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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 발해 너는 왜 남진 안했니? (1) - 경제적 접근

고려이후 되면 영토확장과 확장지역의 고착화는 왜 불가능해졌는가?

예전에 발해 수령을 중심으로 발해사 공부한 흔적을 연재하다가 임용 핑계를 대고 잠시 중단한 적이 있었드랬죠. 그때 써둔 간략한 원고와 수집해둔 원사료는 하드를 날려먹는 바람에 다시 모으기가 귀찮아져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음.. 당시에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서 떡밥을 제조해보고 있었는데 미연시리얼님이 제기하신 의문도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뭐, 자문자답식으로 거의 사고실험(응?)에 가까운 떡밥이긴 한데 당시의 제 생각은 대략 이러합니다.(뭐, 전 야매로 공부하다보니 이미 발해 관련 개설서에서는 다 언급될 법한 뻔한 얘기를 사고실험 운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국가가 특정 구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동인이 있을 것입니다. 내외적인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일으킨 전쟁의 부산물로 특정세력을 멸망, 흡수한다거나 혹은 그 연장선에서 전략 위치 선점을 위한 지정학적 요충지 확보가 있겠죠. 

경제적인 면에서는 특정 지역에만 존재하는 특수 자원을 확보해야만 한다거나 재정 확충을 위한 지대수입 확보차원에서 토지개간을 위한 목적도 있을 것입니다. 전근대에서도 농업기술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고대 사회의 경우 인구압에 대한 해답은 개간이나 외부 정복이 답일텐데 영토 내에 그 당시 기술로 개간할 수 있는 곳은 다 개간해서 토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변경의 미개척지로 눈을 돌린다거나 미개척지가 주변에 없다면 마찬가지로 외부정복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고려 초나 통일신라 초중기 때 북방지역에 대한 개간 정책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발해는 어떨까요? 아.. 그 전에 고구려의 사례를 생각해봅시다. 미연시의 리얼님이 말씀하셨던 '남하정책'이란 면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교해보자는 말이지요. 

재밌는 것은 고구려가 남하를 생각하게 되는 3세기 말 4세기 초의 시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벌어진 5호의 남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적 연속성을 생각해보게 되면 5호가 점차 남하하는 2세기 말에서 영가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 4세기 초까지의 시간동안 동아시아의 기후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땅이 어는 곳이 늘어나면서 유목 가능 구역도 그만큼 줄게되면 활동지역이 남하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겠죠. 그렇다면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춥다는 이유로 남하하게 되는 걸까요? 분명 농경가능 구역의 일정한 축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목민의 제국에 비해서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꽤나 남쪽이라 그게 남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진 않을 겁니다. 간접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무슨 말이냐면 5호의 남하로 진출이 빡세진 북쪽에 비해 남쪽이 기회비용면에서 더 쉽게 보였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실제로 미천왕 대부터 본격적이 된 모용선비와의 대결에서 이렇다 할 수확은 없고 심지어는 수도까지 털려버리는 국제적 대망신을 당했습니다. 광개토태왕 때 후연을 박살내버리고 요충지인 요동반도를 완전히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웬걸요. 모용선비보다 더한 놈들이 북방을 장악해버리고 지배를 공고히 하니 더 이상은 그쪽으로 진출할 엄두가 쉽게 나지 않습니다.(물론 고구려가 북방개척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거란을 동원해 북위의 요서 지배를 뒤흔들어 놓는다거나 연해주 방면으로 말갈 경영을 시도하긴 했습니다만 일단은 5세기 말까지 남하정책을 놓고 얘기하겠습니다.) 만만한 게 백제일 수 밖에 없는 거죠. 물론 근초고왕 때 고국원왕이 살해당한 적은 있지만 백제가 강해본 들 북위보다야 강하겠습니까?...라는 단순한 이유도 있는데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의 계기는 4세기 중엽, 즉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 충돌하여 결국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살해되는 시점으로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적인 군사적 충돌도 그렇거니와 장수왕이 개로왕을 참수한 명분도 거기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연원을 따지고 보면 좀 더 올라갑니다. 바로 낙랑군의 존재 때문이죠.

