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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 (阿莘王, ?~405) 


백제의 역대국왕
16대 진사왕 부여휘 17대 아신왕 부여방 18대 전지왕 부여영



(폐하, 망했어요... 망했어요...ㅠ.ㅠ)
이 스샷은 1993년 10월 22일부터 1994년 10월 21일까지 KBS 2TV에서 방영한 <만화 인물한국사: 초롱이의 옛날여행>[1] 애니매이션 중 광개토대왕 편의 한 장면이다.


1. 업적

백제 역사상 의자왕과 함께 최고의 안습 왕 투톱

백제의 제17대 왕(재위 392~405). 이름은 방芳. 아신왕은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華王)의 오기라는 설도 있다.

백제 최고의 근성가이. 또는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 광개토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백제를 멸망직전까지 몰고가며 국력을 고갈시켰지만 실행한 작전 전부 실패하고 끝내 정쟁에 휘말려 사망했다. 결론은 밑 빠진 독 물붓기.

그 끈질긴 노력은 광개토대왕보다 이사람에게 동정관심을 가게할 정도로 대단하나 냉정하게 보면 그저 백제 막장화의 장본인.

아신왕의 치세에는 전쟁과 외침, 군사력 고갈, 사보타지, 대규모 유민 발생, 외교적 고립, 지도층 분열 등 한 나라가 망하려면 발생하는 국가 막장 테크가 한꺼번에 발생했는데 신기하게도 망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대적인 민란이나 수뇌부의 부패는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집안 단속은 잘 했는지도?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설화가 전한다. 총기가 있었고, 매사냥과 말타는 것을 좋아했다.아들[2]로는 제18대 전지왕과 훈해(訓解)·설례(碟禮)가 있다. 침류왕의 아들로, 숙부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겨 즉위하지 못했다. 391년 진사왕이 광개토왕의 공격을 막아낼 군세를 다듬기 위해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 행사를 벌이는 틈을 노려 왜에서 돌아와[3] 왕위를 찬탈한듯 하다. 이후 왕위찬탈을 위해 백제로 오는 과정에서 신라 정부까지 제압[4]하는 화려한 활약을 보면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하나, 라이벌이 너무 먼치킨이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같은 해에 즉위했다.[5] 즉위하자마자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394년에는 수곡성으로 처들어갔다가 발리고 395년에는 외척 진무에게 고구려를 치게하나 광개토왕이 직접 기병7천을 이끌고와 백제군 8천명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왕이 직접 처들어가려 했으나 추위로 인해 되돌아왔다.

아신왕의 포기할 줄 모르는 공격에 분노한 광개토왕은 396년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켜버린 뒤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 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면,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6] 라고 외쳤으며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덤으로 58성 1400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이때 빼앗긴 땅은 이로부터 약 80여년 뒤에 장수왕이 한성으로 밀고 내려올때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수복하지 못했던듯하다. 아니, 영원히 수복하지 못한다.

398년에는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곧 중지하였다. 하도 발리니까 이젠 하늘에서도 그만 좀 하라고 경고를 줬던 모양(...). 하지만 우리의 아신왕께서는 비범하게도 불쌍하게도 어리석게도 하늘의 경고도 무시하시고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쪽 돈대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긴장국면을 유지하셨다.

399년 고구려로 처들어갈 군사를 모으기 위해 망국적인 징집을 단행하다 결국 백성들이 사보타지를 일으켜 북벌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기록에는 징집 대상 백성들이 도망가서 군대 모으기가 어려웠단 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징집을 피해 대규모로 신라, 야마토등으로 망명했다. 이때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궁월군이 무려 '120현'[7]의 인구를 들고 야마토로 망명했다.[8]

군사력도 덩달아 고갈되어버려 더이상 백제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하고 왜(야마토 정권?)를 끌어들였다..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게 왜와 화통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점을 생각해보면 고구려에게 얻어맞을 명분을 제공한 셈. (신하가 된다며?)

한일관계 우호에 굉장히(...) 증진했다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자의반 타의반 왜에 집착했고 왜의 성장을 도왔다.[9] 6.25때 한국 물 먹은 것 덕에 일본이 성장을 했던 것처럼 이때도 백제가 물 먹은 것 덕에 애꿎은(?) 일본이 굉장한 성장을 일구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야마토 왕조가 국가로서 모양새를 갖추는 시기가 아신왕이 광개토왕에게 발리는 시기이다. 백제로부터 미친듯이 들어오는 유민 행렬로 인구가 증가함은 물론 고급인력을 수용하게 되었고, 아신왕이 군사를 뜯어내기 위해 태자를 볼모를 보내고 왕인아직기 같은 당대의 석학을 일본에 보내어 선진문화를 전파시켜주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서 일본을 끌어들였다.

