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4>제25대 평원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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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3>제25대 평원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6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4>제25대 평원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63
<평양 장안성 전도. 지금의 평양 시가지는 이때의 장안성을 토대로 구획되어 천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 장안성은 원래는 백제의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성이지만,
본격적으로 수도성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양성왕 때 수의 위협이 점차 가중되면서부터였다.
남조의 진과 북쪽의 돌궐이 정리되고 나면 저들은 분명, 동방을 넘볼 것이고,
그 첫번째 타깃은 삼국 중에서 가장 근접한 고려가 될 것이다.
혹시라도 저들과 치르게 될 수차례 전쟁을 감당하자면 평지성이 몇 개가 있어도 모자라겠지.
(그렇게 되면 그 부서진 것을 다시 짓느라 또 국력이 허비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궁궐을 방어용 성안에 들여놔버리는,
선대에 비하면 조금더 강력한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성이 함락되면 그걸로 왕궁도 끝장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양성왕이 우려했을 그 '설마'는, 곧 사실이 되었다.
양성왕 31년 태세 기유(589), 진이 망한 것이다.
麗宇芳林對高閣 화려한 집, 향기로운 숲은 높은 누각 마주하고
新粧艶質本傾城 새로 단장한 아름다운 몸매는 성(城)마저 기울일 지경일세.
映戶凝嬌乍不進 창에 비치는 애교 넘치는 그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出○含態送相迎 휘장을 나서면 교태 머금고 서로 웃어 맞이하네.
妖姬瞼似花含露 요염한 여인의 볼은 이슬을 머금은 꽃 같고
玉樹流光照後庭 아름다운 나무에 흐르는 달빛이 뒤뜰을 비추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진의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가 지었다고 전하는 노래다.
중천왕 때의 관나부인만큼이나 머리가 긴, 길이가 7자나 되는(관나부인보다는 두 자가 짧구나)
장여화라는 소녀를 귀비로 삼아 총애하면서, 항상 무릎에 앉힌채 대신들을 맞이할 정도로 방탕했던 그가,
후궁들을 불러모아 임춘각이니 결기각이니 망선각이니 하는 으리으리한 전각을 지어놓고,
날마다 잔치하고 술 마시면서, 어린 궁녀 1천 명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단다.
우리 나라에서 이 노래 부른 왕은 아마 고려 충혜왕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이 노래를 북전(北殿)이라 불렀다. 조선조 세종조에 이르러 음탕한 노래라 해서 폐지되었다가,
성종 때 성현이 왕명으로 《악학궤범》 지으면서 조선 창업을 송축한 가사로 개작해서 다시 불렀고,
향악공(鄕樂工)을 뽑을 때 시험곡으로 쓰기도 했다던가.
아무튼 이런 노래나 부르면서 질펀하게 놀았으니 나라 망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지.
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가 주색과 유흥에 빠져 있던 것을 빌미로,
수의 고조 문제는 진숙보의 20가지 죄목을 열거하면서 50만 대군을 일으켜 진을 토벌했고,
진숙보는 수의 군대에 생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남조 최후의 왕조 진은 그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여담인데 이 자가 체포될 때, 수 문제의 황자로서 수의 군대를 이끌던 양광(楊廣, 수 양제煬帝)이
진의 수도 건강(지금의 남경)을 함락시키고 진숙보를 잡으라 했더니, 병사들이 궁중의 우물 속에서 잡아오더란다.
궁궐을 막 뒤지다가 우물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가봤는데,
진숙보가 거기에 숨어있는 것이 보여서 밧줄을 당겼더니 뜻밖에도 너무나 무겁더라고,
알고 보니 우물 속에 숨는 그 와중에서도, 우물 속에서 장귀비와 공숙빈 두 후궁을 끼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진은 망하고, 수는 마침내 진(秦) 이후 두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통일 왕조가 된다.
남조를 멸한 수는 다시 북쪽으로 눈을 돌려, 북쪽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돌궐을 수차 정벌하고,
또다시 이간책을 써서 동서로 분열시켜 다투게 하고서, 드디어 동방을 노리게 된 것이다.
중국사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이러한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가 고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평원왕 자신이 더 잘 알았을 터.
옛날 고조선이 통일제국 한(漢)과 대치할 때와 똑같은 상황이 아닌가.
원래 저 짱깨들이 서로 잘 싸우다 보니 자주 갈라져서 그렇지,
일단 합쳐졌다 하면 암만 우리라고 해도 상대하는데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다.
