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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주민 구성
발해 주민 구성과 관련하여 발해 사람들이 당시 그들 자신을 누구의 후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 발해 주민들이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생각하였는가 아니면 ‘말갈’ 후손으로 자처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발해의 주민 구성
발해국의 주민 구성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발해국 이전의 고구려인들이었는가, 아니면 그들과 관련이 없는 이른바 말갈인이었는가?
흔히 발해의 주민을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피지배층이 고구려와 관련 없는 말갈인이 대부분이었다면, 발해야말로 말갈의 왕조였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소수의 고구려 지배층만을 중심으로 발해국이 고구려인의 왕조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해의 주민은 건국(698)되기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인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말갈이라 불리는 주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 출신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방 피지배 주민들을 멸시하여 부른 호칭이었다.
흔히 발해의 주민을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피지배층이 고구려와 관련 없는 말갈인이 대부분이었다면, 발해야말로 말갈의 왕조였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소수의 고구려 지배층만을 중심으로 발해국이 고구려인의 왕조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해의 주민은 건국(698)되기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인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말갈이라 불리는 주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 출신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방 피지배 주민들을 멸시하여 부른 호칭이었다.
물론 발해 시대에 지금과 같은 국가나 민족의 계승 의식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왕조는 나름대로의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다면 발해 주민 구성의 열쇠는 말갈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 있다.
발해의 주민이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이었다고 하는 이원적 주민 구성론은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학계에서도 지배층은 모두가 말갈인들이라고 하여 지배층의 고구려인설도 부정한다. 지배층의 고구려 유민설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인과 다른 다수의 피지배 말갈인설을 수용한다면 발해사야말로 말갈사나 만주사로 봄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가 고구려 유민이었다. 발해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점은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가 이미 1955년도에 밝힌 바 있다.
그가 밝힌 내용에 의하면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에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가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에는 “(발해) 옛 고구려의 땅을 다시 찾아 거하고 있다”고 하였다든지 발해왕 스스로를 ‘고구려국왕 대흠무’라고 하였던 점을 들고 있다.
아울러 일본에 보낸 85명의 발해 정사(正使) 중에서 26명이나 옛 고구려의 성(姓)과 같은 고씨(高氏)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고려)라고도 하였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후 발해 지배층의 고구려인설은 북한의 박시형과 일본의 미까미 등에 의해 수용되어 오늘날 한국 및 일본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도 대부분은 피지배층의 말갈설을 지지하였다. 다만 북한은 1990년대 이후 피지배층 다수도 고구려인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말갈족이 존재하였음을 인정한 전제에서 고구려 땅(발해 본토)에 세워진 발해는 당연히 고구려 후손으로 보아야 한다는 상식이 이론의 큰 전제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지배층도 역시 고구려계와 말갈족이었다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신당서](1044-1060)에 발해 건국자 대조영을 ‘속말말갈’ 출신이라고 한 것에 근거해서이다.
그러나 대조영의 고구려계설은 발해가 멸망하고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구당서](940-945)에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으로 기록하고 있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를 수용하고 있다.
앞의 [신당서]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종족적 출신 성분이다. 다만 [신당서]도 대조영을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어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도 발해의 주민 구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과연 ‘말갈’이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를 다민족 국가로 보고 그 구성 종족 중에 말갈의 존재를 인정한다며, 장수왕대에 조성된 광개토왕 비문 정도에는 분명 말갈의 존재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말갈로 여길 만한 대목은 없다. 기록상 말갈이 처음 나오는 것은 중국 사서부터였다.
그러나 한국측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온조왕이나 동명성왕 원년(B.C 37) 때에도 말갈이 등장하고 있어 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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