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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해 이불병좌상
미소 머금은 두 부처님 서로 손 맞잡은 이유는?
법보신문 승인 2013.02.04  14:11:00

해방 이후 최초로 이뤄진 역사적 해외발굴에 참여, 발해의 사원지 직접 조사
남북 연구자들 함께 모여 발해역사 연속성 다져야


▲발해 석조이불병좌상. 도쿄대 소장. 발해 이불병좌상 출현은 법화경 전래에서 비롯됐다.
 
1993년 5월15일 대륙연구소가 후원하고 고려대 김정배 교수와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발해유적 발굴조사단’은 잃어버린 민족사 발해의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떠났다.

이 조사는 해방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한국연구자들의 해외발굴이었다. 조사단은 한 달여 동안 발해의 옛 영토였던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며 발해의 사원지인 코르사코프카 유적과 크라스키노 고분군을 발굴하였으며, 유적에서는 불상, 기와를 포함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사료가 극히 적어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조사에는 러시아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함께 북한 사회과학원의 학자들도 참여하여 명실 공히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한 발해유적 공동발굴로 기록되었다.

동국대대학원 미술사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이 역사적 발굴조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개혁·개방을 표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여서 경제사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고, 조사환경 또한 먹고 마실 것들을 모두 한국에서 조달해야할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지만 당시의 경험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숙제로 남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시절에는 한국에서 러시아로 가는 직항편이 없었기 때문에 연해주의 관문인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면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러시아항공으로 갈아타야만 했다. 재일교포들의 북송선으로 유명했던 만경봉호의 출항지이기도 한 니가타의 한 서점에서 겨우 구한 발해관련 최신 자료가 우에다 다케시(上田 雄)의 ‘발해국의 수수께끼(渤海の謎)’라는 책이었다. 1992년에 간행되었으니 당시로서는 최신의 발해관련 서적이었지만 이때까지도 발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수수께끼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았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옛 고구려의 땅 위에 건국되어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228년간 존속했던 나라이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5경 15부 62주로 이루어졌고, 그 강역은 현재 중국의 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요녕성(遼寧省) 지역의 대부분과 러시아의 연해주 그리고 북한의 함경남북도·평안북도 지역 일부분에까지 미쳤다. 즉 발해의 전성기에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구려보다도 넓은 지역을 다스렸으며, 문화적으로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성숙한 국가였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린 이 정도의 지식만으로 발해라는 나라의 윤곽이 잘 떠올려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발해인들이 저술한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다른 나라의 역사책에 전해 내려오는 것조차도 너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졌었는데, 가장 먼저 발해유적에 대해 고고학적인 조사를 실시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1920년대부터 중국의 발해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발해의 5경중 하나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유지(遺址) 상경성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의 유지 팔련성(八連城) 유적을 조사했다. 그 이후 중국과 러시아 및 북한도 여러 지역의 발해유적을 발굴했고 우리나라는 1993년에 처음으로 발해유적을 발굴조사한 이래 지금까지 연해주 지역의 발해유적을 중심으로 꾸준히 현장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발해 오경배치도.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신봉했다. 초기의 가장 강력한 절대군주였던 3대 문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표방할 정도였다. 현재 발해의 불교유적은 60여곳 정도 알려져 있으며, 주로 상경과 동경지역에 밀집해있다. 그 중 동경용원부가 위치하고 있던 팔련성에서는 부처님 두 분이 하나의 대좌에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의 이불병좌상이 여러 구 발견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꾸준히 조성되었지만, 우리의 경우 발해를 제외하면 전시대를 통관해 보아도 3구정도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조각으로서는 매우 희귀한 도상의 불상이다.

불교 조각에 있어서 새로운 도상의 출현은 새로운 경전의 번역이나 전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의 대좌를 반으로 나누어 두 불상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불병좌상은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하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을 도상화한 것으로서, 이불병좌상의 조상(造像) 역시 ‘법화경’의 출현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불병좌상의 도상적 근원이 되는 법화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때 부처님 앞에는 칠보(七寶)로 장식된 거대한 탑이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이 보탑 안에 부처님이 한 분 계셨으니 보정국(寶淨國)의 다보(多寶)부처님이라. 다보불은 본래 보살도를 행할 때 다음과 같은 큰 서원을 세웠다. “만일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후 시방 국토에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나의 탑묘는 이 경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솟아나서 증명하고 찬탄하되 거룩하다고 말하리라.” (중략) 그때 다보불이 보탑 안에서 자리 한 편을 석가모니불께 내어주시며 “석가모니불은 가히 이 자리에 앉으소서” 하시니, 즉시 석가모니불께서 그 탑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 반분된 자리에 가부좌를 결하고 앉으셨다.’

이 구절은 ‘법화경’ 견보탑품의 내용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법화경’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 근거하여 수많은 불교예술품이 만들어졌으니 견보탑품 이야말로 ‘법화경’ 미술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발해의 이불병좌상들은 모두 팔련성 안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절터를 발굴한 이는 사이토 마사루(齊藤優)라는 1940년대 중국 길림성의 부대에서 근무하던 군인이다. 사이토 마사루는 중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으며, 교토대학의 고고학연구실에서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라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의 지도를 받은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황룡사지출토 금동이불병조상.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사이토는 만주지역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조사할 수 있었고,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도쿄대학과 그의 고향인 후쿠이현립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이토가 작성한 팔련성 발굴 보고서에는 파편을 포함해 총 8구 정도의 이불병좌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 상들 또한 대부분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으나 2구는 특이하게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군정이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 연합군의 지시로 대만으로 보내지게 되었다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발해 이불병좌상의 가장 큰 도상적 특징은 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상들은 대부분 두 구 모두 시무외 여원인이나 선정인을 하는데 비해서 발해의 상들은 두 분의 부처님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한쪽 손을 맞잡고 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얼굴의 두 부처님이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모습은 발해 이불병좌상 만이 표현할 수 있는 법화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발해가 한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발해 미술이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불리한 여건으로 인해 발해미술사가 한국미술사 속에 올바르게 자리매김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역시 발해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점과, 남아 있다 하더라도 어디에 있는지조차 조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해의 영토는 현재 중국과 러시아, 북한 지역에 두루 걸쳐 있었기 때문에 유적 또한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했던 중국은 발해가 독립된 국가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발해사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20년 전 남한과 북한의 연구자들이 러시아에서 처음 만나 발해의 유적을 공동으로 발굴조사했던 것처럼 북한지역의 발해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함으로써 발해역사의 연속성과 우리민족의 미래지향적인 통일의지를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이것이 발해 이불병좌상의 두 부처님이 손을 맞잡고 계신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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