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380
그때 박근혜의 '생얼'을 의심했더라면…
[주간 프레시안 뷰] '과거'로 날밤 새우는 박근혜 정권
임경구 기자 2014.12.12 09:32:17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은 역동적이었습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부터 박근혜 후보의 깨끗한 패배 인정까지, 정권 탈환이라는 목표의 8할은 예선에서 달성됐습니다. 그 과정을 돌아보면,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부 10년 시대의 맹아를 틔운 결정적 계기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해 7월 19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입니다. 한나라당이 자당의 대선후보들을 스스로 검증 무대에 올리고 이를 TV로 생중계한, 정당사 초유의 정치 실험을 감행한 겁니다.
검증위원 대부분을 외부 인사로 구성해 객관성을 높이고 전직 검사, 변호사, 회계사, 교수 등을 두루 포진시켜 후보들의 각종 의혹을 파고들었습니다. 앞선 두 번의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 자녀의 '병역비리 의혹'에 발목이 잡혀 연거푸 패배한 전철을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상대의 네거티브 공세에 끌려다닐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까발리자.' 정권 탈환이 절실했던 한나라당은 날렵하기까지 했습니다.
▲ 2007년 7월 1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국민검증청문회 당시 박근혜 대선 경선후보. ⓒ국회사진기자단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도곡동 땅 문제 등으로 비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최태민 목사 등과의 베일에 싸인 과거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이 스스로 대선후보들의 치부를 공개 검증한 역발상의 효과는 컸습니다. 혹독한 자체 검증으로 본선에서 등장할 네거티브 공세의 뇌관이 해체됐습니다. 후보들은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고, 국민들에겐 면역력이 생긴 셈이죠.
그 약발에 힘입어 2007년 대선 직전까지 상대가 물고 늘어진 BBK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는 무려 530만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5년 뒤인 2012년 대선에서까지 그 효과를 봤습니다. 야당은 그토록 흉흉하게 회자되던 '박근혜 X파일'은커녕, '최태민'이니, 그의 사위이자 박근혜 캠프의 막후 실세로 통하던 '정윤회'니 하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분위기상, 이걸 야당이 꺼내들었다면 틀림없이 역풍을 맞았을 겁니다.
그런데, 정치 전략 차원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가 국민들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됩니다. 비리 의혹을 주렁주렁 달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끝내 비리 정부로 막을 내렸습니다. 비리에 개입된 실세들이 줄줄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막대한 국고를 축낸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는 이제야 그 일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력에도 결코 바뀌지 않는 본성이란 게 있나 봅니다. 권좌에 오르기 전에 그의 본성을 좀 더 심각하게 의심했더라면….
이명박 정부가 '비리'로 완벽한 수미일관을 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과거'로 날밤을 지새울 모양입니다. 자신의 과거와 그 과거에 연관된 인물들이 거론될 때, 박 대통령은 이상할 만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절제된 언어를 파괴력 있는 메시지의 원천으로 삼아온 박 대통령에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묘연한 행적을 정윤회 씨와 결부시킨 일본 <산케이신문>을, 국제적 망신을 무릎 쓰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최근 정윤회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서를 박 대통령이 "찌라시"라는 단어로 뭉개버린 일도 그러합니다. 검찰 수사 가이드라인이라는, 뻔히 예상되는 비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의 '썰렁 개그' 코드와 달리 농담에서조차 레이저 광선을 쏘아댑니다. 지난 12월 7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부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실세가 없으니까 (내가 키우는) 진돗개가 실세라는 얘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새누리당 지도부는 정말 농담으로 들었을까요? 제 귀엔 정윤회 씨와 골방에서 만나 공깃돌 주무르듯 나랏일을 농단한 의혹을 사는 '문고리 3인방'을 절대 의심하지 말라는 강한 경고로 들립니다. 박 대통령이 "이들은 15년 동안 나하고 같이 묵묵히 일만 한 사람들이다. 그동안 잘못을 했다면 나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감싸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박 대통령은 왜 평상심을 잃고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했을까요.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비선 실세를 의심하면 곧 자신을 의심하는 '불경죄'로 간주하거나, 꼭꼭 감춰둔 과거로 연결되는 어떠한 단서도 결코 용납해선 안 될 각별한 이유가 있거나.
2007년에도 똑같았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세간에 떠도는 최태민 목사의 과거 비리 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자 "천벌을 받으려면 무슨 짓을 못하느냐는 말도 있다"고 쏘아붙였습니다. 의혹 제기 자체가 천벌을 받을 짓이라는 얘기였죠. 과민함이 되레 의심을 키웠습니다. 문제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조차 최태민 의혹에 대한 검증위원들의 천벌받을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습니다.
