라 시절 여진족은 다시 일어나 조선을 제압하고 이어 황하 문명권을 쳐들어가 전 중국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청나라를 이룬 여진족은 한민족과 참으로 특이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라크에 파병돼 있는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은 쿠르드 자치구 지역이다. 쿠르드인들은 이라크와 시리아, 이란, 터키 접경지대에서 2000여 년 동안 나라 없이 지내왔다. 그리고 지금은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구를 토대로 ‘쿠르디스탄’이라는 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시절 대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패한 후 사라졌다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독립국가를 세웠다. 쿠르드인, 마케도니아인, 여진족은 수천년간 나라가 없었는데도 종족을 유지해온 공통점이 있다.

중국 사서는 여진을 숙신, 물길, 말갈, 여진 등을 거쳐 최근에는 만주족으로 표기한다. 요서지방에서 일어나 북위를 세운 선비족,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중국에 동화돼 사라졌으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민족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지금도 만주지역에 가면 도처에서 만주족자치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만주족은 내몽골인 이상으로 중국화되었다.

동북아의 쿠르드족, 여진

한국 역사학계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 우리 역사를 만든 나라로 인정해 ‘삼국 시대’란 말을 사용한다. 3국이 쟁패하던 시절 여진족은 고구려편에 참여해 3국의 싸움에 당당히 참전했다. 서기 216년을 전후한 시기 말갈군은 백제의 적현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서기 478년경부터는 신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는 기록이 있다. 말갈인들은 당태종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도 결사항전을 벌이다 붙잡혀 수천명이 생매장당했다고 한다.

발해도 여진족의 도움을 받아 세운 나라이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여진족의 도움을 받았다. 고려와 조선은 여진인을 외국인이 아닌, 역내에 있는 야만인으로 대한 흔적이 많다. 왜 여진족은 한민족에 대해 강한 친연성(親緣性)을 보인 것일까. 여기서 몇몇 학자는 여진족은 고조선을 형성한 핵심 종족이기에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와 발해 고려에 협력했다고 주장한다.

요서 문명과 고조선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려면 반드시 여진족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1945년 이후 요서 문명의 후예로 살아남은 것은 남북한뿐인데, 지금 북한의 처지는 영 말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력에서 G-10 수준에 올랐지만, 역사의식에선 발칸반도의 약소국 마케도니아인보다도 못한 면을 보이고고 있다.

정치의 영토는 좁아도 의식의 영토는 넓어야 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실 정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문화의 뿌리를 찾으려면 한국은 요서 문명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은 요서 문명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재단은 언론이 동북공정 문제를 집중 보도한 덕택에 피동적으로 탄생했다. 의식 있는 역사학자들이 노력해서 만든 기관이 아니다보니 내놓은 성과도 미미한 편이다. 중국의 역사 공세에 맞서 우리의 뿌리를 찾으려면 동북아역사재단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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