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38&key=20061223.22014205550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1> 대조영 발해 건국지 동모산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1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2>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28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3> 160년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영욕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2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4>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3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4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4>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日·唐과 교류 활발… 신라와는 소극적
중국 흑룡강성·몽골 등서 온돌유적 발굴
거란에 망한뒤 유민들 흩어져 생활한 듯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글·사진 조해훈 문화전문기자 massjo@kookje.co.kr  
입력: 2006.12.22 21:00 / 수정: 2006.12.22 오후 9:37:00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벽 위. 불을 놓아 억새와 잡목 등을 태우느라 시커멓다. 발해 시기 이 성에서 일본과 신라로 사신들과 무역품 등이 오갔다. 최근 이 곳에서 발해 당시 절터와 온돌 시설 등이 발굴 조사됐다.


▲발해의 대외 교통로

어른 키를 넘는 광활한 억새밭을 헤치며 가는 도중 파란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면서 한참을 가니 드디어 억새밭이 끝나는 곳에 평지가 나타났다. 이 곳에는 불을 놓아 억새와 잡풀 등을 모두 태워 걸을 때마다 옷에 검정이 묻어났다. 곧이어 발굴한 흔적과 성터가 보였다. 크라스키노 성터였다. 중국 지린성 훈춘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통과해 여기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다.

크라스키노성은 훈춘시에 있었던 발해 동경용원부(일명 팔련성) 시기 4주 가운데 하나였던 염주(鹽州)의 주부(州府)였다. 여기서 훈춘까지는 동쪽으로 40㎞,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남쪽으로 200㎞ 거리로 아름다운 포시에트 만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터에서 동해까지는 400m, 바로 눈앞이다. 억새밭 사이로 어른거리던 바다가 한국에서 말하는 동해이다. 발해 시기 이 곳에서 일본으로 사신이 출발하고 도착하던 곳이며, 무역항이었다. 이 성 안과 성 바깥에서 발해 시대 절터와 주거지 터 등이 수없이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이 곳에 사람과 물산으로 넘쳐났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발해사 전공자인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는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당시 일본으로 왕래하던 일본도의 출발지이며, 발해가 일본에 말과 철, 주석을 수출했는데 이들 물품이 모이는 집산지였다"고 설명했다. '신당서' 발해전의 '동경용원부는 일본도이다(東京龍原府日本道也)'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성의 총 둘레는 1200m로 연해주 지역에 있는 체르냐치노성 등 여러 개의 발해 성터 가운데 등 규모가 가장 크다.

건국 초기부터 대외 교류를 활발히 했던 발해는 이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다질 수 있었다. 발해는 대외 교류 루트로 소위 일본도,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을 이용했다. 일본도는 크라스키노 성에서 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가는 길이며, 신라도는 크라스키노 성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가는 길이다. 조공도는 압록강변의 서경압록부를 지나 해로로 산동반도에 이르러 당의 도읍인 장안에 나가는 길이며, 영주도는 육로로 당의 동북지방 거점인 영주를 경유해 장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거란도는 부여부를 지나 거란에 이르는 길이다. 이 밖에 '담비의 길'로 불린, 발해 수도에서 시베리아로 통하는 모피 교역로가 있었다.

일본과의 교류는 727년 발해 2대 무왕 대무예가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시작됐다. 발해는 일본에 모두 34차례의 사신을 파견했으며, 일본도 발해에 13차례나 보냈다. 일본에는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서 쓴 애향시와 그들이 남긴 글 등 각종 자료가 아직 잘 남아 있다. 이를테면 발해 사신 양태사와 왕효렴이 일본에 가서 지은 시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와 '달을 보고 고향을 생각하며'에 보면 머나먼 이국에서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다.

방학봉 옌볜대 교수는 그의 저서 '발해 사절단이 왕래한 항로'에서 당시 발해 사신들이 일본을 왕래하는 데 해를 넘겨야 했으며, 도중에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예로 727년 첫 발해 사절단 24명 가운데 16명이 피살된 것이라든지, 777년 사행 120명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46명만 생존한 것, 왕효렴이 814년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이듬해인 815년 5월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사망한 기록 등이 있다고 한다.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글씨가 적힌 목간이 있다. 여기에 보면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과 함께 귀국한 일본의 오노다모리 일행을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목간에는 '발해사(渤海使)'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좌대신 나가야오의 저택이 있었던 자리에서 출토된 이 목간은 727년 일본에 온 발해 사신 일행이 평경성에 머무는 동안 만들어진 것으로, '발해사'라고 쓴 것과 함께 '교역'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속일본기' 759년 1월 1일조에는 일본이 자신들을 높이기 위해 발해 사신을 '고려번객(高麗蕃客)'이라고 낮추어 기록하기도 했다.