최근 들어 한국 고대사에서 낙랑의 영향력을 너무 확대해서 보는 것이 아니냐는 문헌적, 고고학적 문제제기도 있고 일정부분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낙랑의 영향력을 한국 고대사에서 제외한다면 뭔가 얘기가 안맞게 돌아가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낙랑이 가진 당시의 지정학적 위치라거나 낙랑의 경제력과 구성원, 그리고 주변의 제 세력과 맺은 정치적 관계라던지.. 이것저것 여러가지 이유로 고구려와 백제가 낙랑에 대해 갖는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그럼 고구려는 왜 낙랑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낙랑의 지정학적 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대동강 유역의 생산력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게 있습니다. 바로 5호 쟁란으로 인해 발생한 한족계 이주민의 문제입니다. 5호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나 백제같이 막 전제 왕권을 구축해나가고 국가형태를 정련해가는 입장에서 그런 경험의 노하우를 먼저 가졌던 문명 사람들을 포획하여 전제화나 정치체계에 대한 지혜를 얻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이죠. 물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 관련 생산기술의 확보와 순수한 생산력 자체, 혹은 왕실세력에 대한 번병으로서의 확보도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의 '인적 자원' 확보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 한족계 이주민, 혹은 한족화된 원주민 세력을 고구려는 2개 방면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한쪽은 요동방면이었고, 다른 한쪽은 낙랑방면(낙랑지역은 5호 쟁란으로 유입된 인구 외에도 한사군 때부터 정착, 교류한 인원이 상당수 있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요동지역은 모용선비와의 충돌로 그것이 쉽지 않은 형편이었고 실제로 대부분은 고구려보다 모용선비에게 흡수되어 전연, 후연 국가 성립으로 거의 소모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후연을 구성한 한족계 이주민이 북위에 의해 상당량 흡수되고 풍홍이 이끄는 일부분만이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흡수되었죠.  좀 심하게 말하면 방어를 위한 지정학적 위치 확보나 생산력 확대 외에는 실속이 별로 없던 지역입니다. (에레메스님께서 지적해주셨는데 제가 기억력이 개판인데다 고구려사 공부를 못한지 한참 되다보니 사실관계를 잠깐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북연 흡수 했을 때 10만 단위의 인구가 고구려에 흡수되었으니 낙랑에 비해 처진다고 할 순 없죠. 정정해서 말하면 '들이는' 품에 비해 실속이 없다란 얘기가 맞습니다.=>나중에 에레메스님이 십육국춘추에서 풍홍 망명시의 용성 호구가 1만호였다는 걸 보셨다더군요. 이것만 보자면 10만 단위로 왔다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재고의 여지가 있는 셈이죠. 뭐,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에레메스님의 지적이 무효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행렬 80리가 호위병 2만과 용성 내 인구 5만 정도로 되기 어렵다는 점이 그렇고 이때 꼭 용성 내부 인구만 고구려로 왔다는 보장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전부터 유입된 인구까지 치면 낙랑에서 얻을 수 있는 인적자원에 준할 정도는 온 거 같습니다. 거기에 처음의 제 얘기도 제대로 알고 한 얘기는 아니니 일단은 저의 실수이지만요..OTL 어쨌든 들이는 품에 비해 실속이 없었다란 얘기가 적확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낙랑은 경우가 다르죠. 고구려 입장에서는 제 주머니에 있는 제 물건 마냥 쉽게 얻을 수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백제에게는 낙랑만이 한족계 이주민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고 더군다나 낙랑이 가지는 '대중국 무역항로' 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구려보다는 백제가 낙랑과 대방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절실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막 아껴두고 있던 제 주머니의 물건을 꺼내려고 본격적으로 남하를 시도하는 고구려와 낙랑, 대방지역만 보고 있던 백제가 충돌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고 그 결과가 근초고왕의 평양 공격과 고국원왕 살해입죠. 이후의 양국간 구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구요.



자.. 삼천포가 제법 심했지만 그럼 발해는 어떨까 따져보겠습니다. 기후 문제에서 따져보면 발해 초기에는 고구려와 상황이 반대입니다. 점점 추워지던 3~4세기와 달리 7세기 말부터 점점 따뜻해져간 당시 기후는 8~9세기에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이 당시 얼마나 날씨가 따뜻해졌는지 눈으로 알 수 있는 자료를 한번 찾아보죠. 처음에 저는 이 기사보고 정말 깜짝 놀랐었습니다.

