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에 대처하는 정치인의 자세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강공 드라이브로 무상급식이 5년 만에 다시 정치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대선후보군 여론조사에도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시끌벅적한 무상 논란을 가만 들여다보면 한국 정치의 흥미로운 지형이 보인다. 누가 정치적 이익을 볼 것인가.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무상급식은 묘한 역설을 담고 있다. ‘무상’과 ‘급식’이 한 단어에서 맞붙어 싸운다.
경상남도가 촉발한 급식 논란이 날을 거듭할수록 달아오르는 가운데, ‘무상’이 인기 없는 구호라는 사실 또한 거듭 확인되고 있다. 한국갤럽은 3월 셋째 주와 4월 첫째 주 두 차례 ‘전면 무상급식’과 ‘소득 고려 선별 급식’을 보기로 내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비슷했다. 선별 급식 지지는 66%(3월 셋째 주)와 60%(4월 첫째 주)였고, 무상급식 지지는 31%와 37%였다. 무상급식 지지 여론은 소수파다.
그나마 무상급식은 지지 기반이 있는 편이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를 준비했던 원혜영 의원(새정치민주연합) 측 핵심 관계자는 1년이 지난 지금도 ‘무상의 악몽’을 생생히 떠올린다. 당시 원혜영 캠프는 경기도지사 선거의 핵심 어젠다로 ‘버스 공영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김상곤 당시 경기도 교육감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로 방향을 틀면서 ‘무상버스’ 공약을 들고 나왔다.
ⓒ시사IN 조남진
김 전 교육감은 무상급식을 전국 의제로 만든 당사자로 ‘무상 브랜드’에 애착이 강하다. “거기(김상곤 후보)와 우리(원혜영 후보) 둘 다 엉망이 됐다. 거기는 또 무상이냐고 두들겨 맞고, 우리는 정작 무상 공약은 있지도 않았는데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고… 정책 논의는 해보지도 못하고 휩쓸려 갔다.” 경기도지사 예선전에서 두 후보는 모두 탈락했다.
새누리당은 이제 전략적으로 ‘무상’을 강조한다. ‘무상’은 대중에게 공짜의 기대감보다는 혐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럴까. 정치심리학이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는다. 사람들은 복지정책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때 제도의 총체적인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 정하지 않는다. 대신 직관적이고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복지제도의 수혜자가 그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군가가 노력을 다했지만 운이 없었을 뿐이라면, 그는 자격이 있다. 하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복지에 기생하려 드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이런 심리적 경향의 기반을 진화의 산물로 설명한다. “우리의 마음은 원시공동체 사회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원시공동체에서 큰 과제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나누지는 않으면서 받아먹으려고만 하는 사기꾼을 식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우리는 ‘불운한 개미’는 돕지만 ‘게으른 배짱이’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수혜자의 자격’ 문제를 해결하는 복지제도는 여론의 지지가 높다. 어느 나라건 실업급여 제도는 수혜자가 적극적 구직 활동을 하도록 요구하곤 한다. 이런 자격검증형 복지제도에는 여론이 더 관대한 경향이 있다.
‘재벌 회장 손자의 밥값’ 질문이 먹히는 까닭
이 관점에서 보면 ‘무상’은 듣는 사람이 복지제도를 반대하도록 이끄는 단어다. ‘수혜자의 자격’을 아예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면 사기꾼을 식별해낼 수 없다는 공포가 원시공동체에 맞춰 진화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 무상급식 논란에서 보수가 즐겨 쓰는 수사법 중에 “이건희 회장 손자에게도 공짜 밥을 줘야 하나?”가 있다. 이 주장은 이건희 회장 일가가 평균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낮지만, 본능적인 무자격자 퇴출 스위치를 정확히 누르기 때문에 보수 정치인들이 되풀이한다.
‘무상’이 야권의 약점이라면, 여권의 아킬레스건은 ‘급식’이다. 전중환 교수는 “아이들은 수혜의 자격을 따지기 이전에 자체로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보살피는 마음 역시 강력한 인간 본성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급식 복지와 보육 복지는 ‘무상에도 불구하고’ 넓은 지지 기반을 갖게 된다.
