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1_0040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203&tabId=03&levelId=hm_020_0010 



서옥제 [壻屋制]


서옥제 [壻屋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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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어 :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데릴사위제(데릴사위制), 솔서혼(率壻婚)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살다가, 아이를 낳아 장성한 뒤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고구려의 혼인 풍습.

서옥(壻屋)이란 사위가 사는 집이란 의미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의 서옥과 혼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혼인을 할 때 말로써 먼저 정한다. 여자의 집 본채 뒤에 서옥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는다.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 문 밖에 도착해서, 스스로 이름을 말하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며 여자와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두 번 세 번 청한다. 여자의 부모가 이것을 듣고 서옥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면, 남자가 가져온 돈과 비단을 서옥 곁에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서옥제(壻屋制)를 데릴사위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데릴사위는 사위가 끝까지 처가에서 사는 것도 의미하므로 아들을 낳아 장성한 뒤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옥제는 사위가 처가에 일정 기간 머무르는 방식이므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옥제와 같이 여자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남자가 일정 기간 그곳에 머무르는 혼인 풍속이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또 남자가 서옥 옆에 돈과 비단을 쌓아 두는 것을 처가에 지불하는 혼납금(婚納金)으로 본다면, 서옥제는 구매혼(購買婚) 내지는 매매혼(賣買婚)의 성격을 지닌다. 이를 구매혼으로 본다면 처가에 머무르는 이유도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남자가 처가에서 일정 기간 머무르는 서옥제는, 며느리가 어린 나이에 시집에 가서 생활하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와 반대되는 혼인 풍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옥제가 최종적으로 남자 집에 여자를 데리고 간다는 점과, 남자 측에서 여자 집에 일정한 혼납금을 지불한다는 측면에서는 민며느리제와 유사성을 가지기도 한다. 한편 고구려의 또 다른 혼인 풍속으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동생과 부인이 결혼하는 취수혼(娶嫂婚)이 있었다고 전한다. 서옥제에 구매혼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남편이 죽은 후 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간다면 남자 집에서는 경제적인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취수혼의 목적 중 하나가 이러한 손실을 피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의 서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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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집 안의] 본채[大屋] 뒤편에 작은 별채[小屋]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이라고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신부의 집에서 머물기를 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해설

이 사료는 『삼국지』 「동이전」의 일부로, 3세기 중반 고구려의 혼인 풍속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료에 서술된 것처럼 고구려에서는 구두로 미리 혼인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부의 집 안에 있는 서옥(壻屋), 즉 사위의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장성하면 그때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혼인의 형태는 신랑 집과 신부 집 중에서 어느 쪽을 중심으로 혼인이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취가혼(聚嫁婚)과 초서혼(招壻婚)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취가혼은 혼인을 하여 처음부터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사는 것으로, 이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家父長)적인 혼인 형태로 이해된다. 이와 달리 초서혼은 솔서혼(率壻婚) 또는 데릴사위제라고도 하는데, 취가혼과 반대로 신랑이 신부 집에서 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이 신부 집에 평생 머무를 수도 있고 일정 기간만 머무를 수도 있는데, 이 사료에 보이는 고구려의 서옥제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랑은 신부를 얻는 대신 일정한 재화, 즉 폐백을 주어야 했고, 또한 신부 집에 머무는 동안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부 사이의 아이는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계(母系) 중심의 양육은 향후 아이의 사회 활동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짐작된다. 따라서 3세기 중반 고구려에서 서옥제란 형태의 혼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가족 제도에서 모계의 중요성이 컸던 사정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논문「고구려 서옥제의 혼인 형태」,『고구려발해연구』13,김선주,고구려발해학회,2002.
「고구려 지모신신앙과 모처제」,『사학연구』58⋅59,한영화,한국사학회,1999.
저서『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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