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110471
[한국의 문화유산] 대전서 찾은 고구려, 월평동 유적
2014-03-27 22면기사 편집 2014-03-27 05:53:58
월평동유적 고구려 성벽
고구려라 하면 광활한 대륙이 떠오르지만, 한때 대전까지 차지한 적이 있었다. 물론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들이 말을 달려 대전까지 내려와 성을 쌓고 신라, 백제와 일전을 벌였던 증거가 있다.
1994년 대전시 서구 월평동에 소재한 대전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시설 확장 공사를 진행하다 월평동유적 일부가 훼손됐다. 때마침 운동차 월평산성에 올랐던 한 고고학자가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발굴로 이어졌다. 하마터면 중요 유적이 사라질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다. 충남대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이 팀을 구성해 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국립공주박물관 소속이었던 필자는 즉시 현장에 투입돼 조사를 담당했다.
월평동유적 발굴은 1년 이상 진행됐다. 초반에 관심을 끈 것은 목곽고(木槨庫)였다. 마치 지하벙커처럼 땅을 파고 그 속에 나무로 방을 만든 것인데 나무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흙으로 가득 찬 내부를 조심스레 노출했더니 나무로 만든 사다리, 각목다발, 말안장, 밥주걱, 그릇, 양이두(羊耳頭)와 함께 백제 토기가 여러 점 출토됐다. 양이두란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품이다.
조사단은 이 유적을 백제유적으로 단정하며 조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능선 정상부의 한 구덩이 속에서 이색적인 토기 몇 점이 출토됐다. 고구려 토기임에 분명해 보였다. 백제유적에서 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걸까. 의문은 곧 해결됐다. 북쪽 능선에서 고구려식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이 대전까지 내려와 성을 쌓고 주둔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그 후 2001년에 이르러 금강변의 청원 남성골에서 고구려 목책성이 발굴되면서 월평동유적을 둘러싼 수수께끼도 함께 풀렸다. 이야기는 서기 4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장수왕은 호시탐탐 백제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개로왕이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국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자 곧바로 한성을 기습했고 백제는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웅진으로 쫓기듯 내려갔다. 고구려는 그 여세를 몰아 충주를 중심 거점으로 삼아 남진했고 대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월평동유적의 일부만 조사했으므로 그 다음 스토리까지 알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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