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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3>제25대 평원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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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란 매일 매일 변하는 주가와 같다.

엄청나게 변동이 심한데다 자칫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기도 한다.

때로는 그 손해가 전화위복이 되어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도 있지만,

사람이 가진 역량과 능력에 따라 또 달라진다.

 
[二十三年, 春二月晦, 星隕如雨.]

23년(581) 봄 2월 그믐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양성왕 23년 봄 2월의 그믐. 고려의 하늘은 수많은 별들이 하늘 위에 빛의 선을 그리며 비처럼 쏟아졌다.

 


<조선조 초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 고려의 천문도를 모본으로 한 것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제작된 것은 조선조 태조 3년(1395)의 일이다. 서력 668년

고려가 나당연합군의 손에 의해 멸망하고 수도 펴라성이 함락되던 그 날, 성 안에 남아있던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파괴당하고 인멸되어 없어졌는데, 천문관측기록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인들이 하늘을 관측해 돌에 새긴 석각천문도는 패수(대동강)에 빠져버렸는데

어찌어찌해서 그 석각천문도의 탁본이 훗날 왕씨조 고려에 전해졌다.

7백년의 시간을 넘어 고려의 옛 천문도는 조선조에 이르러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으로 묵은때를 벗고 새롭게 이 세상 빛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모두 1467개의 별이 283개의 별자리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조의 천문도지만, 그 관측지점은 평양이었다. 고려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늘을 관찰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백제의 경우 '일관부'라는 천문관측 전담부서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고, 신라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천문박사(사천박사)라는 관직을 두고 하늘을 관측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었던 조선의 서운관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별자리의 위치변동을 감안해

(입춘날의 태양의 위치가 해마다 서쪽으로 50.2도씩 옮겨가는 현상을 반영했다고 밝히고 있다)

원본 석각천문도 탁본에 별자리 위치를 수정해서 표시하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어냈다. 

7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천문관측을 통해 확인된 새로운 사실들이 적지 않았겠지만,

뭔가 특별한 별자리가 더해지지는 않았다고. 그러니까 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400년 전의 옛 고려의 하늘을 담은 고려의 천문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본 키토라 고분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마찬가지로 펴라의 하늘을 관측해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1983년에 일본의 나라현 아스카무라에서 조사된 키토라 고분은 20년째 사람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무덤이 하도 오래되고 낡다 보니, 석곽 안을 정밀촬영기기로 탐색만 하고 있는데,

네 번 정도 안쪽 벽하고 천장을 촬영한 끝에 무덤 안에 사신도와 별자리, 12지신상이 확인되었다.

더욱이 재미있는 점은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다. 흐릿해서 안 보이는 것까지 합쳐서

총 6백 개의 별과 34개의 별자리가 표현된 이 천문도는 놀랍게도 일본열도가 아니라 북위 38~39도 지역,

지금의 평양 지역에서 관측된 하늘을 그린 것이었다. 별자리의 형태나 위치까지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꼭 닮았다.

 

[秋七月, 霜雹殺穀. 冬十月, 民饑, 王巡行撫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은 순행하며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23년(581)

 

천문관측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단순하게 하늘이나 쳐다보고 별자리나 관측하는 한가한 직업이 아니었다.

하늘을 움직이는 별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며,

일정한 궤도를 따라 주기적으로 움직여 그 자리로 돌아온다. '성상(星霜)'이란 단어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가만히 그 자리에 붙박혀 있는 듯 보이는 별도 각자의 궤도를 따라 하늘을 돌아 정해진 시기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또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그렇게

궤도 속에서 하늘을 도는 동안 인간의 땅은 여러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죽는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운행이 모두 별이 하늘의 궤도를 도는 그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다.

 

최초의 달력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하늘을 도는 별들이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가 있으며, 그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별이 원래의 위치로 한 바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1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만들어진 달력에 따라 1년의 계획을 정하고,

그들의 삶에 하나하나 체계를 잡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조직이 이루어지고, 사회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하나의 나라를 이루기까지.(비록 그 당시의 천문관측수준 때문에 여러 차례 개정과 수정을 거쳤지만)

이렇게 본다면 '달력'이 인류의 '문명'을 점지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동양에서 이러한 '달력'을 처음 만든 중국의 은(殷) 왕조는 달력 제정을 천자 고유의 권한으로 못박고,

천자를 섬기는 '제후'들에게는 달력을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고대 세계에서

별을 본다는 것은 곧 하늘을 본다는 것이고, 달력을 만든다는 것은 곧 시간을 안다는 것이며,

시간을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우주의 '정점'에 서있는 자였다. 지금처럼 연말마다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나눠주는 '시시한' 의미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정점에 서있는 자ㅡ천자(天子)만이 달력을 만들고 선포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천자가 아닌 자는 달력을 만들수 없으며, 연말에 천자가 주는 달력만을 받아 써야만 했다.

