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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인물들 5 - 백 살의 청년장군 초대 국상 명림답부


‘인생칠십 고래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70살까지 살기도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70이 장년이라 하기도 하고 80살 넘은 사람들도 꼿꼿한 허리로 다니는 할아버지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2000년 전의 일입니다. 100살에 정계에 나서 정치를 하고 심지어 말을 타고 대오의 앞장에서 삼척검을 휘두르며 전공을 세운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명림답부입니다. 

명림답부(67-179년)는 11대 태조대왕(53-146년)과 12대 차대왕(146-165년), 13대 신대왕(165-179년)의 세 왕에게 복무한 고구려 연나부 명문귀족출신의 재상입니다. 그는 100살을 바라보는 노년기에 차대왕의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차대왕을 처단하고 산골에 숨어있던 그의 아우 백고를 왕(신대왕)으로 내세웠습니다.

 

166년에 신대왕은 최고벼슬인 좌보와 우보를 합쳐 국상제도를 정하고 명림답부를 초대 국상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중앙과 지방의 군사통수권을 위임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군사실무에 매우 밝은 노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명림답부의 군사적 재능이 남김없이 과시된 것은 172년(명림답부의 나이 106살) (후한)나라 침략군을 물리친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명림답부는 섬멸전으로 청야수성전술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고구려의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림답부는 국내 여러 정치세력들의 단합에 힘쓰면서 옛 조선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군사 활동을 부단히 조직하고 전개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선비족과 협력하고 고구려와 같은 겨레의 나라인 부여와의 협동작전에 각별한 주의를 돌렸습니다. 167년 봄 부여왕 부태가 지휘하는 2만명의 부여군이 현도군을 공격할 때 그와 적극 협력하도록 했고, 168년 12월에는 선비군과 연합하여 한(후한)의 유주(하북성 북부일대), 병주(산서성 일대)를 공격했습니다.

유주와 병주를 공격당한 후한 통치배들은 이듬해인 169년에 고구려를 반대하는 새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도료장군 교현, 현도태수 경림은 자기 산하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이때 명림답부를 위시로 한 고구려 조정에서는 요동군과 현도군 통치배들 사이의 모순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현도태수의 침공을 물리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9년의 침공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후한 통치배들은 새로운 침략계획을 작성하고 그 준비를 다그쳤습니다. 3년간의 준비를 마친 후 172년 11월 ‘강병’을 동원하여 고구려땅 에 쳐들어왔습니다. 봉화가 전국각지에 타오르고 역졸들은 부지런히 박차를 가하고 채찍을 휘둘러대며 수도인 국내성으로 말을 몰았습니다.

당년 84살의 늙으신 왕인 신대왕은 채수염을 내리쓸며 신하들을 굽어보았습니다. 그의 수북한 긴 눈썹에 가려진 크지 않은 두 눈에는 나라를 침략한 원수들에 대한 증오로 가슴 불태우고 있는 믿음직한 신하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껴갔습니다.  

“그래, 한나라의 대병이 우리나라를 침공해오니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편이 유리하겠는가?”  조회 청이 술렁거렸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수군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런 때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훌륭한 계책을 내놓아야 할 국상인 그는 머리를 짓 수굿하고 상념에 잠겨있었습니다. 당년 106살의 노회한 저 사람은 과연 심중에 무엇을 묻어두고 침묵을 지키는가. 

먼저 계하에 나선 신하는 다른 재상이었습니다. “페하, 신 등은 한나라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니 맞받아나가서 치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여러 대신들이 동감이라는 듯 긍정하는 말들을 소곤소곤 주고받았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그 재상은 약간 소리를 높여 자기의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적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기고 자주 올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켜도 만 사람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옵니다. 한나라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출동하여 막아버리도록 하소서.” 

신대왕은 헛기침을 했다. 신하들은 그 계책이 임금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전략이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아의 역량관계를 심중히 고려함이 없이 세워진 것이라는 것만은 명백했다. 문제는 당시의 조건에서 적군이 오랫동안 훈련된 ‘강병’이고 수량으로도 ‘대병’이라는데 있었습니다. 

명림답부는 낮으나 힘 있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페하, 나가서 싸워서는 안되옵니다.”  

모두의 눈이 커졌습니다.
 

신대왕만은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어리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으며 이제 강병으로 멀리 싸우러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소이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키는 것이 옳으니 이것은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옵니다. 한나라 사람들이 천리 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며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우리가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곡식 한 알도 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리게 되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해서 돌아갈 것이옵니다. 이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명림답부가 이처럼 청야수성전술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적아간의 역량관계와 적들의 전술상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들이 전쟁을 도발한 것은 11월로서 겨울철이었습니다. 요동지역에서는 이때면 추위가 한창이었습니다. 병법에는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되어있는데 결코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적들이 어째서 굳이 겨울에 침공 날짜를 정했는가. 그것은 적들이 속전속결을 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적들이 속전속결에서 노린 목적은 고구려의 대왕을 사로잡아 굴복시킴으로써 다른 성, 진들과 제후국들이 스스로 항복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적들이 운명을 건 속전속결의 전략을 저지 파탄시키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열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적들의 속전속결전략을 파탄시키는 가장 좋은 방도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청야수성전술,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곡식 한 알 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려 적들이 굶주리고 피곤하여 물러가게 하는 전술이었습니다. 적들이 속전속결로 나오는 조건에서 청야수성전술로 적을 오래 붙잡아둘수록 적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더구나 추위에 견딜 수 없게 되어, 반드시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깊이 끌어들일수록 적들에게 보급로가 더 멀어지게 될 것이고 또한 기습전으로 그것마저 끊어놓으면 적들이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승리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계책을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신대왕은 한 알의 낟알도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여러 군부대들로 하여금 적들의 치중부대를 습격해서 보급로를 끊어버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성을 닫고 굳게 지킴으로써 한나라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려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습니다.
 
 
명림답부는 계획대로 되자 퇴각하는 적들에 대한 추격전을 조직했습니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적들을 다시는 추스를 수 없도록 철저히 소멸하는 것이었습니다. 
명림답부는 추격전으로 적들을 섬멸하고 성스러운 이 땅을 침범한 자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려는 고구려 사람들의 의지와 본때를 보여주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는 수천명의 정예기병으로 추격부대를 편성하고 자신이 그 선두에 섰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06살, 가슴에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애국심이 청춘의 힘과 활력을 되찾아주어서 전진하는 대오의 맨 앞장에서 그의 백발은 승리의 기발마냥 나부끼었습니다.
 명림답부의 지휘 하에 고구려군은 좌원에서 ‘강병’, ‘대병’이라고 큰소리치던 적들은 모조리 섬멸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옛 문헌에서는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시기에도 을두지가 청야수성전술을 쓴 일이 있지만 그는 단지 적을 쫓아버리는데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청야수성전술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명림답부는 청야수성전술로 적을 굶주리고 피로케 하여 승리의 조건을 마련하고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으로 섬멸소탕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수행에서 청야수성전술이 명실 공히 그 의의를 나타낼 수 있도록 했다는 데 군사예술발전에 기여하는 데에 그의 공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명림답부는 역시 초대 국상의 지위에 어울리는 군사적 공적을 이룩한 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세에 우리나라의 많은 명장들이 청야수성전술과 섬멸전을 배합하여 적들을 철저히 소탕했는데, 이것은 명림답부가 지휘한 좌원싸움의 심원한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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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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