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아이들만 무슨 죄예요?
홍준표 지사의 급식 지원 중단으로 경남 곳곳이 들썩인다. 학교 앞 1인 시위, 도청·시청·군청 앞 집회가 경남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지고 있다. 도민들이 지역별로 SNS를 통해 상황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전혜원 기자 | woni@sisain.co.kr [396호] 승인 2015.04.20 03:03:56
“잘 먹겠습니다.” 4월9일 오후 12시20분 경남 합천군 가회면 가회초등학교. 전교생이 49명인 이곳의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각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대세’는 계란말이였지만 소시지도 인기였다. 두부 부침과 돼지고기, 나물을 싸온 아이도 있었다. “그거 뭐야? 맛있어?” 아이들은 반찬을 나눠 먹느라 분주했다. 학부모들이 각 학년 교실에 나눠 들어가 지도를 도왔다. 이 학교 3학년, 5학년 딸을 위해 계란말이와 동그랑땡을 준비한 학부모 문혜숙씨(46)는 “애들 먹는 거 보니 좋으면서도 마음이 아파요. 홍준표 지사가 애들 먹는 모습을 좀 봤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한 교사는 “밥 먹는 시간도 교육의 일부다. 아이들이 하루빨리 따뜻하고 편안하게 밥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전날까지도 급식을 먹었다. ‘도시락 급식’은 4월7일 가회초 학부모 총회에서 결정했다. 앞서 4월6일에서 8일까지는 합천군 초계면 초계초등학교에서 도시락 급식을 한 터라, 그 ‘릴레이’를 이어가는 셈이다. 가회초는 주말을 제외하고 4월15일까지 닷새간 도시락 급식을 하기로 했다. 가회중학교 전교생 11명도 참여한다.
4월9일 경남 합천군 가회초등학교의 점심 풍경. 학부모들이 무상급식 중단에 항의해 ‘도시락 급식’을 했다. ⓒ시사IN 신선영
같은 날 11시. 가회초 학부모 10명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돌자 지켜보던 정차석씨(79)가 박수를 쳤다. “없는 것도 있게 만들어야지 있는 걸 없앨 수 있는가.” 구호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조점순씨(79)는 “가회중학교에 손자가 있는데 오늘 도시락을 들고 갔다. 우리 경남이 이래 해서 나라가 부자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급식 지원 중단은) 쓸데없는 짓이다”라고 말했다.
합천군만이 아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급식 지원 중단으로 경남 곳곳이 들썩이고 있다. 진주시 지수읍 지수초등학교 학부모가 선두에 섰다. 운동장에 솥단지를 걸고 4월1일과 2일 이틀 동안 전교생 49명과 지수중학교 학생 26명에게 닭죽과 자장밥을 먹였다. 전날 열린 학부모 자유토론 자리에서 “어떡하지? 우리가 밥 해먹여서 보여줄까”라는 얘기가 나온 게 발단이었다. 이틀간의 퍼포먼스 이후에는 ‘행복급식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운영위원인 지수중학교 3학년 학부모 전영찬씨(47)는 “유상으로 바뀌지만 학부모들이 기금을 마련해 아이들이 똑같이 밥을 먹게 하자는 취지다”라고 말했다.