《논어》에 나오는 매달 초하루의 곡삭(告朔)은, 바로 제후가 천자에게 달력을 달라고 청하는 의식이었다.

 

각설하고, 조선 태조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게 한 이유는 자신이 하늘의 명을 받아 즉위했음을

반대파 고려 유신들에게 '어필'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 오늘의 정설이다. 천하의 정점에 군림한 자로서

천문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곧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걸 대내외에 선포하는 과정에서

고려로부터 이어져온 옛 천문도를 '왕가의 권위'로서 내보인 것이다. 그 왕가의 권위ㅡ

하늘을 대신해서 인간의 땅을 다스리는 자의 의무 비슷한 것이 바로 천재지변 때의 지방 순행이었다.

 

오늘날 사천(쓰촨)이나 뉴올리언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가주석이나 주지사같은 고위 관료들이

피해를 극심하게 입은 지방을 직접 방문해서 현지 주민들의 사정을 위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이 직접 지진이나 가뭄 피해를 입은 곳을 찾아가는 경우는 사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할 수 있다. 

자연재해는 곧 하늘의 징험이니까. 뭔가 하늘에서 분노한 것이 있어 그것이 자연재해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늘이 이 나라에 대해 뭔가 '아니꼬운' 것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비난의 화살은 모두 '하늘의 자손' 국왕에게로 돌아갔다. 부여에서는 곡식이 잘 안 익으면

백성들이 나서서 '왕이 죽어야 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는 《삼국지》의 기록은

이 시대 사람들의 하늘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왕으로서는 골치아프다.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자', '하늘의 자손'이라고 떠벌려놓고,

그걸 또 증명해보이겠답시고 저렇게 천문도까지 만들고 하늘에 제사까지 지내가며 자신의 권위를 높여봤자

지진이나 가뭄, 홍수, 메뚜기 피해, 이른 서리 같은 자연재해까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진짜 신은 아니니까.) 사태가 터지면 왕이 나서서 몸소 해결해 보일 것처럼, 아니 정 안되면

자신이 죽어서라도 책임질 것처럼 백성들 앞에서 자기 입장을 해명해야 된다. 나도 억울하다는 거지.

여지껏 자신은 나라를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도 없이' 밤낮으로 일해(?)왔는데

왜 하늘이 저러는 건지.(백성들에게 '동정표'를 사는 전략은 오늘날 정치인들도 자주 써먹는 상투수단이다.)

그렇게, '신의 재앙'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마음을 왕이 직접 가서 달래주던가,

저런 식으로 적어도 왕의 이름으로 된 사신 한 명 정도는, 피해를 입은 곳에 파견해서 현지 상황을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해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하늘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왕의 입지가 흔들리는 꼴이 된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짓을 하는 통치자를 '폭군'이라고 부른다.

 

[十二月, 遣使入隋朝貢, 高祖授王大將軍遼東郡公.]

12월에 사신을 수(隋)에 보내 조공하니, 고조(高祖)가 왕에게 대장군 요동군공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23년(581)

 

중국의 역사책인 《수서(隋書)》에 보면 양성왕의 사신이 수에 조공한 날은 12월 무인이라고 했다.

이보다 두 달 앞서 10월 을유에 백제왕 창이 문제에게 조공을 바친 것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도 싶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보다도 이 때에 이르러 새로이 떠오른 강자, 수(隋)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야겠다.

그리고 수의 고조 양견. 속칭 수 문제에 대해서도.