학계의 논의와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비교적 일관되게 ‘무상’이 복지 반대 스위치를 누르는 단어라고 지목한다. 새누리당이 전략적으로 ‘무상’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급식 논란이 확산되자 “간디학교와 같은 귀족 학교에까지 무상급식을 하는 것은 복지 낭비다”라고 말했다. ‘자격 없는 수혜자’를 혐오하는 대중 정서를 자극한다. 반대로 ‘급식’이 부각될수록(“애들 밥그릇을 걷어차면 되나”), 줬다 뺏는다는 분노를 건드릴수록(“처음부터 주지나 말 것이지 이게 뭔가”), 우리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는 기분이 들수록(“왜 경남에서만 돈을 내야 하나”), 급식 복지의 지지세가 커진다. 경남 학부모의 여론이 이런 흐름을 탔다(경남 아이들만 무슨 죄예요? 참조).
새누리당이 ‘무상’ 코드를 이용해 여론을 끌어당기려 하는 반면, 야권은 대체로 전략적 고민 없이 끌려가는 모습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최고위원회의나 공식 브리핑에서도 무상급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이 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2012년 대선 당시 이른바 ‘3무1반’ 공약을 내걸었다.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3무)와 반값 등록금(1반)을 합친 용어다. 3무1반 공약이 대선 국면을 뒤흔들었다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맞춤형 복지’를 내세웠는데, 이는 듣는 이에게 자격 검증을 보장하는 효과를 낸다.
문재인 대표의 핵심 측근은 “무상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는 목소리도 물론 있다. 하지만 ‘무상’이 보편적 복지의 가치를 상징하는 핵심어이므로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다양한 의견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는 2010년부터 쭉 써온 용어를 바꾸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정치인의 체급과 위치에 따라서도 무상급식 논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한국갤럽은 매달 둘째 주 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를 공개한다. 첫째 주 조사에서 주관식 질문으로 ‘예선전’을 치르고, 여야 상위 네 명씩을 추려 ‘본선’ 조사 결과를 내놓는다. 야권의 ‘빅 4’는 지난해 8월 첫 조사 이후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문재인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 안희정 충남도지사다.
4월10일자 한국갤럽 정례조사에서 흥미로운 이변이 일어났다. 예선전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제치고 이재명 성남시장이 본선에 진입했다. 야권 후보군에 변화가 온 것도, 기초단체장이 대선주자 후보군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다. 새누리당 쪽에서는 홍준표 지사가 두 달 만에 다시 예선을 통과했다. 지난달인 3월에 홍 지사를 제쳤던 인물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홍준표 지사는 ‘무상’ 코드를 자극하면서 보수 내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연합뉴스
홍준표, 오세훈, 이재명은 다 무상 논쟁의 주역들이다. 홍 지사는 경남도에서 포문을 열었다. 오 전 시장은 “무상급식은 최악의 정책이다”라며 참전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무상 산후조리원에 이어 무상 교복 정책을 검토하는 등 이른바 ‘무상 시리즈’를 쏟아내 홍 지사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셋은 공통점이 있다. 몸담은 진영에서 적통이라기보다는 변방에 속하고, 미래의 지도자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유력하지는 않다. 이런 위치의 정치인은 우선 ‘진영의 대표선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재명 시장은 기초단체장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국 인지도를 확보했다. 홍 지사와 오 전 시장은 선명한 무상 반대 노선을 내세워 보수의 아이콘 자리를 노린다.
그러나 셋의 선명성 강화 노선이 진영 전체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새누리당은 홍준표 지사의 강공 드라이브를 어정쩡하게 바라본다. ‘무상 포퓰리즘’이라는 공세에는 동조하지만, 급식 복지 전체에 각을 세우는 과격함은 껄끄럽다는 기류다. 이재명 시장의 무상복지 시리즈는, 개별로 뜯어보면 행정적·재정적 합리성을 갖췄다는 평이 있지만, 무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순간 정치적으로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낸다. 소수 지지층의 열광과 관망층의 우려를 동시에 자극한다. 여기서 정치인 개인의 합리적 선택과 진영 차원의 최적 경로가 엇갈린다.