이후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전략을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라를 공격하는 쪽으로 수정하여, 400년에 가야의 대군[10]을 움직여 신라를 침공하나 광개토왕이 직접 신라까지 이끌고 온 군대에게 또다시 털렸다. 지못미... 이로써 백제는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상실해 버렸다.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중심의 백제-가야-야마토 연합도 가야가 파괴되면서 무너져버렸다.

더이상 쓸 수가 없던 모양인지 멀뚱멀뚱 가만히 있다가 403년에 고구려의 속국인 신라의 변경을 때리고 404년 일본과 함께 고구려를 다시한번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재미있게도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할 때 썼던 수륙병진책을 따라해서 수군과 육군으로 요동반도[11]의 석성과 대방의 경계 부근으로 처들어갔는데 결과는 뭐... 발렸다. 사태가 좀 커지자 광개토왕이 직접 와서 격퇴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아신왕은 사망했다.[12]

누군가는 아신왕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광개토왕 시기에 화병으로 죽은 왕은 후연의 모용수밖에 없다. 그것도 이 경우에는 광개토왕 때문이 아니라 북위를 상대로 벌어진 참합피 전투의 결과였고.

아신왕은 화병보단 정쟁에 휘말린 것으로 추측된다. 아니면 사망년도가 405년인 걸 보아 404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화병설이 나오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게 아니다. 저렇게 계속 광개토한테 발리고 발리고 발리고 발리고 안습하게 쳐발리는데 속 터져 죽지 않는다는게 신기하지 않은가?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과 같았다."

연구자들이나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선 근초고왕 시절의 강대국으로 다시 돌려놓고, 고구려에 진 빚을 갚으려고 했던 노력은 가상하나 적수가 너무 먼치킨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제작 초기에는 태왕사신기의 서브남주가 될 뻔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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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영 당시 제목이 이랬고, 종영 후에는 그냥 '한국 위인전'이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돌아다녔다.
[2] 동생이라고도 한다.
[3]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보건대 왜에서 그의 하극상을 지원해준것 같다.
[4] 광개토왕비문,일본서기 등을 종합해보면 신묘년에 왕위에 오르며 왜의 지원을 받아 신라와 가라(가야)에 대한 영향권을 강화한듯 함
[5] 혹은 광개토왕이 즉위했기 때문에 아신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외적으로 광개토왕 초반의 의욕적인 확장(석현성, 관미성)에 밀려 진사왕의 입지가 좁아진 틈을 타서 아신왕의 정변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
[6] 약 1200년 후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에게 같은 꼴을 당한다.
[7] (통일)신라 말기 현의 갯수가 400여 개였던 걸 보면 굉장한 숫자다.
[8] 그래도 친백제적인 야마토로 갔으니 망정이지 고구려나 신라로 가버렸으면... 사실 당시 신라측에서 궁월군 휘하 120현민의 야마토 망명을 방해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이 400년 고구려의 왜구 격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엑소더스급 민족대이동.
[9] 애초에 즉위할때 왜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으니 따지고보면 기브앤 테이크 지만...
[10] 이때 움직인 군대가 1만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저있는데 기록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왜는 군대를 맡았고 가야는 그 군대를 수용할 기지를 제공했다. 백제는 뒤에서 무선조종 명령을 했다.
[11] 또는 그 부근의 석성도라는 섬.
[12] 다만 400년의 신라 공격이나 404년의 대방고지 공격에 대한 호태왕비 기록에는 백제군이 아닌 왜군이 주체로 나온다. 신라 공격 직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다는 언급이 나오고 대방고지 공격은 백제와 연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가 왜군을 끌어들였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하지만 백제가 주도권을 잡고 일본을 끌어들였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2 삼국사기 내용

一年冬十一月 아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二年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다
二年秋八月 진무가 석현성을 등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다
三年春二月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秋七月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우다
三年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다
四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서 20일 만에 사라지다
四年秋八月 왕이 진무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다
四年冬十一月 패수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출전하다
六年夏五月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七年春二月 진무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다
七年春三月 쌍현성을 축조하다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七年秋九月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키다
八年秋八月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징발하다
九年春二月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나다
九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내다
十一年夏五月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청하다
十二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다
十二年秋七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春三月 흰 기운이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다
十四年秋九月 아신왕이 죽다

백제의 왕들 중에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고구려가 원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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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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