 


<수 문제. 진시황제 이후 두 번째 중국 통일왕조가 되었던 수의 건국자이다.>

 

원래 서위(西魏, 535∼556) 12장군의 한 사람이었던 수국공(隨國公) 양충(陽忠)의 아들로서,

북주에서 아버지의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가, 딸이 북주 선제(宣帝)의 비가 되면서

외척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580년 선제의 황자 정제(靜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제의 보정(輔政)으로서 정사를 좌우하다가 이듬해 정제에게 양위받는 형식으로,

북조 최후의 왕조였던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를 세워 황제가 된다.

 

[二十四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冬十一月, 遣使入隋朝貢.]

24년(582) 봄 정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二月, 下令減不急之事, 發使郡邑勸農桑. 夏四月, 遣使入隋朝貢. 冬, 遣使入隋朝貢.]

25년(583) 봄 정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명령을 내려 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게 하고, 사신을 군(郡) · 읍(邑)으로 보내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정월 신미와 11월 경오, 양성왕 24년에 고려에서 보낸 사신은 수의 조정에서 백제의 사신과도 마주쳤다.

양성왕 25년에는 봄 정월 계해와 4월 신미, 그리고 겨울에 사신을 보냈다고 《삼국사》에 실려있지만

《수서》에서는 고려가 겨울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 없고 정월 계해와 4월 신미, 그리고 5월 갑진일에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고 적고 있다. 어느 한쪽은 틀렸을 것이다.

고려는 예전 남북조의 국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수와 진에 번갈아 사신을 보내는 등, 양다리 외교를 계속해서 펼쳐나갔다.

수(隋)가 일어났기는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신흥국에 불과했고, 남조에서는 여전히 진(陳)이 버티고 있었기에.

두 나라가 서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 그 사이에서 외교관계만 잘 조율하면 고려가 침공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궁금한 것은 《삼국사》평원왕본기 26년조 기사에서, 

 

[二十六年, 春, 遣使入隋朝貢. 夏四月, 隋文帝宴我使者於大興殿.]

26년(584) 봄에 사신을 수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수의 문제가 대흥전(大興殿)에서 우리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고 한 기록 말인데, 양성왕 26년은 수 문제 개황 4년이고 간지로는 태세 갑진(584).

《수서》문제 개황 4년 4월조에는 "정미에 대흥전에서 돌궐과 고려, 토욕혼의 사자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丁未,宴突厥ㆍ高麗ㆍ吐谷渾使者, 於大興殿.]"고 적혀있긴 한데 고려가 정월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에서 '봄'이라고 한 것은 음력 정월부터 3월까지의 시간을 가리키지만,

그 사이에 수에 사신을 보낸 것은 엉뚱하게도 고려가 아닌 말갈이었다. 같은 해 2월조에

"정미에 말갈이 방물을 바쳤다[丁未,靺鞨貢方物]"고 적고 있는 것.

 

수는 고려에게 꽤나 우호적이었다.

적어도 진(陳)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건국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그 무렵만 해도 그러했다.

남쪽의 진뿐만이 아니라, 수의 북방에는 돌궐이라는 강한 적이 또 하나 있었다.

신흥국인 수로서는 아무래도 적을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급선무. 문제는 그런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고려에서 온 사신을 장안 대흥성(大興城)의 대흥전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열어줄 정도로 대접도 극진했고,

고려 역시 남쪽의 신라, 백제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경을 맞댄 수와의 우호를 잃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是歲, 蘇我馬子宿禰請其佛像二軀, 乃遣鞍部村主司馬達等, 池邊直氷田, 使於四方, 訪覓修行者, 於是, 唯於播磨國得僧還俗者. 名高麗惠便. 大臣乃以爲師. 令度司馬達等女嶋, 曰善信尼<年十一歲.> 又度善信尼弟子二人. 其一漢人夜菩之女豐女, 名曰禪藏尼, 其二錦織壼之女石女, 名曰惠善尼<壼, 此云都苻.>馬子獨依佛法, 崇敬三尼. 乃以三尼付氷田直與達等令供衣食. 經營佛殿於宅東方, 安置彌勒石像, 屈請三尼大會設齋. 此時達等得佛舍利於齋食上, 卽以舍利, 獻於馬子宿禰. 馬子宿禰試以舍利置鐵質中, 振鐵鎚打. 其質與鎚悉被摧壤, 而舍利不可摧毁. 又投舍利於水, 舍利隨心所願浮沈於水. 由是馬子宿禰, 池邊氷田, 司馬達等, 深信佛法修行不懈. 馬子宿禰亦於石川宅脩治佛殿. 佛法之初自而作.]

