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hiwoo555.egloos.com/3107122
* 내용에 따라 알기 쉽게 제목을 바꿨습니다. 그림이 사라져서 구글이미지로 검색해 저장 그리고 2배로 확대해서 좀 희미하게 보일 겁니다.
8세기 외계충격가설에 대한 사소한 소회-자유로픈님께 바치는 조공
보론 : 발해 너는 왜 남진 안했니? (1) - 경제적 접근
트랙백한 글에서 간략하게나마 발해 기후사와 북방경영의 상관관계를 당시의 기온 상승을 중점으로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유로픈님이 다셨던 댓글에서 이태진 교수가 8세기의 신라기록을 근거로 외계충격 가설을 이 시기에도 언급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글은 그에 대한 생각을 대강 정리만 해둔 글을 거칠게나마 조금 다듬어서 올린 것입니다. 원래는 한달도 전에 올렸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정리만 해두고 잊어먹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올립니다. 횡설수설이 없진 않지만 난독증 끼가 있는 사람이 글을 쓰다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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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한달 보름 전 발해가 남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소략한 포스팅을 하면서 첫번째 전거로 당시의 기후 변화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발해사 전공자들이 당시의 기후 변화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렇지 기온 상승으로 인한 북방 경영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바이고 견문과 생각이 짧은 본햏으로서도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본문에서 첫번째 전거로 썼다.
그런데 달려진 댓글 중 자유로픈 님이 단 댓글(링크)에 그 논지와 꽤나 상충되는 연구가 있다는 지적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 기후가 변하긴 변했으되 본햏의 논지와는 다르게 지속적인 유성 낙하로 기온 저하가 의심된다는 이태진 교수의 외계충격 가설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외계 충격 가설은 17세기 조선 사회를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만 들어봤지 한국사 전반적으로 기후사 정리를 시도하고 계신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걸 보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해당 기록을 보니 유성낙하로 의심되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고 한파 기록도 꽤 산견된다. 비록 그 기록이 발해(만주)가 아닌 바로 아래의 신라(한반도)의 기록이지만 가장 가깝게 위치한 지역 간 비교이니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전에 본햏은 한파 기록은 단순히 기온 상승으로 기후대가 불안정해서 생긴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기상학 연구도 있기 때문이다.(링크 : 전문가도 예상 못한 이상 기후, 극지역 패러독스)
그러나 지적을 보고 난 후 유성낙하가 한파의 주 원인이라면 단순히 일시적 사건이라고 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변화의 징조로 보이는 기록들에만 주목하고 유성낙하는 별로 주목을 못했다지만 가장 기본적인 사료 내용을 다시 확인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사료를 취합해서 글을 쓴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죄악감도 들었다. 아직도 사료를 다루는 방법이 너무 서투르구나 하고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1. 의아함의 시작
여전히 3류 티를 팍팍 내고 있구나 하면서도 의아함은 남았다. 그럼 발해의 북방경영 흔적은 다 무엇이며, 노성의 벼니 하는 것은 대체 뭐가 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납득할만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답글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상 매커니즘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회피성 답변을 하는게 고작이었다. 제대로 궁금증이 돋으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기괴한 편집증 끼가 있던 본햏은 어지간하면 귀차니즘으로 무마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잘 안되어 구할 수 있는 자료를 통해 궁금증을 해소해보고자 했다. 동시기 인근 지역의 기후사를 알아보면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중국 기상학자 유소민이 쓴 '기후의 반역'을 동네 시립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한 것이다.
