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koreanhistory/1881


을파소(乙巴素, ?~203)는 191년에 고구려의 국상이 되어 12년간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일하였다. 초야의 선비로 묻혀 있던 그는 추천을 받아 벼슬살이에 나설 때, 기왕 줄 자리 높게 달라고 당당히 말한, 개성 강한 이였다. 고구려를 대표할 만한 명법(名法)인 진대법은 그의 손을 통해 나왔으리라 본다. 왕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명재상. 을파소의 생애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비의 처신 그 이상을 보여준 독특한 개성파

벼슬자리 외에 딱히 먹고 살 일이 없었던 옛날의 선비들이었지만, 벼슬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엄정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들, 선비가 지키는 지조는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아무나 아무 때나 부른다고 그냥 나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벼슬에 나가는 기준은 명분에 맞아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무를 수행할 만큼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하고, 나라에 선비를 알아 줄 도(道)가 있어야 하며, 공식적인 부름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나가는 일의 기준은 반대로 물러나는 일의 기준과 손바닥의 앞뒤를 이루었다.

 

이 기준에 맞더라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가 있었다. 아마도 소부(巢夫)와 허유(許由)의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오래 전, 중국 요순시대 때이다.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순 임금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물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유라는 고매한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장 그를 찾아가 이 나라를 맡아 달라 하였다. 그러나 허유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공부도 충분하고, 요순시대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도가 행해지던 시대이고, 왕이 직접 찾아와 요청을 했음에도 그는 거절했다. 모든 요건을 갖췄는데 왜 거절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유는 바로 영천(潁川)으로 달려가 흐르는 맑은 물에 양쪽 귀를 번갈아 가며 씻었다. 그때 마침 소부가 말을 몰고 나와 물을 먹이려다, 귀를 씻는 허유에게 까닭을 물었다. 왕을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씻는다고 하였다. 이쯤 되면 참 가관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터이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더 가관이다. 더러운 말을 듣고 더럽혀진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말엔들 어찌 먹일 수 있겠느냐며, 소부는 말을 몰고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그렇다면 이것은 명분 이상의 문제이다. 비록 소부와 허유가 설화상의 인물이기는 하나, 역사상의 선비 가운데도 보다 고양된 어떤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명재상 을파소는 이런 기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였다. 선비가 지니는 명분 이상의 것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허유∙소부 같은 신선놀음에 빠진 이도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아, 어느 만큼의 위치에서 어떤 업적을 남기리라 정확히 측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대로 걸어간 멋쟁이였다.



멈칫하는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은 대망의 명재상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이후 차분한 발걸음으로 나라의 꼴을 갖춰가고 있었다. 동명과 유리로 이어지는 건국세대가 막을 내린 다음, 대무신왕은 27년, 국조왕은 9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의 틀을 잡았다. 그 사이 짧은 기간 자리를 지킨 왕도 있었으나, 차대왕과 신대왕을 이어 고국천왕에 이르자 왕조는 힘을 받는 듯했다.

 

그러던 고국천왕 12년(190)에 문제가 발생했다. [삼국사기]에 실린 이 해의 기록으로 가보자.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 등이 권세를 휘두르며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다. 좌가려는 왕의 부인 우씨(于氏)의 친척이었다. 백성의 원망이 높아지자 왕은 노하여 그들을 목 베려 하였다. 그러자 좌가려 등이 반란을 꾸몄다. 이들의 반란은 이듬해 여름에 본격화되었다. 무리를 모아 왕도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왕은 일당을 목 베고 귀양 보내며 일단 급한 불을 껐다. 이 같은 반란으로 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왕조를 세운 이후 이처럼 큰 반란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벼슬이 측근에게 주어지고, 지위가 덕행에 따라 올라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탓이었다. 이제 너희들 4부에서는 각기 초야에 묻혀 지내는 어진 이들을 추천하도록 하라.”

 

고구려에는 5부(동·서·남·북·내)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런데 왕이 4부라고 한 것은 어비류나 좌가려가 속한 중앙의 내부, 곧 계루부(桂婁部)를 제외했다고 볼 수 있다. 반란의 주모자가 든 지역을 제외한다면, 지방의 4부에서 현명한 이를 뽑아 중앙으로 진출시키겠다는 것이 왕의 의도였으리라. 그리고 바로 앞 왕인 신대왕 때에 명림답부(明臨荅夫)라는 명재상이 있었음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는 한(漢)나라 현토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출동시켜 고구려로 쳐들어 왔을 때, 다른 신하와 달리 무척 신중한 대응방법을 내놓았었다. 곧바로 군사를 출동시키자는 중론과는 달리, 명림은 지공(遲攻:공격을 늦추는 것)과 초토작전(성을 비우거나 물자를 없애버려 원정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명림의 이 작전은 적중하였다. 고국천왕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런 명재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왕 줄 자리면 높은 자리를 주십시오


을파소가 조선시대 사람이었다면, 품계석 맨 앞에 해당하는 정1품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출처 : 파란하늘(http://blog.naver.com/smyin.do)>


왕의 명령에 따라 처음 재상들이 천거한 이는 동부(東部)의 안류(晏留)였다. 동부는순노부(順奴部)라고 한다. 왕이 그를 불러서 국정을 맡기려 하자,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나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안류는 [삼국사기]의 여기서 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좀 더 자세한 그의 이력을 알 수없다. 을파소를 천거했다는 한 가지 공으로 대사자라는 직책을 받았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안류를 실재 인물이라 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을파소를 위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시킨 듯 한 인상을 받게도 된다.