검증위원 : (박정희 정부 시절) 최 목사가 박 후보 이름을 팔아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는 소문이 났는데도 청와대 출입을 이상하게 여겨 조사가 이뤄졌다. 당시 정보부 보고에 공사 수주, 진급, 국회의원 공천 관련해 돈 받은 사실을 포착한 것으로 돼있다. 40여건 정도다. 정보부는 최초에 최 목사를 구속하자고 했다고 한다.
박근혜 후보 : 이런저런 비리 문제에 대해선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아버지한테 보고를 올린 것으로 안다. 아버지께서 중정 부장과 관계자를 청와대로 부르시고, 나도 불러 직접 조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용들이 막연했다.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느냐 보고하라고 했는데 그 답이 확실치 않았다. 실체 없는 얘기로 끝났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대검에서 확실하게 조사하고 필요하면 조치하라고 했다.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실은 별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련 씨의 비망록에는 전혀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요지는 최 목사를 구국봉사단 총재에서 내치고 청와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박 전 대통령이 내렸다는 겁니다. 다만, 이 지시는 추후 최 목사와 영애(박근혜)의 접촉을 막는 조건으로 최 목사의 구국봉사단 활동은 허락하도록 완화됐다고 합니다.
이를 검증위원들이 캐묻자 박근혜 후보는 "비서관을 지냈다고 해서 전부 사실에 입각한 증언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 모든 이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줬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구체적 날짜까지 적힌 공보비서관의 비망록보다 자신의 말을 믿으라는 강변입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보고된 공식 기록 문서를 "찌라시"라고 부정한 최근 박 대통령의 태도와 너무도 똑같습니다. 졸지에 청와대는 '관제 찌라시'를 생산·유포하는 악성 유언비어의 진원지가 돼버렸죠. 아니면 정윤회 씨가 당당한 모습으로 검찰에 나서며 "이런 엄청난 불장난을 누가 했는지 다 밝혀질 것이며 또 그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도 다 드러날 것"이라고 한 말처럼, 청와대가 국정의 사령부가 아닌 음모와 비방이 판치는 권력 암투의 장이라는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장난'을 진화할 소방수로 호출된 검찰은 대통령의 지침에 매우 기민하게 부응하고 있습니다. 임기 2년차가 끝나지 않은 서슬 퍼런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을 넘어설 검찰이 아니란 건 지난해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낼 때 알아봤던 바입니다. 수사는 문건에 담긴 내용이 항간의 잡설들을 모아 집대성한 근거 없는 헛소리라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정윤회 씨도 '십상시'도 '3인방'도 혐의를 벗겠죠. 그래도 이어질 정치적 공격은 검찰 수사 결과를 들이밀어 막아내면 끝. 레임덕? 섣부른 얘깁니다. 혹여 야당이 그러길 바라는 심산으로 지금 국면을 대하면 정치적 소모전으로 치환돼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비리'처럼 박근혜 정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과거'가 작동할 공산은 매우 큽니다. 정윤회 씨는 왜 가명까지 써가며 박 대통령의 공식 팬클럽인 '호박가족'에 섞여 독도에 갔는지, 승마협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는 어떤 흑막이 있었기에 정 씨의 딸 문제로 박 대통령이 말단의 국·과장 이름까지 거명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했는지, 박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유진룡 장관을 내쫓다시피 경질하고 몹쓸 사람을 만들어 진실게임을 벌이는지, 도대체 박 대통령은 최태민 일가와 어떤 과거지사로 얽혔기에 40년 동안 이어지는 칙칙한 뒷소문에도 그들을 감싸고만 도는지….
박 대통령의 그림자 권력에 대한 숱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권력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수록 지금 당장 밝혀지지 않은 사실과 함께 실체를 보일 겁니다. 이명박 정부의 비리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이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의 한나라당이 아닙니다. 두 번의 집권에 성공하며 스스로 뇌관을 해체할 배포가 사라졌습니다. 미래 권력에 대한 절박함도 무뎌졌습니다. 박 대통령이 "찌라시"라고 일축한 그 자리에서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비선 의혹을 해소하라는 직언은커녕 "대통령 각하께 박수 한 번 보내자"며 구시대적 교언영색을 했다는군요.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통령 앞에서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과 우리 새누리당은 한 몸"이라며 또 한 번 몸을 사렸습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이 와중에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특강에서 "박정희 딸이라고 동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학생들과 입씨름을 벌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모두 집권세력 몸에 기름기가 잔뜩 붙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비선 실세 의혹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흥밋거리로 '궁중 비사'를 소비하는 게 아닙니다. 2007년에 미처 걸러내지 못한 업보로 비리 정부와 비선의 늪에 빠진 정부를 연달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겁니다. 야당 잘 만나 집권 10년을 거저 얻은 새누리당 정부의 본성을 똑똑히 본 국민들이 다음 권력까지 이들에게 믿고 맡길지 지켜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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