‘끌려오거나 혹은 이탈하거나’ 중도층의 두 얼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하고 있다. 2015.4.8 ⓒ연합뉴스
‘적통’을 이었거나 전국 단위 선거에 눈높이를 맞추는 정치인의 궤적은 이들과는 달라진다. 4월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증세’와 ‘공정한 시장경제’와 ‘재벌 개혁’을 연이어 거론했다. 대체로 진보의 관심사로 간주되던 주제다. 다음 날인 4월9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경제’를 99번이나 언급하며 보수 의제에 침투하려고 시도했다. 중도 표를 끌어와야 총선과 대선을 이길 수 있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중도 표를 끌어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를 들면 무상급식으로 대표되는 복지 이슈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중도 표를 가져오는 길일까. <표 1>을 보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진보·보수 개념도다. 이 그림에서 진보와 보수는 일직선상의 위치로 표시된다. 중도는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사이에 있는 이들이다. 이 모형에서 중도는 비합리적이고, 정치적 선호가 모호하다고 간주된다. 이 <표 1>의 세계에서는 중도 표를 잡겠다고 가운데로 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제를 강하게 내세워서 중도를 끌어오는 동원 전략이 좋을 수 있다. ‘무상’ 찬반의 양쪽 극을 달리는 ‘홍준표-이재명 모델’이 이렇다.
그런데 허버트 키트셸트(Herbert Kitschelt) 등 일군의 정치학자들은 이런 일직선 모형과는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표 2>가 된다. 가로축은 경제 이슈에 대한 태도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시장 자유를, 왼쪽으로 갈수록 국가 개입을 선호한다. 세로축은 사회문화 이슈에 대한 태도다. 위로 갈수록 개인 자유를, 아래로 갈수록 권위주의 취향을 나타낸다. 두 축에 대한 태도는 같이 갈 수도 있고 갈릴 수도 있다.
전통적인 진보의 자리는 왼쪽 위(경제 개입주의와 사회문화 자유주의)다. 전통적 보수의 자리는 오른쪽 아래(경제 자유주의와 사회문화 권위주의)이고, 왼쪽 아래(경제 개입주의와 사회문화 권위주의)도 보수의 영토에 가깝다. 문제는 두 진영 모두가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 오른쪽 위(경제 자유주의와 사회문화 자유주의)다.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인 정한울 박사(정치학)는 “이런 모형에서 중도층은 전통적인 의미의 ‘동원’ 대상인 중도와는 다르다. 기존 정당이 정체성을 강화하면 이들은 끌려가는 게 아니라 이탈한다”라고 진단했다.
<표 2>의 핵심은 유권자 모형을 하나의 진보·보수 축이 아니라 둘 이상의 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는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 복지 논쟁을 중심으로 변형해본 도식이 <표 3>이다. 정통 진보는 ‘복지 확대-보편 복지’ 조합을 선호한다. 정통 보수는 ‘복지 축소-선별 복지’ 조합을 선호한다. 그런데 복지 확대를 원하면서도 선별 복지를 선호하는, 그러니까 전면 무상에 반대하고 수혜자의 자격 검증을 원하는 여론이 적지 않게 있다.
홍준표-이재명 모델은 각자 속한 진영을 정통파 쪽으로 더 끌어당긴다. <표 1>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중도 표를 끌고 오는 효과를 내지만, <표 3>의 세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격전지’를 버려두는 결과가 된다. 이 세계에서 동원 전략은 먹히지 않는다. <표 2>의 ‘문재인-유승민 모델’은 정반대다. ‘격전지’의 유권자를 상대로 동원이 아니라 침투를 시도한다. 둘 중 어느 전략과 노선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두 모델 모두 각자의 처지에서 합리적인 대목이 있다. 단지 정통성과 체급과 목표의 차이 때문에, 무엇이 합리적 선택인지가 서로 다를 뿐이다.
2010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여겨졌던 무상급식이 5년 만에 다시 정치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개별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저마다의 신념과 셈법에 따라 이 이슈를 다룬다.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정치의 실력·과제·지형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끌벅적한 무상 논란이 드러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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