쪽수로 밀어붙여버릴 테니까.(고조선도 그랬지)
지금이야 무기가 워낙 발달해서 쪽수가 많고 적고는 중요한게 아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상대편 쪽수가 얼마나 되느냐가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던 때였으니.
양성왕의 두려움은 다음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三十二年, 王聞陳亡大懼, 治兵積○, 爲拒守之策. 隋高祖賜王璽書, 責以『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彼之一方, 雖地狹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洒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 王謂. 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32년(590)에 왕은 진(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쌓아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수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내려
『번국(藩國)이라고 칭하면서도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구나.』
라고 책망하며 또 말하기를,
『그곳의 한 방면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내게 되면 그대로 비워둘 수 없다. 결국 다시 관리를 뽑아 그곳에 가서 안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닦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어진 신하가 되는 것이니, 어찌 수고롭게 따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은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한들 장강(長江)만 하겠는가? 고려 인구가 많다한들 진(陳)만 하겠는가? 짐이 만약 왕을 포용하고 기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이전 잘못만 따지려고 했으면 장군 한 사람 시켜 명하면 될 일,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은근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려고 할 뿐이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평원왕
이 국서의 내용을, 《수서》 고려열전에서 전문을 가져다가 말하자면 이러하다.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우리 나라는 공인의 수가 적지 않으니 그대가 꼭 필요하다면 반드시 내게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지,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화를 가지고 소인을 꾀어다 사사로이 쇠뇌 장인[弩手]을 하국(고려)으로 숨게 하니, 병기를 수리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까닭에 바깥으로 소문날까봐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려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빈 객관에 앉혀놓고 엄히 방비하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했으니,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자 관리를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수 문제의 말대로라면 이 국서가 작성되기 전,
고려에서는 수에 늘상 조공만 보낸 것이 아니라, 수의 쇠뇌 기술자를 몰래 돈을 주고 빼와서
쇠뇌 제작 기술을 익혔고(일종의 산업스파이짓),
그걸 항의하려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고려로 온 수의 사신을 펴라의 객관에다 가둬놓고,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했으며, 수시로 기병을 보내 수의 변방을 쳤다는 것이다.
짐은 모든 생명을 적자처럼 대하여, 왕에게 전택을 주고 관작을 내려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였음이 멀고 가까운 곳에 분명히 드러났다. 왕이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해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면서 사신을 몰래 보내 관찰하니, '순수히 신하로서의 뜻'이란 게 이런 것이냐? 이는 다 짐의 가르침이 밝지 못해서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 번은 용서한다.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쳐서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르지 말라. 그러면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인즉 이는 실로 짐의 본뜻이니라. 번국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모든 천하는 짐의 신하이니, 지금 왕을 내쫓고 나면 그 땅을 버려둘 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마음을 씻고 바꾸어 법을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인데,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는 어짐과 믿음을 우선으로 여겨서 선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에는 반드시 벌을 주었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왕이 죄가 없는데 짐이 갑자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왕이 마음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말만 잘 들으면 내쫓지는 않겠다고.....?) 맨날 느끼는 것이지만 얘네들은 너무 거만하다.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하였다. 짐이 앞에서는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위로해줬더니, 10년 만에 저들은 장강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면서 짐의 말을 따르지 않아,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요수가 넓다 한들 장강만 할 것이며, 고려에 사람이 많다 해도 진에 비하겠는가? 짐이 백성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꾸짖자면 장군 한 사람만 시키면 될 것인데 뭐하러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데,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한마디로 이거다.
너희가 아무리 그렇게 용을 써봤자 우리한테는 안되니까 그냥 까불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
이거 뭐 미친 놈들 아닌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王得書惶恐, 將奉表陳謝而未果. 王在位三十二年, 冬十月, 薨. 號曰平原王.<是開皇十年. 隋書及通鑑書 『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誤也>]
왕은 조서를 받아 보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재위 32년 겨울 10월에 죽었다. 왕호를 평원왕이라고 하였다.<이 때가 개황(開皇) 10년(590)이다. 《수서(隋書)》와 《통감》에는 『고조가 개황 17년(597)에 조서를 내렸다.』했으나 잘못이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32년(590)
부식이 이 빌어먹을 영감태기를 당장에라도 때려죽였으면!
기록을 베껴적을 것이 따로 있지, 아무리 기록이 없다고 해도 중국 기록을 가져다 쓰면서
그래 그걸 있는 그대로 베껴쓰면, 우리보고 평생 저것들 눈치나 보고 굽실대면서 살란 말야 뭐야?
아무튼간에, 그런 식으로 고려는 새로운 적과 맞닥뜨려야 했다.
