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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중 2개의 "동북공정" 내용 부분만 가져와서 묶었습니다.

‘중화제1촌’을 만든 중국의 정치력

황화 문명에 통합된 양자강 문명

수송이 가능한 큰 강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중국의 양대 강인 양자강에도 그러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1972년 중국 학자들은 양자강이 흐르는 절강성 여요(餘姚)시 나강향(羅江鄕)의 하모도(河姆渡)라는 곳에서 서기전 5000년에서 서기전 4500년 사이에 번창했던 신석기 유적을 찾아내고 이를 ‘하모도 문화’로 명명했다. 중국 병법서인 ‘손자’에는 춘추 시대 오나라왕 부차와 월나라왕 구천이 서로 미워해 다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가 있는데, 하모도 문화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만든 종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 시대의 혼란에 참여하면서 일찌감치 황하 문명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있으므로 중국 역사학계는 요서 문명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중국 처지에서 다행인 것은 요서 문명은 거란이나 여진(만주) 등으로 전파된 것 같은데 이들은 모두 중국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일으켜 송나라를 압박하다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여진족은 금에 이어 청을 세워 전 중국을 석권했으나, 1911년 손문이 일으킨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중국 역사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1932년 일본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다시 이 지역을 중국의 역사 공간에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만주국은 중국에 병합됐으니, 중국은 요서 문명을 제2의 하모도 문화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요하 문명에서는 ‘옥밭’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옥기가 출토되었다. 옥기 중에는 뱀처럼 가늘고 긴 모양을 한 것이 많다. 요하 문명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펼친 중국 측의 첫 번째 노력은 이 옥기를 근거로 이곳이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탄생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요서지역에서 만들어져 황하 문명에 들어왔다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요서 지역에는 용의 모델인 악어가 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힘을 잃었다.

저수지론을 따르는 중국은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로 하모도 문화를 황하 문명에 합병시키며 정치 지평을 양자강 이남으로 확대시켰다. 중국은 저수지론 방법을 지금 요서 문명에도 적용하려 한다.

요서 지역인 요녕성 부신(阜新)시 부신몽고족자치현의 101번 도로변엔 ‘사해(査海)’ 마을이 있다. 1982년 이곳에서는 서기전 6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형성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취락지가 발견되었다. 중국은 즉각 이 마을 입구에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이라는 글귀를 새긴 여신상을 세웠다. 

저수지론을 따르는 중국은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로 하모도 문화를 황하 문명에 합병시키며 정치 지평을 양자강 이남으로 확대시켰다. 중국은 저수지론 방법을 지금 요서 문명에도 적용하려 한다. 

부신 사해유지박물관(맨 오른쪽) 뒤에는 서기전 6000여 년 고대인들이 용 모양으로 돌을 박았다는 석소용이 있다. 그러나 석소용이 진짜로 용이라는 증거가 없자 중화제1용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부신 마을 앞에 있는 ‘중화제1촌’ 석상(가운데)  

‘중화제1촌’을 만든 중국의 정치력

이곳에서는 당시로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옥기가 발견되었다. 또 흙에다 돌을 박아서 용 모양을 만든 것도 발견됐는데 중국은 이를 ‘석소용(石塑龍)’으로 명명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용이 발견됐다”고 선전했다. 중국은 길이가 19.7m이고 너비는 1~2m인 석소용 앞에 사해유지박물관을 세우고, 옥기와 토기 등을 진열한 이 박물관을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석소용으로 명명한 중화제1용은, “용은 악어에서 유래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하면서 관심권에서 벗어났다. 석소용은 요서 문화가 황하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둘이 합쳐서 중국 문명이 탄생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증거 미비로 흐지부지돼버린 것이다.

중화제1촌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이유는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寶國吐鄕)의 흥륭와촌(村)에서 서기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거주지터가 발견되고 이어 소하서 마을에서 서기전 7000년의 주거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흥륭와에서는 옥기도 발굴돼 부신 유적은 ‘세계 제1옥’이라는 타이틀도 내놓게 되었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고 한 중국의 노력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중국은 다민족을 이끄는 대국이 될 수 있었다. 중국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요녕성 수도인 심양의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이를 ‘요하 문명’으로 정의했다.그리고 동북공정을 통해 요하 문명을 황하 문명에 결합시키는 저수지론을 펼치고 있다.

요서와 요동 지역이 중국의 무대가 된 것은 명나라부터다. 이전까지 요서와 요동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만주로 통칭되는 이곳으로 중국이 지속적인 지배권을 뻗친 것은 주원장이 일으킨 명나라군이 몽골군을 추격해 만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6.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4/07/200804070500005/200804070500005_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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