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0450.html
[1919 한겨레] 동경 이광수·경성 최남선 ‘독립선언문’ 집필
등록 :2019-01-30 07:39수정 :2019-01-30 07:48
기미년통신 개시 ④독립선언문
이,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위원, 집필 마치고 내달 발표 예정
최 “조선 사람의 참 마음 전달” 흔쾌히 국내 선언문 작성 맡아
홍명희 소개로 만난 두 수재, 한중일 오가며 10년 넘게 교우
최의 잡지 「소년」에도 이름, 독립운동 최전선에 나란히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1월29일 경성/엄지원 기자]
조선반도 안팎에서 독립선언을 공표하려는 움직임이 비상한 와중에, 이 뜻깊은 선언문의 대표 집필자로 꼽힌 이들의 면면이 더욱 시선을 끈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앞장서 독립선언 준비를 시작한 일본 동경에서는 조도전(와세다)대에 재학 중인 청년 문필가 이광수(27)씨가 집필을 맡았고, 근래에 종교계에서 착수 중인 국내 독립선언문의 집필자로는 저명한 문필가이자 출판업자인 최남선(29)씨가 내정됐다. 두 사람은 현재 고향 충북 괴산에서 지내는 홍명희(31)씨와 더불어 ‘조선 3대 천재’ 혹은 ‘동경 3대 천재’라 불리는데 상해와 동경과 경성을 오가며 10년 넘게 교우한 동시대 세 천재의 인연 또한 각별하여 향후에도 인구에 자주 회자될 듯하다.
29일 동경의 소식통들에 따르면 오는 2월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될 독립선언서 집필을 이미 마감한 이광수씨는 30일 상해행 배에 몸을 실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11명의 대표위원 가운데 한명이지만 동경의 진행 상황을 상해에 타전하라는 동지들의 당부를 받아안고 발길을 돌렸다. 조선에서는 최씨가 “조선 사람의 참마음 참뜻을 가장 정확하게 발표할 선언서를 내가 담당하는 것이 옳겠다”며 과업을 받아들었다. 독립선언에 ‘자중론’을 펼쳐왔던 최남선씨가 심기일전하여 흔쾌히 나선 것은 두살 아래 후배인 이씨를 의식한 탓이라는 후문도 있다.
두 수재의 인연은 무려 12년 전인 정미년(190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년 이광수의 나이 15세, 최남선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일찌감치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두 사람은 ‘미국에서 온 조선 청년이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차 갔다가 한자리에서 마주쳤다. 당시 연설에 나서 두 소년의 가슴을 뛰게 했던 ‘청년’은 현재 미국 대한인국민회 회장인 안창호(41)씨인데, 여전히 두 사람은 안창호씨를 마음의 선생으로 여기고 있다고 전해진다.
먼발치에서만 마주쳤던 이광수와 최남선이 서로를 대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홍명희의 소개를 통해서라고 한다. 홍씨는 이씨보다 4살이나 많지만 동급생이었다. 셋은 기질만큼이나 배경도 달랐다. 세 사람 가운데 집안이 가장 좋은 축에 들고 학문에 소양이 깊은 이는 홍명희지만 현감을 지낸 그의 부친이 경술년(1910) 강제병합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중인 계급인 최남선의 집안은 약재 무역 등으로 큰돈을 벌어 사대문 안에 80채가량의 집과 대지를 소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최씨가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열살 나이에 부모를 모두 콜레라로 잃은 뒤 고아로 자란 이광수에게 뛰어난 학식을 가진 두 벗은 이후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최남선이 펴낸 잡지 <소년>에는 홍명희와 이광수 정도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고, 이광수가 서울에 들를 때면 최남선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가 상해에 머물 때 가장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준 이는 홍명희였다. 이러한 세명의 수재 가운데 두 사람이 기미년(1919)에 이르러 독립운동의 최전방에 서게 됐으니 운명이라 할 만하다.
♣ 고향인 괴산에서 집안을 돌보고 있는 홍씨는 비록 지금은 뒤로 물러나 있지만 오는 3월 괴산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이끈다. 이광수와 최남선, 두 벗이 ‘학도병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가가 되어 변절할 때에도 홍명희는 순국한 부친의 가르침대로 절개를 지킨다.♣
△참고문헌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솔·1999)
류시현, <동경삼재>(산처럼·2016)
강영주, <벽초 홍명희 평전>(사계절·2004)
현상윤, <기당 현상윤 전집>(나남출판·2008)
이광수, <나의 고백>(우신사·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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