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100_0030_0020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
영성자성 위치도
영성자성 위성사진
※ 주) 英城子村이 아니라 营城子村으로 검색해야 위성사진과 같은 위치로 검색된다.
참고 :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412983 http://3joko.com/goguryo/anshi1.asp
https://blog.naver.com/dafuyou/221369833195 https://blog.naver.com/jungyoupkim/221365281457
형태사항
둘레 2,472m(富品瑩·吳洪寬, 1994; 王綿厚, 2002; 魏存成, 2002; 王禹浪·王文轶, 2008);
3㎞(島田好, 1926);
4㎞(東潮·田中俊明, 1995;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4.5㎞(林直樹, 1994);
5華里(陳大爲, 1995);
8里(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孫進己·馮永謙, 1989; 王綿厚, 1994; 李殿福, 1994; 馮永謙, 1997);
10里(金毓黻, 1941)라는 기록이 있음.
총면적 45만㎡(营口市博物館, 2000)라는 기록이 있음. 7점
출토지 : 요녕성 안산시 해성시 팔리진 영성자촌(辽宁省 鞍山市 海城市 八里鎭 英城子村)
조사내용
1926 도전호(島田好) 8월, 산성을 발견함. 『滿蒙誌』에 발표함.
1928 팔목장삼랑(八木奘三郞) 1928년 11월 7일 조사함. 1929년 「海城近傍の英城子」『續滿洲舊蹟志』, 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 발표함.
1934 금육불(金毓黻) 겨울에 조사함. 화살촉, 철제 솥, 당천(唐泉) 등을 발견함. 1941년 『東北通史』에 발표함.
1958 이문신(李文信) 4월 조사.
1964 안산시인민정부(鞍山市人民政府) 1964년 5월 안산시인민정부(鞍山市人民政府)로부터 시급중점문물보호단위(市級重点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1981 왕면후, 염만장(王綿厚, 阎萬章)
1992 임직수(林直樹) 1992년 5월에 조사함. 1994년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5에 발표함.
1993 임직수(林直樹) 1993년 5월에 조사함. 1994년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5에 발표함.
1994 부품영, 오홍관(富品瑩, 吳洪寬) 1994년 4월 조사함. 1994년 「海城英城子高句麗山城調査記」『遼海文物學刊』1994-2에 발표함.
2007 왕우랑, 왕문일(王禹浪·王文轶) 2007년 6월 17일 조사. 2008년 『遼東半島地區的高句丽山城』, 哈尔滨出版社에 발표함.
2007 요녕성급문물보호단위(遼寧省級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구조 특징
포곡식산성으로 형태는 전체적으로 불규칙한 장방형임. 금육불(金毓黻, 1941)은 타원형, 진대위(陳大爲, 1995)는 원각장방형(圓角長方形), 영구시박물관(营口市博物館, 2000)은 너비가 서쪽이 넓고 동쪽이 좁은 사다리꼴형이라고 기록함.
성벽은 산성 동, 북, 남 세 면의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꼭대기에 흙을 다져서 축조함. 왕면후(王綿厚, 1994)는 돌로 쌓았다고 기록함. 도전호(島田好, 1926)는 기초는 돌로 쌓고, 벽심은 흙과 돌을 섞어서 채운 다음, 위에는 흙을 덮었다고 기록함. 임직수(林直樹, 1994)는 양 측면에 돌을 쌓고 그 안에 흙과 돌을 채워 넣었으며, 그 위로 흙을 덮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축조방법은 무순 고이산성 동성 남문 서측에서도 보인다고 함. 팔목장삼랑(八木奘三郞/야기 쇼자부로, 1929)은 하부는 토축이고, 그 위에는 불규칙한 절석(切石)을 놓았으며, 그 위에 흙을 덮었다고 기록함. 일부 성벽에서는 7~8㎝의 두께로 흙이 다져진 층을 볼 수 있음. 일부는 험준한 산등성이를 천연 성벽으로 이용하고 성벽을 축조하지 않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벽 표면은 풍우(風雨)로 무너졌고, 나무가 성벽을 덮고 있으나, 인공적으로 축조한 성벽의 흔적은 아직도 명확하게 남아 있음.
서벽은 지세가 비교적 낮고, 대부분 인공적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길이는 488m임(富品瑩吳洪寬, 1994). 营口市博物館(2002)은 300m로 기록함.