시립도서관에 가보니 그 책은 보존서고에 있어서 찾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답변을 듣고 가지고 올 시간 동안 다른 책을 참고하기로 했다. 마침 찾은 책은 서양쪽 연구자가 유럽을 중심으로 기후사를 정리해놓은 책이었다. 읽다보니 좀 이상하다.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에 유럽은 꽤 심한 기온 하강기였다. 뭔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수 세기에 걸쳐서 지역별로 기온 등락이 극심한 차이가 나는 것은 적어도 그때까지의 본햏의 상식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보고 난 뒤에 일단 내린 결론은 그 시기에 유성낙하의 빈발로 전 지구적인 기온 하강에 더 가능성을 두고 발해 기후사 사례의 특수성을 고려하거나 아니면 연구 결론 자체를 의심해야하는 형국이었다.
'그럼 내가 뭘 단단히 잘못 알고 글을 싸지른 것인가' 라며 뭔가 혼란에 빠져 있던 찰나 보존서고에서 기후의 반역을 찾았다는 사서 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책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뒤져보니 유소민의 연구에서 발해가 존재한 동시기 중국의 기후 기록은 현재보다 기온이 높았던 것으로 결론이 나왔다. 뭔가 안도감이 들면서도 또다른 혼란에 빠졌다. 그럼 내가 본 그 시기의 서양쪽 연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기온 등락이 전지구적으로 일괄적이지 않고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가? 그리고 유성낙하 기록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유소민의 연구에서는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것이 그 책은 사료모음집과 그 해석의 성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책을 꼼꼼히 읽어볼 여유가 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런데 마침 천행으로 그 전에 찾아둔 서양쪽 기후사 연구서 말고 동양쪽 자료를 모아놓은 얇은 책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제목은 '호랑이가 말하는 중국사' 란 책으로 엄밀히 말하면 기후사 연구라기 보다 호랑이를 통해 본 환경생태사 연구서다. 관련 연구로서 기후 변동을 소략히 다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책에서는 그 두 가지 의문을 충분히 풀만한 언급이 있었다.
2. 기온등락의 괴이한 메커니즘
첫번째 의문으로 동시기 서양과 동양의 기온 등락 차이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기온이 변화하면 기후대도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는 동시에 전 지구적 등락이 전제되진 않는다. 대기의 대류변화가 꽤 복잡한 메커니즘에 의해 지역별로 변수가 많이 생기곤 하기 때문이다.(같은 위도라도 내륙과 해안, 대륙과 섬은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열의 차이가 발생한다. 육지는 바다에 비해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 이른바 '열용량'이 작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대기 대류 차이로 귀결된다. 해륙풍의 원리를 생각하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극지역 패러독스 기사 참조)
이런 변수는 해수의 대류, 즉 해류 변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며 오히려 해류 변동으로 인한 변수가 대기의 대류 변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해류나 대기 대류 메커니즘은 복잡계 과학에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분야에 속한다.) 즉, 상대적으로 동아시아보다 위도가 높은 유럽이 비슷한 기온일 수 있게 열에너지를 공급해주던 멕시코 만류는 기온 등락 변화로 인해 그 열에너지 공급체계가 다르게 변화될 수 있고 고로 동아시아가 따뜻할 때 서유럽은 춥고 혹은 경우에 따라 그 반대의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랑이 책 내용을 인용한다.