이 해(585)에 소아마자숙녜(蘇我馬子宿禰, 소가노 우마코노 스쿠네)는 그 불상 두 구를 얻어 안부촌주(鞍部村主구라후촌주) 사마달등(司馬達等시바노 다츠토)과 지변직(池邊直이케베노 아타이) 영전(氷田히다)를 사방으로 보내어 수행자를 찾았으나, 번마국(播磨國하리마노쿠니)에 환속한 승려가 있을 뿐이었다. 이름은 고려의 혜편(惠便)이라 하였다. 대신은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 사마달등(시바노 다츠토)의 딸 도(嶋사마)를 출가시켰다. 선신니(善信尼센신노아마)라 한다.<나이는 11세였다.> 또한 선신니(센신노아마)의 제자로 두 사람을 출가시켰다. 첫째는 한인(漢人) 야보(夜菩)의 딸 풍녀(豊女토요메)로 이름을 선장니(善藏尼센죠노아마)라 하고, 둘째는 금직호(錦織壺)의 딸 이시메(石女이시메)로 이름을 혜선니(惠善尼에젠노아마)라 하였다.<壺, 이를 쓰후(都符)라 한다.> 마자(우마코)는 홀로 불법에 귀의하여 세 여승을 존경하였다. 세 여승을 영전직(氷田直히다노 아타이)과 달등(다츠토)에게 부탁하여 옷과 음식을 공급하게 하였다. 불전을 자택 동쪽에 지어 미륵의 석상을 안치하고, 세 사람의 여승을 초청하여 대법회[齋]를 열었다. 이때 달등(다츠토)는 바리때에서 불사리를 얻어 마자숙녜(馬子宿禰우마코노 스쿠네)에게 헌상하였다. 마자숙녜(우마코노 스쿠네)는 시험삼아 사리를 철상에 놓고 쇠망치로 강타하였다. 그 상과 망치가 모두 부서졌으나 사리는 깨지지 않았다. 또 사리를 물에 던져 넣었다. 사리는 마음대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였다. 이에 의하여 마자숙녜(우마코노 스쿠네)ㆍ지변영전(이케베노 히다)ㆍ사마달등(시바노 다츠토)는 불법을 깊이 믿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마코노 스쿠네는 또한 석천(石川, 이시카와)의 댁에 불전을 지었다. 불법은 여기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0, 민달기(敏達紀, 비다쓰키) 13년(585)

 

《일본서기》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왜국이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한반도 국가의 영향이었다.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가 세 여승을 출가시키고 큰 절을 짓게 된 것도

백제의 녹심신(鹿深臣)과 좌백련(佐伯連, 사에키노 무라치)이 가져온 

두 개의 불상(미륵상 포함)에서 연유한 것이다. 절을 짓고 승려를 뽑아야겠는데,

그러다가 번마국(하리마노쿠니), 지금의 일본 효고현 남서부에서 혜편이라는

고려의 환속승을 만나 그를 모셔다 세 명의 여승을 가르치게 했고,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모셔다 백제에서 가져온 미륵불과 함께 법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세 여승은 몰랐겠지만, 그들은 불교의 일본 도래 이후 최초로 출가한 일본인이었고,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의 집에서 열린 법회는 일본 최초의 법회였으며

그 속에 고려인과 백제인이 모두 섞여 있었던 셈.

 

하지만 이듬해(586년) 난데없는 역병이 왜국을 강타했고,

물부(物部모노노베)나 중신(中臣나카토미) 일족을 위시한 배불파들은 앞다투어

"소아(소가) 일족이 불교를 신봉한 탓에 국신이 노했다"고 왜왕에게 아뢰어

결국 일본 최초의 절은 불타고 백제에서 가져온 불상은 강물에 던져졌다.

여승들은 강제로 환속당하고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왜왕이 갑자기 두창(천연두)에 걸리면서

또다시 온 나라 안에 두창 환자들이 들끓기 시작하고,

이번에는 또 불상을 함부로 다뤄서 그렇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마자(우마코) 혼자서만 불교를 섬긴다는 조건하에 세 여승을 풀어주고

마자(우마코)는 다시 절을 지어 공양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물론 왜왕 민달(비다쓰)는 그 해에 죽고 말았지만, 어찌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병이라는 것이 꼭 귀신이나 종교에 연루되어 생기는 것은 아닐진대,

당시 사람들은 그걸 몰랐다니.