비대한 통일왕조 수(隋) 앞에서.
그런데 평원왕이 마침 이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고, 수와 일전을 겨루는 그 대업은,
그의 뒤를 이은 태자 원, 고려 제26대 영양왕에게 맡겨지게 된다.
(《삼국사》 본기에 재위 32년에 죽었다고 한 것과는 달리,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재위 31년에 죽었다고 해서 1년 차이가 있다)
그리고,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한 그 해에, 온달은 죽었다.
[及嬰陽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고려인들의 영토관념에 대한 것인데,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 잡문을 쓰려고 이것저것 찾다보니까
고려인들은 대체로 한수 이북까지는 모두 고려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장수왕이 백제의 근개루왕을 죽이고 한성을 함락시켰던 역사는
고려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통쾌한 역사로 남게 되었고,
그때 장수왕이 넓힌 영토를 고려의 최대 판도이자 고려가 차지한 땅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충주 계립령의 하늘재. 온달이 되찾아 오겠다며 나섰던 계립령이 이곳이다.>
여기 《삼국사》 온달열전의 기록만 보더라도 온달은 영양왕에게 '우리 한북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북이라면 한수의 북쪽, 지금의 한강 북쪽의 모든 땅을 가리키는 말일터.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고려인들은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고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인의 영토 관념은 훗날 왕건의 후고려에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남방영토는 지금의 한강을 경계로 그 이북을 모두 차지한다는 관념이,
《고려사》 지리지에 표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楊廣道, 本高句麗百濟之地.<漢江以北高句麗, 以南百濟.>]
양광도는 원래 고구려와 백제의 땅이다.<한강 이북은 고구려, 이남은 백제다.>
《고려사》 권제56, 지10, 지리지1, 양광도
성종조에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에도,
고려 조정에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이 대두되었을 때에(미친 놈들!)
서희가 반대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서경 이북을 떼어주게 되면,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 옛 땅[三角山以北亦高句麗舊地]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해도 다 내주시렵니까?"
삼각산ㅡ지금의 서울 북한산 이북도 서희는 고려의 옛 땅이라고 말했다.
온달이 전사하고도 5백년이 지난 뒤에까지, 이곳의 고려인들에게는
한강이 곧 고려의 최남단 국경선이고 그러한 인식이 고려에서부터 변함없이 유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475년부터 비롯된 영토관념이었다.
[臨行誓曰 “鷄立峴 · 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踣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고, 나아가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쓰러져 죽었다. 장사지내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니,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옛날 신라가 훔쳐간 땅을 되찾아오겠다고 말하고서 전쟁터로 나가더니....
전쟁터에 나가기에 앞서 그는 말했다. 만일 그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예전에 김득구 선수가 미국으로 떠날 때 관 가지고 가면서, '이기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던가.
그리고 온달과 김득구 선수는 결국 같은 운명을 맞고 말았다.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한 것이 원한이 되었을까? 그 자리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관을
공주가 와서 어루만지면서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움직여서 돌아갈 수 있었다고.
그의 죽음 앞에서는 숙연함까지 느껴진다. 누가 온달의 최후를 듣고 그를 바보라고 하겠는가?
왕에게까지 알려졌던 바보를 이렇듯 위대한 용장으로 만든 것이 모두 공주의 힘이었으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리라.
그가 싸우다 죽었다는 아단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지금도 충청북도 단양에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이라 불리는 성이 있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온달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 기록속에 나오는 그 아단성이며,
그가 죽었다는 비보를 받고 달려온 공주가 움직이지 않는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권유했던,
온달 장군이 공주와의 이별과 함께 이승에서의 인연을 끝마친 장소.
이제 사람은 가고 성벽은 남았다.
그러나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천년 전의 그 이야기만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성터와 함께 남았다.
이 무상한 세월, 제자리를 지켜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그나마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언제 죽어도 행복했을까. 그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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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북한에서는 지금 동명왕릉 근교에 있는 진파리 4호 고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무덤 안에는 역시 아름다운 벽화들이 많이 그려져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 벽에다 현무를 그리지 않고 용을 그려넣었다.
벽화에 나오는 신선들은 대부분 머리를 틀어올린 여성들이다.
이것은 북한에서 이 무덤을 고려의 왕녀, 그 중에서도 평강공주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진파리 4호분에 그려진 그림들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탈색만 되지 않았더라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예술 걸작이 되었을텐데.
나아가 나같은 정신나간 사람에게 미술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어줄 아이디어 뱅크가 되어주었을 것 아닌가.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4>제25대 평원왕(5)|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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