하동군 쌍계초등학교와 묵계초등학교 학부모들은 등교 거부에 나섰다. 하동군의 경우 홍준표 지사가 무상급식 중단 뜻을 밝힌 직후인 지난해 11월10일 학부모연대를 결성해 목소리를 내왔다. 군 소속 12개 초·중학교가 현재 집중하는 것은 ‘급식비 납입 거부’다. 하동군 악양면 악양초등학교 1학년과 5학년 아들을 둔 이순경씨(38)는 “하동군은 초·중·고교 무상급식을 100% 해왔다. 지금 군수는 도지사 눈치만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급식비 못 내는 아이,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까요”
학교 앞 1인 시위, 도청·시청·군청 앞 집회는 경남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4월8일 오전 8시 창원시 내서읍 상일초등학교 앞. 이 학교 5학년 딸, 3학년 아들을 키우는 이혜정씨(42)는 학부모 교통지도를 나온 김에 손수 만든 피켓을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 무상급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라고 쓰인 문구 옆 수저 그림은 3학년 아들이 오려 붙여줬다. 생전 안 나와보던 아들이 이날은 수줍은 듯 빼꼼 인사하고 가기도 했다. 이씨는 “서울에서도 충암고 교감이 급식비 안 낸 아이에게 호통을 쳐서 문제가 됐던데 우리 학교가 그렇게 안 되리라는 법은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급식비 지원이 인터넷이나 스쿨뱅킹으로 이뤄져 이른바 ‘가난 증명’이나 낙인 효과가 없다는 반론을 소개하자 이씨는 “적어도 그 아이는 알고 있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건너편에서도 학부모 한 명이 피켓을 함께 들었다.
학교에서 차로 3분쯤 떨어진 삼계사거리로 나가자 내서 지역 학부모 20여 명이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아빠들도 적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학부모도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일곱 살, 6개월 된 딸을 키운다는 최영주씨(35)는 “도지사가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는데, 학교에 밥 먹으러 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제 아이도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건희 손자도 밥 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대신 이건희 회장에게 세금을 많이 걷으면 되잖아요”라고 말했다.
최씨는 홍준표 지사가 급식 예산을 연 50만원씩 ‘서민자녀 교육지원’으로 돌리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저도 사실 그거 신청하러 갔었는데 비참하더라고요. 이거 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부업을 할까 싶었어요.” 최씨는 아이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앞에 나서지 않지만 속앓이를 하는 엄마가 적지 않다고도 전했다. “티가 안 난다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요. 온라인으로 한다고 해도 매년 누락이 생길 거예요. 그럼 누구야, 부모님한테 사인 받아와, 할 거예요. 그걸 들고 돌아오는 아이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요? 저도 가난 속에서 살아봐서 (품속 아이를 가리키며) 이 아이들에게는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밥에서만은.”
왜 경남에서만 이러느냐는 목소리도 높았다. 초계초 6학년 아들에게 사흘간 도시락을 싸준 이 아무개씨(43)는 “세금 다 내는데 경남 아이들만 무슨 죄예요. 아이들이 벌써 ‘돈 내고 밥 먹어야 되나?’ 물어봐요. 경남에서 시작한 거니까 우리가 끝내야 한다고 엄마들끼리 얘기해요”라고 말했다.
경남은 넓다. 각 학교 임원들이 움직이지 않을 경우 행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 학부모들이 상황과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공간이 모바일 커뮤니티 네이버 밴드다(24~25쪽 기사 참조). 밴드는 무상급식 중단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화되는 공간이다. 지역마다 수백명이 가입돼 있다. 많은 곳은 1000명을 훌쩍 넘는다. 이곳에서 각 학교 학부모회의 의사 결정이 지역 단위로 모인다. 홍준표 지사, 이성애 도의원의 ‘망언’이 공유된다. 각 도·시·군의원에게 문자 보내기 운동도 한다. SNS에서 나온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목소리가 오프라인 모임으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찰이 안경 벗긴 다음 눈에 캡사이신 문질렀다 - 미디어오늘 (0) | 2015.04.20 |
---|---|
국민 54.4% “불법대선자금 박근혜 대통령도 조사해야” - 민중의소리 (0) | 2015.04.20 |
무상급식에 대처하는 정치인의 자세 - 시사인 (0) | 2015.04.20 |
경남기업, 한복쇼 다음달 ‘채권단 자금지원 결정’ 받아내 - 경향 (0) | 2015.04.20 |
청와대, ‘대통령 하노이 한복쇼’ 랜드마크72로 막판 결정 - 경향 (0) | 201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