 

[二十七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27년(585) 겨울 12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평원왕

  

양성왕 27년 즉 수 문제 개황(開皇) 5년, 간지로 태세 을사(585)에 진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4월 임인일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는 기록을 《수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에 먼저 사신을 보낸 다음에 진에 사신을 보낸 것인데 수가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진이 망한 것은 아니니까,

소위 말하는 양다리 외교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28년(586)에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평원왕

 

사람들은 고려의 수도 평양에 평양성만 있고 장안성이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삼국사》에서는 평양성과 장안성을 구분해서 서술했지만, 정작 두 성의 가깝고 먼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다른지 같은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애매모호한 기록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원래 수도가

지금의 섬서성 서안(수당 시대에 장안이라 불리던 그곳)에 있지 않았나 하고 주장하는

소위 대륙사관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평양이 장수왕의 평양이자 양원왕의 평양,

양성왕의 장안임에는 틀림이 없다.

 

[唐書云『平壤城亦謂長安.』而古記云『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遠近, 則不可知矣. 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당서》에서는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하였다.』

고 하였으나, 《고기(古記)》에서는

『평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

고 하였으니, 두 성의 다르고 같음과 멀고 가까움을 알 수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 있다가, 점점 동쪽으로 옮겨 패수의 곁으로 온 것이다.

《삼국사》 권제37, 지리지6, 고구려

 

평양 장안성 천도는 장수왕이 처음 평양에 정도한지 156년만의 일인데,

고려인들은 이 장안성으로 옮겨가 83년을 보낸 뒤에야 그 수명을 모두 다했다.

(부식이 영감은 《고기》가 참 친절하다고 말했었다. 나도 동의한다*^^*)

 

장안성을 쌓은 것은 양원왕 때의 일인데, 정작 옮기기는 그 아들인 양성왕 때에 가서야 벌어진 일.

아마 이 장안성이라는 성으로 옮기기 전에, 양성왕은 이미 이 성을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통해 수리해놨을 것이다.

평양성에서 발견된 여섯 개의 축성구역 표시석, 이른바 '평양성석편'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평양성석편은 모두 여섯 개인데, 1석, 3석, 6석은 옮겨 적은 기록만 전해지고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1석과 3석의 '기축'에 대해서 '기유'를 잘못 적은 것이라 보기도 한다.)



 

[己丑年五月廿八日, 始役西向十一里, 小兄相夫若牟利造作.]

기축년(추정 569년, 양성왕 11년) 5월 28일에 처음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서쪽을 향해 11리 구간(외성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3,850m 정도 되는 곳, 즉 지금 석두산성이 있는 보통강 기슭까지)은 소형(小兄) 상부(相夫) 약모리(若牟利)가 쌓는다.

『평양성석각제1석』

 

장안성은 처음 쌓을 때부터 철저하게 구역이 구획되고, 질서정연한 도시계획까지 갖추었다.

장안성은 외성-중성-내성-북성의 네 구역으로 구분되었는데, 대부분의 백성이 살던 곳이 바로 외성이다.

조선조 《동국지리지》의 저자 한백겸은 이 평양을 직접 답사하고 평양 외성의 구획도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면 평양의 수도는 반듯반듯한 도시계획으로 구획된 도시,

지금의 도시와 비추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백겸이 그린 평양 외성 구획도.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되어 있다.>

 

한백겸은 평양 외성의 질서정연한 구획에 대해서 옛날 기자가 조선에 와서 행했다는 정전제의 흔적이라 했지만,

정약용은 당의 장수 이적이 고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에 두었던 둔전(屯田)이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이러한 도시 구획은 고려 때에 와서야 갖추어진 것으로 기자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오늘의 정론이다.

외성 구획에서 제일 작은 칸이 3천평, 큰 도로는 15m, 작은 도로는 4.3m.

반듯하게 뻗은 길 모서리마다 표석을 세워 길 모퉁이를 표시했는데,

지금도 평양에 그때 표석 가운데 몇 개가 남아있다. 