러 아무르강 유역서 발해유적 발굴' 




이 기사와 인용한 지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발해 중심지로부터 굉장한 북쪽임에도 불구하고 발해인의 진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군현과 같은 영토지배라고 까지 할 순 없지만 성을 중심으로 한 거점 지배의 흔적은 보입니다. 일종의 지정학적 요충지 확보를 위한 거점지배일 수도 있지만 그 얘기는 적어도 중심부 쪽으로 지배력이 확고한 부분이 머지 않은 곳에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발해가 아무르 강 유역을 중심으로 개간을 시도하려 한 흔적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이것만으로는 기후가 따뜻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증거를 찾아보죠.

신당서 북적 발해 부분을 찾아보면 발해의 특산품 중에 노성의 벼가 유명하다는 말을 합니다. 비록 노성 지역이 경박호 부근으로 주변지역보다는 좀 따뜻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벼의 북한계를 훌쩍 넘은 지역입니다. 요즘이야 종자개량을 통해서 흑룡강성에서도 벼농사가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옛날엔 어디 그런가요? 물론 발해 전역에 벼농사가 흥했다는게 아니라 노성 지역에서만 '벼'가 재배되니 유명하다라고 한 정도에 지나지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벼가 재배 가능할 정도로 기후가 따뜻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듯 싶습니다.

다른 정황증거도 발견됩니다. 대략 7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까지 삼국사기 기록에서는 천재지변 기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주로 홍수나 가뭄 기사인데 신라 성덕왕 연간에는 백성 구휼을 위해 30만 석의 구휼미를 풀어야만 했다는 기사나 좀 더 이후의 일이지만 기아로 사람을 잡아먹었다, 혹은 초적으로 유랑한다.. 이런 기사가 급증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쪽 사료는 직접 확인하진 못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양쪽에서도 천재지변 비율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이 부분은 제 기억력이 워낙 개떡같은지라 나중에 따로 확인을 해봐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이 시기에 극심한 인구 감소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천재지변이 늘어날까요? 제 생각에는 전반적으로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한 불안정이 기상조건에도 영향을 미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엘리뇨나 라니뇨 같은 이상 기후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적어도 해류의 수온 변화로 강우량이나 장마시기가 극적으로 변한다거나 불안정하다면 천재지변 빈도가 높아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말이 많았는데 아무튼 이 시기가 일종의 온난화 시기인 점은 분명한 듯 싶습니다. 따라서 벼까지는 무리지만 5곡의 재배 가능구역이 북상하면서 토지개간을 위한 영토 확보의 이유로 남하를 해야할 이유는 적어도 발해에게 없었단 얘기가 됩니다. 그냥 북방으로 진출해서 말갈 경영에 집중하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남쪽에 신경쓸 여유가 없지요. 그럼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낙랑지역으로 남하해야했던 이유 중의 하나인 인적 자원 확보 같은 이유는 발해에게 없었단 말인가..  제 생각에는 발해에게 낙랑같은 인적자원 확보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그야 발해는 건국초부터 이런 인적자원을 주변에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7세기 말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은 상당 수준의 국가 체계를 완성한 형편이었고 고구려인들이야 발해가 건국한 구국 지역에 충분히 널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낙랑지역, 즉 평양지역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핵심 인원 20만 명이 당에 끌려간 이후 정치적으로는 공백지가 되어버립니다. 무인지역이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인구밀도가 예전에 비해 심할 정도로 희박해지죠. 인구밀도가 희박하니 경작도 그만큼 제대로 되지 않아 상당한 토지가 황무지화됩니다. (참고 : 발해 수령의 성격과 말갈 3 - 고당 전쟁과 호족 성립의 상관관계)


8세기 즈음에는 항해기술도 그만큼 축적되어버린지라 연안 무역항으로서 낙랑 지역이 가지는 메리트도 이 당시에는 거의 없어집니다. 즉, 별로 먹을만한 게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조건상으로 보면 발해 북방의 말갈인 거주지역이나, 낙랑 방면이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죠. 발해 입장에서는 만만한 게 말갈인이고 군사자원이라거나 특산품(담비가죽같은) 확보도 겸해서 말갈 경영을 하는 것이니 낙랑 방면의 남하정책보다는 북방의 말갈 경영이 선호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제가 글 맨 처음에서 언급한 이유 중에서 경제적인 이유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된 듯 싶습니다. 나머지 이유에 대해서는 글이 길어지니까 여기서 끊고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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