드디어 왕이 사람을 보내 을파소를 초빙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대목에서 왕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그를 맞아들였다 쓰고 있다.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임명한 다음 작위를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았는데, 중외대부는 여기서만 보이는 관직명이고, 우태는 고구려의 고위 관직명이다. 왕이 을파소에게 말한다.

  

“내가 외람되이 조상의 왕업을 계승하여 신하와 백성의 위에 올라서 있으나, 덕과 자질이 부족하여 정치를 잘하지 못하고 있소. 선생이 자질을 감추고도 현명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야에 묻힌 지 오래였으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고쳐 잡고 이렇게 와주었으니, 이는 비단 나에게 다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사직과 백성의 복이라오.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라오.”

우리는 여기서 선비를 벼슬살이로 불러내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을파소가 “신은 미련하고 게을러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고, 큰일을 이루시옵소서.”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다. 겸양으로 흔히 선비는 세 번 사양하고 왕은 세 번 권한다고 한다. 그러나 파소의 이 말은 ‘뜻은 비록 나라 일에 가 있었으나, 맡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왔다고 [삼국사기]에서는 쓰고 있다. 파소의 말 가운데 ‘높은 관직을 주시고 큰일을 이루라’는 속뜻을 헤아려 보면 과연 그렇다.

 

이럴 수 있을까? 앞서 을파소를 ‘독특한 개성파’라고 했는데, 기왕 할 일이면 확실히 하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은 데서, 우리는 다른 이에게서 보기 어려운 그만의 성격을 보게 된다. 일이 잘 되려고 왕은 그 뜻을 알아챘다. 을파소에게 최고의 관직인 국상(國相)을 제수하여 정사를 맡긴 것이다. 고국천왕 13년(191)의 일이었다.



왕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다


백성들에게 추수는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나, 이때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며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을파소는 이런 백성들을 구하고자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출처 : 김홍도 [타작]>

다소 엉뚱하고 발칙해 보이기까지 하는 을파소. 국상에 임명된 다음 과연 그는 왕의 마음에 흡족하게 일을 하였을까? 사실 왕의 기대 속에 등장한 을파소를 기다리는 것은 기존 관료들의 따돌림이었다. 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의 대신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그를 미워하였던 것이다. 왕은 분명히 못을 박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일족을 멸하리라.”는 교서를 내렸다. 어떤 다른 국상이라도 왕에게 이만한 권한을 부여 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소 또한 왕의 확고한 신임을 알았기에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떳떳한 행동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우하시니, 어찌 다시 예전에 숨어살던 때를 생각하랴?”  ([삼국사기]에서)

 

을파소가 재임하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다소 막연하다. 그러나 고국천왕 16년(194), 곧 파소가 임용된 지 3년 뒤에 시행되는 진대법(賑貸法)은 틀림없이 을파소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으리라 보인다. 이 해 극심한 흉년이어서 곡식을 풀었는데, 겨울이 오자 비참한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왕이 발 벗고 나서 백성 구하기에 힘을 쏟으며, 아울러 중앙과 지방의 관련 부서에 명령을 내려,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 그리고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이들을 찾아 도와주게 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이를 아예 법제화하여, 매년 봄 3월부터 7월까지 관가의 곡식을 풀어 백성의 식구 수에 따라 빌려주었다가 겨울 10월에 갚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명법이라 할 수 있는 진대법이다.


진대법을 시행한 지 3년 뒤에 고국천왕이 죽고, 그의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에 올랐다. 을파소는 이 왕대에도 국상으로서 계속 일을 하였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산상왕 7년(203) 조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아들을 두지 못한 왕이 근심하다가 후비에게서 자식을 얻으리라는 꿈을 꾸는데, 꿈은 그렇다손 치나 정작 후비가 없으니 될 일인가 탄식하자, 파소는 “하늘이 정한 운명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라고 충언하였다.

 

이런 일이 있고 5년 뒤, 산상왕은 기이한 인연으로 아리따운 여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곧 동천왕이다. 그러나 을파소는 아이의 탄생을 보지 못하였다. 왕에게 충언하던 바로 그 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12년간 국상의 자리에서 두 왕을 모신 끝이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지성껏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했거니와, 그런 을파소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울며 서러워했다. 을파소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명재상이었다.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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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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