 

<평양성석각제2석, 평양 외성(外城) 오탄(烏灘) 출토>

 

[己酉年三月廿一日, 自此下向東十二里, 物苟小兄俳湏百頭作節矣]

기유년(589년, 평원왕 31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12리 구간(4.2km, 발견지점에서 동쪽으로 4,2km되는 곳은 내성의 동남쪽 지점)은 물구(物苟) 소형(小兄) 배회백두(俳湏百頭)가 맡는다.

『평양성석각제2석』


평양 내성은 주로 왕궁이 위치했던 곳이라 한다.

내성 동문으로 세워진 것이 지금 남아있는 대동문이다.

지금의 대동문은 원래 위치에서 몇 미터 쯤 뒤로 옮겼는데,

옮기기 전에는 대동문을 바로 나서면 그 앞으로 쫙, 나루터가 펼쳐져 있어서

대동강을 따라 나룻배 타고 대동문 앞에 내려서 평양으로 들어갔다고.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조선조에는 평양의 여덟 가지 볼거리 가운데 성문에서 손님 전송하는 모습을 꼭 들곤 했었다.

 

[己丑年三月廿一日, 自此下向▨下二里, 內中百頭上位使尒丈作節矣]

기축년(추정 569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쪽으로 내려가면서 2리는 내부(內部) 백두(百頭) 상위사(上位使) 이장(尒丈)이 맡아서 공사한다.

『평양성석각제3석』




<평양성석각제4석. 평양성 내성이 있는 경제리(鏡齊里)에서 발견되었는데,
 

도로를 놓으려고 강을 따라 이어진 내성 동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卩小兄文達, 節自此西北行涉之.]

병술년(566년으로 내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연대. 평원왕 8년) 12월에 한성(漢城) 하후부(下後部)의 소형(小兄) 문달(文達)이 여기서부터 서북 방향을 맡는다.

『평양성석각제4석』

 


<평양성석각제5석, 평양시 중구역 남문동 평양 내성 출토>

 

[卦婁盖切小兄加群, 自此東廻上, ▨里四尺治.]

괘루개절(卦婁盖切) 소형(小兄) 가군(加群)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위쪽으로 ▨리 4자를 쌓는다.

『평양성석각제5석』

 

이런 성돌들이 전부 여섯 개가 각 구역마다 놓여서 각기 관할구역을 할당하는 표시로 쓰였다. 

 

[本城四十二年畢役]

본성은 42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평양성석각제6석』

 

평양 장안성 완공. 박수. 짝짝짝.

 

[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城内唯積倉儲器,備寇賊. 至日,方入固守。王別為宅於其側,不常居之]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또는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동서 6리는 隨山屈曲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성 안에는 식량창고와 무기만 두고 적이 쳐들어올 때를 방비한다. 그 날에는 方入固守한다. 왕은 따로 그 옆에 집을 지어 사는데 항상 사는 것은 아니다.

 

《북사》에 나오는 고려 평양성의 모습이다.

 

[其外復有國内城及漢城,亦別都也. 其國中呼為三京.]

그 밖에 다시 국내성과 한성에다 또 별도(別都)를 두었다. 그 나라에서는 이것을 삼경(三京)이라 한다.

 

이밖에 옛 수도인 국내성과 새로 설치된 한성에도 별도(別都)를 두어 소위 '삼경체계'를 구축한다.

이 삼경제는 훗날 고려에도 이어져 수도 중경(개경) 이외에 서경(평양)과 동경(경주),

나중에는 동경을 빼고 남경(서울)을 집어넣어서 완연한 '삼경'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는데,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와 비교해봐도 이 '삼경'제도는 중국이 아니라 고려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고려만의 행정제도이다. 당에서는 삼경이 아니라 창안(長安)과 뤄양(洛陽)에 '양경'을 두었고,

신라에서도 수도 서라벌에 필적할만한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5소경(小京)'을 두었을 뿐.

하다못해 고려의 계승국이라 자처하던 발해에서도 수도 상경을 중심으로 '5경'을 두었으니

행정제도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발해보다 오히려 고려가 옛 고려의 그것을 더 잘 계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발해에서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한성이라는 것은 남펴라성일텐데, 보통 황해도 신원이나 재령 쪽에 이 남펴라성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성부 즉 지금의 서울이 남펴라성이라고 해서 더 내려갔다.