발해는 신라와는 그다지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신라인들도 발해를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국가로 낮춰 보려고 하는 등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해 발해와의 외교에 소극적이었다. 발해와 신라의 공식적인 교류는 대조영이 건국 초기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과 790년과 812년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 거란의 위협을 받고 있던 발해가 신라에 원조를 요청한 것이 전부이다. '삼국사기'는 신라도에는 신라 천정군(오늘날의 함경남도 덕원)으로부터 발해의 책성부(길림성 훈춘시)까지 39개의 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와는 100여 차례가 넘는 교류를 했다. 713년 당이 발해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 도독'으로 책봉했다는 기록 이후,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이 '구당서' 등 중국 사서에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와 같이 발해는 발달된 교통망을 통해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거란의 '요사(遼史)' 돌려불전에 '요 태조는 상경을 함락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라는 기록이 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의 마지막 도성이었던 상경용천부를 천복성으로 바꾼 후 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옮기면서 발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나라를 잃은 발해인들에 대해 문헌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최근 연해주 쪽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발굴 등을 통해서도 발해 멸망 이후 그들의 흔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부소장인 알렉산드로 이블리예프에 의해 겨우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이블리예프는 지난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서쪽 톨강 인근에서 11세기의 말갈 유적을 조사했다. 그 곳에서 발해의 온돌을 발견했던 이블리예프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926년 발해가 망한 뒤 거란에 끌려갔던 발해 유민들이 남긴 것으로 몽골 학자들도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온돌문화를 계승했다는 발해의 온돌터는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의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됐고, 지난 해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도 최대 규모의 발해 온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러시아 학자들이 금나라 유적으로 추정하는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강 인근에 위치한 니콜라예브카 성터에서 발해의 기와 등이 발견돼 이 성에 발해인들이 계속 살았다는 해석을 내놓은 정도이다.

기자는 중국 지린성 훈춘시 팔련성을 거쳐 인근에 있는 비우성을 찾았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쌓은 성으로 추정되는 이 성을 볼 때도, 발해가 망한 후 중국과 러시아에서 더 이상 발해인들의 흔적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다. 발해 관련 학자들의 주장대로 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한 이후 그들에 의해 끌려갔거나, 고려로 망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란과 금나라 등 발해 뒤에 세워진 나라들에 서서히 동화돼 갔던 것은 아닐까. 



# 이블리예프 극동 역사연구소 부소장

- "연해주 유적 발굴성과로 볼때 발해는 중국과 대등관계 유지"



"1980년대부터 크라스키노에서 성터 등이 발굴조사됨으로써 연해주의 발해 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발해의 수도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와 가까운 이곳에 있었던 성의 규모가 밝혀지고, 성 바깥 유적에서 각종 유물과 유구가 하나하나 조사됨에 따라 일본도와 신라도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였던 이 곳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블리예프(사진)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부소장은 이 같이 설명했다. 그는 특히 이 곳의 사원 바깥 유적에서 온돌이 설비된 주거지들이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연접 축조된 것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역에 발해인들이 오랜 기간 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또 우물 안에서 거란의 토기가 발견됨에 따라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이 지역에 짧은 기간이나마 존속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까지 거란이 직접 지배방식을 취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지역에서 10기 이상의 기와 가마터와 기와로 쌓은 지하창고, 기와로 쌓은 사원의 기단 등도 발굴 조사됨에 따라, 이 지역에 살았거나 일본과 신라에 왕래했던 사절단, 무역상 등 일시 거주했던 발해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파악하는데 좋은 지표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블리예프 교수는 "아직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에서 발해 멸망 이후의 유적이 나오지 않지만 발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고 있는 동북공정을 의식해서인지 "특히 일본에 보관돼 있는 자료들을 볼 때 발해는 중국과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아 취재했습니다.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발해의 수도 이전 관련글
발해 5경의 이동배경과 그 의미 - 신형식  http://tadream.tistory.com/296
발해의 수도 이전  http://tadream.tistory.com/297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