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guanyou.egloos.com/4572278

※이글의 많은 부분은 [박현배의 발해사입니다.]를 참고로 하여 쓰여졌습니다. 


발해의 민족

  
우리는 흔히 5천년 단일민족의 역사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상 한국 역사는 단일 민족사의 역사가 아니다.  현재 우리는 국민과 민족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즉 ethnic group(민족)과 nation(국민)의 혼동이다.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중국일 것이다.  중국의 경우 55개의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국민과 민족의 두 개념을 혼동하는 것은, 고려 이후 중앙집권화 된 국가에서 강력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은 몽고의 침략이었다.  당시에 많은 역사서들이 집필된 이유도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민족을 고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서술한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민족 통합을 강력히 추구하신 분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었다.  세종대왕께서 발명한 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 문화권과 차별성을 둔 것이고, 그 시대 구축되어진 압록강, 두만강의 방어진들은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구분 지어 버리는 벽이 되었다.  특히 이민족의 풍습을 금지시켜 당시 한반도 내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위구르인 및 만주족, 한족들이 조선인으로 동화 되어 버렸다.

  
이처럼 처음부터 韓민족이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수백, 수천의 소수 민족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통합했으며 다시 발해와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한국인과 한민족이 생기게 된 것이다.


발해에는 고구려인, 말갈인 뿐만 아니라 소그드인, 한인, 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다.  9세기 이후 행해진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합 정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단일화된 국민으로서의 발해인이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발해에 살고 있던 다양한 민족이 발해인이라는 국민 속에 동화가 된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자칫 민족이란 단어는 국수주의와 배타성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고구려계인 발해인과 말갈계인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in[발해의 역사]/ 질문자 : ghkdalsgml12 / 답변자 :  corea_blue / 2003-03-20 22:26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A+ic71WXP7cXBJoIl0QBmIJiBWkRvhn3

박현배의 발해사입니다.  / http://www.parhae.org/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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