아마 장수왕이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켰을 때에 여기에다 잠시 남펴라성을 둔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백제의 공격과 신라의 진출을 받아서 다시 남펴라성을 원래의 재령 장수산성으로 옮겨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 '한성'이란 곧 고려의 남방기지이면서 남부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비록 천도했지만 국내성 역시 '구도(舊都)'로서 고려의 옛 도읍이라는

이름값을 갖고 있는, 빼놓을 수 없는 요충지였다. 나아가 평양천도와 함께 남쪽으로 치우친

수도의 불완전한 지리적 결함을 국내성이 보충해줄 것이었다.

 

器     저울대와 추와 저울머리.

疎        저울대는 부소(扶疎)

  저울추는 오덕지(五德地),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

國     일흔 나라의 조공을 받고

神        덕에 의지하여 신이 보우하리라.

  머리와 꼬리가 반듯해야

     나라가 흥하고 태평이 보장되리니.

     만약 세 유지(諭地)를 폐한다면

衰傾     왕업이 쇠할 날이 있으리라.

 

《고려사》김위제전에 보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조선 이래의 비기인

《신지비사(神志秘詞)》의 내용을 끌어다 숙종에게 남경천도를 진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고려 이전부터 있었던 비서임에는 확실한데 지금은 전해지지를 않는다.

조선 세조와 성종이 전국에 '비서 수거령'을 내릴 때에도 이 《신지비사》가 포함되었고

그 거둬들여진 책들은 일단 왕궁에 소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왕궁이 불타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했다ㅡ는 것이 단재 선생의 주장이시다.

 

세 개의 수도는 저울대와 저울추, 저울머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단재 선생께서 백아강이란 지금의 평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었고,

부소란 아마 '부소압'이라는 명칭의 약자로 지금의 개성을 가리키는 것인듯 하다.

(개성의 고려 때 이름이 '부소압'이었음)

'오덕지'라는 지명은 잘은 모르겠고 내 추측이지마는 18세기 해동지도에서

국내성을 오국성(五國城)이라고 표시한 것도 보이고 고려라는 나라가 '5부'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감안할 때에 오덕지란 즉 오국성 국내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나는 《신지비사》의 지명이 어디를 가리키느냐가 아니라 그 각각의 지명이 가진

상징성을 가리켜서 매겼으면 한다. 그것은 삼경을 '저울'에 빗대어 말한 것에 기인한다.

 

고려가 정한 국내성과 펴라성 그리고 한성,

후대 고려의 개경과 서경 그리고 동경(또는 남경).

이들 세 도시는 시대와 국내사정을 초월해 각각 공통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옛 도읍지'와 '지금의 도읍지', 그리고 '새로운 도읍지(만큼이나 중요한 후보지)'라는 것.

서로 대치시켜보면 국내성과 서경이 '옛 도읍지'에 비견될 것이며

이것은 지금에는 실세를 잃었지만 무시될 수 없는 고래로부터의 '권위'를 가리킨다고 본다.

펴라성과 한성은 '지금의 도읍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실세를 말한 것일게다.

즉 예전의 것을 대신해 지금 현실적으로 이 세계에 군림하고 있는 실세 말이다.

그리고 한성, 동경과 남경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도읍지 후보'는

언젠가는 지금의 실세가 될 '새로운 힘'이면서 고래로부터의 '권위'와 함께

'실세'를 견제하면서, 지금의 '실세'가 고여있는 물이 되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새로운 원동력을 제공할 공급탱크다. 그것을 저울의 구조에 비교한다면 곧,

국내성이라는 '저울머리'에 올려진 물건의 무게를 한성이라는 '저울추'를 가지고 재는 것이다.

저울머리와 저울추 사이에 균형이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저울대' 즉 펴라성이

'중도'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한쪽이 저울대의 중심에 가깝거나 멀다면

저울의 균형은 깨지고 우리는 물건의 무게를 제대로 달지 못하게 된다.

 

신진세력의 입장에서는 저울머리에 올려지는 모든 물건, 쌀 한 줌이나 쇠고기 한 조각도

지금의 도량형인 '저울추'에 따라 무게가 매겨지듯 고래로부터의 훌륭한 제도는

지금의 사람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의 '실세', 저울추가 되어줄 '조정자'들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것이 곧 고래의 삼경제의 원리이며,

'치우치지 않는 마음' 즉 '충(忠)'의 사상인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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