멕시코만 해류는 대서양 북쪽바다에서 바다 밑바닥으로 사라진다. 북해의 주변이 한랭하면 빙하가 발달하고 대륙에서 유입된 담수의 양이 감소한다. 또한 바다가 결빙하는 곳도 있고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높아지기도 해 이 가라앉음이 현저하게 된다는 연구가 있다. 해수의 가라앉음이 현저하게 되면 바다 '표면'의 해수를 보충하기 위해 보다 많은 해수가 멕시코 만에서 북상해 유럽의 중간 위도지대는 오히려 기온이 상승한다. 아마도 이러한 해류의 영향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에서 기후변동의 차이를 초래했을 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전 지구적으로 한랭화 시기를 겪을 때 서유럽은 되려 온난해지고 온난화 시기에 서유럽은 추워진다는 얘기가 된다. 즉, 서유럽쪽의 기온 등락 변화 양상이 특수한 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변수를 미시적으로 적용하면 같은 동아시아 권이라도 지역에 따라 기온 등락 변화 양상이 미묘하게 시기 차이를 겪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도 된다.) 설명을 듣고보니 간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세기 정도의 차이가 벌어질 정도라고 생각하긴 어렵지 않겠나 싶었는데 그 책에서 실어 놓은 서유럽과 중국쪽 기온 등락 대조표를 보니 그런 일이 꽤나 비일 비재했던 모양이다. 역시 사람은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서 상상력이 빈약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3. 기록의 맥락
첫번째 의문은 풀었고 남은 의문인 유성낙하, 한파 기록과 기온 상승의 모순을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풀어보자. 일단 유성 낙하 기록은 변치 않는 상수라고 봤을 때 기온 상승의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도 기록 분석으로는 기온 상승으로 나온다. 그럼 기록 해석상의 오류는 없지 않았을까? 일단 '호랑이가 말하는 중국사' 책에서는 기후 기록을 분석한 자료 외에 꽃가루 화석과 나이테 화석 분석도 동반해서 분석하고 있는데 기록 분석과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물론 1세기 정도의 차이는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 호랑이 책은 재밌는 표현을 쓰고 있다.(이 얘기는 아래에서 언급한다)
그림 상단의 쥬구센 표는 중국 기록을 분석함
하단은 화분 화석 분석(추위에 강한 종과 약한 종의 비율 분석)을 통한 기후 추정
기온 상승과 유성낙하는 아마 상수일 것이다. 어쩌면 유성 낙하로 전체적인 기온은 하강했지만 쿠로시오 해류 유량에 변화가 생겼거나 주변 한류에 영향이 생겨서 동아시아 기온이 상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온 등락의 원인에서 유성낙하는 후보군에 있을 뿐이고 어느 정도로 지속되어 기온 등락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 해안은 서유럽보다 해류 영향을 덜 받는 지역이고 상대적으로 위도도 낮아(그래서 해류 영향이 유럽에 비해서 기온 등락에 영향이 덜 미치는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이 극심한 기온 등락차는 전지구적인 기온 변화가 기온 하강이 아닌 기온 상승이 주가 되고 서유럽쪽의 기온 하강이 되려 특수한 것이 아니겠나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럼 기온 상승이 당시의 전지구적 추세에 가깝다라고 한다면 동아시아에서 유성낙하에 의한 기온 하강 효과는 꽤나 일시적인 수준으로 밖에 미치지 못한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꽤나 한파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기록에서 꽤 많이 보여진다. 이 잦은 한파를 기온 하강 추세의 징후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기온상승 추세의 시기에 한파 기록이 이토록 많은 이유가 뭘까? 여기에 대해서 후술한다고 한 호랑이 책의 표현을 인용한다.
인간은 '일시적'인 변화에는 민감하지만 인간의 세대를 뛰어넘는 '오랜 시간'의 변용에는 의외로 둔감한 존재다. 기후가 한랭화되기 시작했을 때 식생은 아직 변화하지 않았지만 인간은 이 기후변동의 '징조'를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당연히 따뜻한 시기에 갑자기 이례적으로 한파가 급습하면 인간은 놀랍게도 기록으로 남긴다. 반대로 한랭기부터 온난기로 이행하는 때에는 우선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식물이 성장하는 시기에 평균기온은 완만하게 올라간다. 더운 계절이 조금 더워지게 되어도 인간은 좀처럼 감지할 수가 없다.
그 말 그대로다. 사람은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다분히 맥락적이다. 전반적인 동아시아의 기온 상승기에 우연히 찾아온 잦은 유성낙하가 일시적으로 잦은 기온 하강을 일으켰고 따라서 온난 시기임에도 한파 기록은 늘어났다. 그러니 한파 기록 빈도가 늘어났다고 곧바로 기온 하강 추세 징후로 읽는 것은 꽤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한다. 빈도가 늘어났다고 곧 추세가 되진 않기 때문이다. 단지 '발견'이 일부 되었을 뿐... 화분과 나이테 연구를 통해서도 발해 시기의 만주와 한반도 기후가 지금보다도 따뜻한 시기인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 싶다.
