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yoljunDetail?url=yoljundetail&sn=1004


을파소


[번역문]
"을파소(乙巴素)[주석441]는 고구려 사람이다. 국천왕(國川王)[주석442] 때 패자(沛者)[주석443]어 비류(於畀留)[주석444]와 평자(評者)[주석445] 좌가려(左可慮)[주석446] 등이 모두 [왕후]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으므로 왕은 노하여 그들을 목베려 하였다. 좌가려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그 일당을] 목 베기도 하고 혹은 귀양보냈다.[주석447]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요즈음 벼슬이 총애로써 주어지고 직위에 덕이 없는 사람이 진출하여 그 해독이 백성에게 퍼지고 우리 왕실은 동요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지금 너희 4부(四部)[주석448]는 각기 아래에 있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라!”

이에 4부는 동부(東部)[주석449]의 안류(晏留)를 공동으로 천거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국정을 맡기려 하였더니 안류가 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용렬 우둔하여 참으로 큰 정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라는 이는 유리왕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주석450]입니다.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은데도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주석451]에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우태(于台)[주석452]로 삼으며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자리를 이어 받아 신민의 위에 처하게 되었으나 덕이 적고 재능이 모자라서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소!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주석453] 시골에 파묻힌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이렇게 오니, 이것은 나의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생민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시오.”

[을]파소의 생각은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였으나, 받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기를 “노둔한 신으로서는 감히 엄명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왕은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에 제수하여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때 조정 신하들과 국척(國戚)들은 [을]파소가 새로이 들어와 이전 대신들을 소원하게 한다 하여 미워하니, 왕이 하교하되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족을 멸하리라!” 하였다.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서 살고, 때를 만나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임금께서 후의로 나를 대우하니, 어찌 전일의 은거를 다시 생각하랴?”

이에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중앙과 지방에 일이 없었다. 왕이 안류에게 말하였다. 
“만일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능히 [을]파소를 얻어서 함께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모든 치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를 대사자(大使者)[주석454]로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원문]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畀[주석117]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迺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

주석

  • 441) 을파소(乙巴素)
    ?∼203. 고구려 고국천왕대(179∼196)의 國相. 유리왕대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 서압록곡 좌물촌 출신.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한미한 그가 고국천왕 13년(191)에 현인으로 4부의 천거를 받은 晏留가 사양하고 을파소를 추천하여 국상으로 발탁되었다. 國戚이나 有力貴族들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면서도 고국천왕 16년(194)에 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점차 심화되는 공동체적 유제의 소멸현상에서 배태되어 나오는 無田農民이 귀족의 隷民으로의 전락을 막아서 국가의 良人으로서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라를 잘 다스린 공로가 인정되어 大使者의 관등에 올랐다.
    본 전기는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2년(190) 9월조와 13년 4월조의 기사를 합친 것이다(李弘稙, 〈三國史記 高句麗人傳의 檢討〉, 《史叢》 4, 1959: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1971 재수록, 249쪽).
  • 442) 국천왕(國川王)
    고구려의 제9대 왕인 고국천왕을 가리킨다. 고국천왕은 國襄王이라고도 했다. 본서 권16 주석 18 참조. 국천왕의 ‘國’자 위에 ‘故’자를 붙인 것은 혹 평양 천도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역사편〉,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35쪽).
  • 443) 패자(沛者)
    고구려 초기의 고위 관직.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對盧를 둘 때는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둘 때는 대로를 두지 않는다고 한 점으로 같은 직능을 가진 관직이라고 생각된다. 본서 권15 주석 10 참조.
  • 444) 어비류(於畀留)
    고구려 고국천왕대의 왕의 외척. 「畀」자는 성암본, 중종임신간본 《三國史記》등에서는 ‘畀’자로 되어 있으나 주자본에서는 ‘昇’자로 되어 있다. 본서 권16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2년 9월조에도 ‘於畀留’로 되어 있다.
  • 445) 평자(評者)
    고구려 초기의 관직명. 중앙의 일을 맡은 內評, 지방의 일을 맡은 外評의 관직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되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본서 권16 주석 30 참조.
  • 446) 좌가려(左可慮)
    고구려 고국천왕대의 외척. 왕후의 于氏의 친척으로 권력을 휘두르자 왕이 이를 주살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
  • 447)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 귀양보냈다
    어비류 등과 함께 귀향간 일당에는 족장들인 4椽那 등이 포함되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기사는 본서 권16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2년(190) 9월조에 실려 있다.
  • 448) 4부(四部)
    四部는 畿內 또는 國內의 5부(동·서·남·북·내) 행정구역 중의 4부를 말한 것으로, 여기에 특히 1부가 제외되었는데, 그 1부는 생각컨대 왕족 및 외척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內部(黃部) 즉 桂婁部라고 이해하고 있다. 외척의 화를 입은 왕은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4부(동서남북)에서 賢者를 구하려고 하였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57쪽).
  • 449) 동부(東部)
    順奴部. 본서 권16 주석 34 참조.
  • 450) 을소(乙素)의 후손
    원문은 『乙素之孫也』로 되어 있다. 본서의 편년을 따른다면 서기 18년까지 재위한 유리명왕과 고국천왕 13년(191)과는 무려 170년의 시차가 있어 이를 2대의 祖·孫관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본전에서 이를 후손으로 번역한 것이다.
  • 451) 중외대부(中畏大夫)
    본서 권16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3년(191)조와 열전 45 을파소전에만 나오는 관직명으로 중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명이 아니라 중국적인 관직명칭이거나 ‘中畏大兄’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중외대형은 泉男生 등의 묘지명에 보이는 ‘中裏大兄’의 다른 표기일 수도 있다. 이 당시에 중국적인 관직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에 열전이 기록되면서 혹 윤색된 기록이 아닌가 한다.
  • 452) 우태(于台)
    고구려의 고위 관명. 부여나 고구려 사회에서 ‘웃치’, 곧 上者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史書에는 ‘優台’로 표기되어 있다.
  • 453)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藏用晦明]
    ‘藏用’은 功用을 숨겨서 아무도 알지 못함이니, 《周易》 繫辭上의 『顯諸仁藏諸用』에서 인용된 말이며, ‘晦明’은 ‘夜晦日明’의 준말로써 晝夜를 뜻한다. 즉 주야로(언제나) 자기의 공용을 숨겨서 남이 알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다.
  • 454) 대사자(大使者)
    고구려의 고위 관직명. 군주가 임용하는 신하로서 조세징수의 임무를 주로 담당하였다고 이해된다. 권14 주석 26참조.
  • 117) 
    鑄字本 「昇」. 燾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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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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