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ismy.d_0003_0010_0030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정혜공주묘 표지석
정혜공주묘(지도)는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혜공주)의 무덤으로 돈화현 남쪽 약 5km의 거리에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 1949년 8월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비문의 내용에서 40세로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에 죽은 공주에게 ‘정혜(貞惠)’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보력 7년 11월 24일에야 진릉(珍陵) 서원(西原)에 매장된 사실이 판명되었다.
정혜공주묘(한국사데이터베이스>정혜공주 묘지)가 중요하게 된 것은 이 묘에서 출토된 묘지가 사료가 극히 부족한 발해사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묘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금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이었던 것은 이 비문 제3행의 문왕과 공주와의 관계를 설명한 구절에서 밝혀졌다. 둘째, ‘대흥(大興) 보력(寶曆)’은 모두 문왕 때의 연호이며, 대흥 37년에 보력으로 개원(改元)되었다가 왕의 말년에는 다시 대흥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셋째, 대조영의 건국지가 발해사에서 가장 이설이 많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 정혜공주묘와 그 비문의 출토로 제2대 무왕 대무예(大武藝)의 능이 진짜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건국지는 돈화진의 오동산성으로 거의 정설화되고 있다. 넷째, 정혜공주묘비(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정혜공주 묘지)에 음각으로 되어 있는 비석 주변의 변초문과 상단의 운문, 그리고 비석문과 더불어 출토한 2기의 석사자를 통해 그들이 지녔던 석각예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정혜공주묘의 묘지는 이후 발굴된 정효공주묘의 묘비문과 대조해 본 결과 문장이 거의 같다는 점에서 발해 왕실에서 사용하던 묘지, 묘비문은 미리 마련해 놓았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다.
정혜공주묘가 발해왕국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남으로 300리나 떨어진 돈화현의 육정산에 있는 것은 까닭이 있다. 고조 대조영(大祚榮)이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빠져 나와 건국의 기틀을 잡아 두만강 유역의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하는 문왕의 시대까지 그 나라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 바로 돈화진의 오동산성(敖東山城)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발해 초기의 능묘가 육정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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