4. 외계충격 가설에 대한 사소한 회의
자유로픈님이 언급하셨던 이태진 교수의 연구에서 7~8세기의 사례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하신 것인지는 그분의 연구를 보지 못해 확언하기 어려우나 그가 17세기 외계 충격가설에서 언급했던 유성낙하로 인한 기후 하강 추론의 맥락을 7~8세기에도 동일하게 적용한 것이라면 아마도 기후 하강을 전제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전제 하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한다면 발해가 존속한 시기에 한해서 당시 한반도 기후에 대한 이태진 교수의 연구는 실수 내지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거 같다.
유성낙하 자체로 인한 민심 이반은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의 천재지변이 유성낙하 상의 분진으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상 요건이 주가 되어 발생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기온 상승으로 인한 대기조건 불안정으로 발생한 천재지변도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삼국사기 신라 기록에서 유성기록 빈도가 다른 시기보다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기상조건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정도로 유성우의 빈도나 분진량이 유의미할 정도로 늘어나고 '지속된' 것인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17세기의 그것도 '의심'은 할 수 있을 지언정 유의미한 근거가 될지는 데이터 부족으로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때문에 유성낙하로 인한 '지속적'인 한파로 생산성 악화를 논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주변지역의 식생분석은 기온상승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한파 발생은 지엽적 현상에 지나지 않고 원인조차도 지금으로써는 무엇이 원인인지 확언하기 어렵다.
[추가 : 아래 댓글에서 들꽃향기님이 언급하신대로 유성낙하로 인한 기온 하강을 말하려면 알바레즈가 공룡멸망 원인으로 제시한 유타칸 반도 운석 크레이터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8세기와 17세기가 과연 그러한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운석 크레이터를 남길 정도의 대형 운석이 아니라 유성군으로 인한 분진을 개연성으로 말한다면 분진량이 지속되게 유성이나 소형 운석이 지속적으로 낙하했어야 했을텐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천인상관적 사고관이 있던 그 시대에 사회가 지속되고 증폭되는 공포 앞에서 과연 유지가 되었을까? 적어도 서유럽 지역에서는 단순히 말세 운운 정도가 아니라 하르마게돈을 언급했을지도 모르겠다. 즉, 유성낙하가 당시에 다른 시기보다 빈도가 상당히 증가했겠지만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잦고 지속적으로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산성 악화가 유성 낙하 분진으로 인한 지속적인 한파, 즉 기온 하강이 아니라 [기온 상승->특정 지역의 대기 불안정->잦은 천재지변]의 여파로 발생한 것이라면 주변 지역에서는 몇가지 '조건의 차이'로 되려 생산성 상승이 벌어지는 현상도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발해와 신라의 위도 차이와 대륙과 반도라는 차이에서 발생하지 않나 생각된다. 때문에 동시기 신라의 생산성 악화로 인한 민심 이반이 우려되던 때 발해의 경우 북방경영을 시도하는 차이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앞의 위험한 발언은 차치하고서라도 7~8세기 한반도 기후에 대한 이태진 교수의 언급은 한국사 분야 전체로 기후사를 언급하면서 주변 지역의 기후사 참조는 덜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커버해야할 범위가 많으니 실수도 그만큼 발생할 빈도가 많은가 보다. 무엇보다 이태진 교수는 조선 후기 정치사 전공자이니 다른 시대사는 아무래도 실수가 없을 순 없을 것이다. 그나마 도서관에서 한시간 가량 책을 뒤적거리니 의문은 어느 정도 풀리게 되어 다행이다 싶다.
아무튼 이번 해프닝을 겪은 후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이용할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겨버리고 말았다.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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