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philman1024/30


우리 역사의 인물들 8 - 초야에 묻혀 있었던 재사 을파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퇴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이것은 고구려 고국천왕(179-197년)때 재상이었던 을파소가 한 말입니다.

 

을파소(?-203년)는 류리명왕(B. C. 19-A. D. 18년)때의 대신인 을소의 후손입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재략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고향인 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권은 연나부 귀족출신이며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에 의하여 농락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후의 친척이랍시고 권세를 쓰면서 정책조정과 관리임명도 제 마음대로 하고 부패 타락한 생활을 일삼고 있었으며, 그 자식들과 아우들도 아버지와 형들의 권세에 등을 대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의 자녀를 약탈하여 제 노비로 만들었고 남의 토지와 가옥을 함부로 빼앗았습니다. 좌가려 일당의 횡포하고 무도한 행위는 인민들의 원한의 과녁으로 되었고, 다른 부의 귀족들도 정권을 좌지우지하면서 제멋대로 날뛰는 그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국천왕
(이름은 남무)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왕권을 침해하는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국천왕은 어비류, 좌가려 일당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어비류 일당은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습니다. 191년 4월 어비류, 좌가려 일당은 반란을 일으켜 수도로 공격해왔습니다. 
고국천왕은 왕기(본래의 고구려 5부의 지역)안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어비류와 좌가려 등 주범들은 처단했으며 그들에게 추종한 무리들은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을파소는 언제나와 같이 해 뜨면 연장 메고 들판으로 나가고 해지면 소잔등에 달빛 싣고 돌아왔으며,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어유등잔의 심지를 돋구어가며 부지런히 책을 읽었습니다. 태평스레 밭 갈고 김매며 노력의 땀방울이 알알이 맺힌 듯 탐스럽게 열린 벼이삭을 안고 어린애마냥 기뻐하는 그의 넓은 가슴에 과연 무엇이 깃들어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번듯한 이마에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묻어놓은 저 인상 좋은 선비님은 질끈 동인 수건을 땀으로 적시며 한세상 사래긴 이 땅과 인연만 맺으려나. 그의 처자들도 종들도 마을사람들도 풀길 없는 의문을 묻어둔 채 그와 농부가를 주고받으며 걸차게 일을 해치우군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치가 돌배나무에 앉아 어지러이 깍깍거리더니 중낮 무렵이 되어 두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공의 성함을 을파소라고 하지 않소이까?” 절풍을 쓴 키 큰 사나이가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존경심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렇소이다.” 을파소는 의아한 눈길을 들며 대답했습니다.

“공께서는 어지를 받으시오이다.”  말이 떨어지자 을파소는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돗자리를 깔게 한 후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서압록곡 좌물촌 사는 을파소는 들으라. 시국이 어지러우니 그대가 세상을 건질 재주를 가지고도 초야에 묻혀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소냐. 이는 모두 짐이 밝지 못한 탓이로다. 특별히 그대를 부르노니 그대는 인재를 그리는 짐의 뜻을 헤아려 거스르지 말지어다.” 을파소는 정중히 어지를 받고나서 두 사신을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추하오나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고맙소이다.” 사신들은 겸손한 태도를 흩뜨리지 않고 선선히 응했습니다. 고국천왕이 자기를 대신해서 가는 사신들에게 한없이 겸손한 모양을 보여 인재를 청하는 마음을 알게 하라고 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간 후 을파소는 넌지시 까닭을 물었습니다. 

절풍을 쓴 키 큰 사나이가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얼마 전에 연나부의 반란이 진압되었소이다.…”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국천왕은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최근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으므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으니 이것은 짐이 정사에 밝지 못한 탓이로다. 그대들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관하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4부(과루부, 환나부, 관나부, 제나부)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동부의 안류를 천거했습니다.  왕은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류는 벼슬을 사양했습니다.

“어인 일인고?” 
왕이 물었다.


“페하,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진실로 중대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없소이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을파소라는 사람이 살고 있사옵니다. 그는 유리왕 때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격이 굳세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소이다. 폐하께서 만약 어진 사람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실진대 반드시 이 사람을 쓰셔야 할것이옵니다.”  

이렇게 되여 왕이 보낸 사신들이 이 한적한 골 안에까지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신들은 을파소에게 왕이 보내는 값진 예물들을 내놓았다. “대왕께옵서는 물건으로 인재를 살 수는 없지만 성의로 알고 받아달라고 하셨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을파소는 인재를 위하는 왕의 성의에 감동되어 사신일행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만나보고 몹시 기뻐하며 중외대부의 벼슬을 내리고 우태의 작위를 더해주었다.

 

“짐이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의 윗자리에 앉았으나 덕이 박하고 재주가 없어서 사리에 어둡다. 선생이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곤궁하게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리어왔으니 이는 비단 짐에게 다행으로 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복으로 되리로다. 그대의 가르침을 달게 받겠으니 마음을 다해주기를 바라오.”

 

을파소는 한동안 침묵했습니다. 나라에 이바지하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맡은 직위는 보잘것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신은 우둔하여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페하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대업을 성취하소서.”

 

왕은 그의 의사를 짐작했습니다. 일을 해보려고 해도 맡은 벼슬이 시원치 않다는 속내였습니다. 왕은 을파소의 벼슬을 높여 나라의 첫째가는 재상인 국상으로 임명했습니다. 

을파소는 곧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근신들과 외척들을 정계에서 밀어내며 그들이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자들은 을파소가 새로 등용되자마자 이전 대신들을 이간한다고 시비질하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왕은 노하여 조서를 내렸습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나 할 것 없이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친족까지 멸할 것이다!”
 

이 명령을 받아가지고 나온 을파소는 사람들에게 감동된 어조로 말했습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퇴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해주시는데 어찌 다시 이전과 같이 은퇴할 것을 생각하랴.” 

을파소는 왕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나랏일에 지성을 다 바쳤습니다. 정치를 밝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하게 하니 나라일이 잘되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었습니다.

 

그해(191년) 10월 왕은 안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짐이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사업이 정돈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 그러면서 왕은 안류를 대사자로 임명했습니다.

 

물론 을파소가 한 일은 봉건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당시의 조건에서 귀족세력의 전횡을 막고 인민들의 반봉건적 진출을 무마하며 국력을 강화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4년 한창 곡식이 여무는 여름철에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죽고 흉년이 들었을 때 구제대책을 세우고, 해마다 봄 3월부터 7월까지 사이에 관가의 곡식을 내여 백성들의 식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구제 삼아 빌려주었다가 10월에 가서 갚게 하는 법규를 제정하여 실시하도록 한 것도 을파소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7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해진 고구려의 내정에 간섭하여 침략해온 공손도의 침략을 성과적으로 물리치고 198년 환도성을 쌓아 서북방면으로 진출하는 기지를 마련한 것 등, 당시 국상으로서 왕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을파소의 활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을파소는 고구려의 강성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뚜렷이 남긴 재능이 있는 큰 정치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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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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