수구문(水口門) 남쪽~서남모서리의 요망대(瞭望臺)까지의 성벽구간은 길이가 134m, 높이가 12m임. 자연암석을 기저부로 삼았고, 정상부의 너비는 1.5m임. 이 성벽 구간은 수구문과 가까운 성벽 바닥부가 거의 자연 산등성이로, 암석은 동서방향으로 단열층을 이루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차 낮아짐. 윗부분은 운모암 풍화토로 쌓았고, 다져진 층은 보이지 않음.
수구문~서문 구간의 성벽은 길이 100m, 정상부 너비 6m임. 이 구간 성벽 남북 양단(兩端)인 수문과 성문 근처 성벽은 다른 부분에 비해 벽체가 두터운데, 너비가 29.5m에 달하고, 흙으로 다져진 층의 높이가 8m임. 이는 서문과 수구문에 견고함을 더하고자 한 것임. 흙으로 다져진 층은 매우 정연한데, 매 층의 두께는 7㎝임. 흙으로 다져진 층의 정상부에는 약 6m의 회갈색 흙이 쌓여 있는데, 다져진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2차적으로 축조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됨. 이 구간 성벽 정상부는 농민들이 계단식 밭으로 개간하였음. 원래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벽 정상부의 너비도 알 수가 없음.
서문~서북 모서리의 요망대까지의 성벽구간에서는 흙으로 다져진 부분이 명확하지 않음. 토질은 산 안의 운모암 풍화토임. 길이는 190m, 높이는 13m, 현재 남아 있는 정상부의 너비는 1.5m임.
원래는 서문 외벽 기단부에 돌로 쌓은 성벽면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졌음. 돌은 일반적으로 쐐기형 혹은 사다리꼴형이고, 크기는 대체로 30×20×50㎝, 40×25×60㎝임. 원래 그 바깥에는 높이 20m 정도의 흙으로 다져진 층이 있고, 바깥으로 석벽이 있었는데, 높이는 1.6m이었다고 함. 현재 바깥에 있는 석벽은 보이지 않음. 흙으로 다져진 층은 현재 5m 정도임.
북벽의 길이는 693m임(富品瑩·吳洪寬, 1994). 营口市博物館(2000)은 1,000m로 기록함. 성벽 외측은 경사가 험하고, 해발은 130~170m임. 서북모서리~북문 구간은 길이 368m, 기단부 너비 약 4m, 정상부 너비 1m임. 북문~동북 모서리의 요망대 구간은 길이 318m, 기단부 너비 2~4m, 높이 3m, 정상부 너비 1m임. 이 구간의 성벽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음. 성벽 외측의 경사는 험준하고, 해발은 130~170m임.
동벽의 길이는 302m임(富品瑩·吳洪寬, 1994). 营口市博物館(2000)은 100m로 기록함. 동북 모서리의 요망대~동문 구간은 길이가 223m임. 동문~남부 성벽 활구(豁口)구간은 길이가 141m임. 동문~남부성벽과 동부성벽의 결합부까지는 79m임. 인공적으로 축조한 성벽의 높이는 3.3~5m임. 정상부의 너비는 동남쪽의 높은 지대를 제외하고 1.5m 정도이고, 기저부의 너비는 5.5m임. 성 외측 경사는 가파르고, 해발은 160~170m임.
남벽은 남부 성벽 활구에서 서남 모서리의 요망대에 이르는 구간으로 길이는 920m임(富品瑩·吳洪寬, 1994). 王禹浪·王文轶(2008)은 980m, 营口市博物館(2000)은 800m로 기록함. 성벽 높이는 1~5m, 기저 너비는 약 5.5m, 정상부의 너비는 1m임. 성벽 높이의 기복은 비교적 차이가 큰데, 가장 높은 곳은 5m, 가장 낮은 곳은 1m에 달함. 성벽 외측 경사는 매우 험하고, 해발은 약 60~150m임. 성 내측은 평평하고 완만함. 1994년 4월 조사에서 길이 200m의 회곽도가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과수원으로 개간됨. 보존 상태는 북벽과 동벽에 비하여 양호하지 않음.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八木奘三郞(1929)은 성을 내, 외성으로 구분하였음. 임직수(林直樹, 1994)는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외성으로 파악하면서, 외성, 내성의 관계를 고이산성 서성, 동성과 유사하다고 봄. 외성, 내성의 결합지점에는 치모양의 평탄한 면(角臺)이 있는데, 평탄면 끝에 외성 성벽이 그대로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함. 외성이 평지와 접해지는 부분에는 성벽과 성문이 있었다고 생각하였고, 택지, 학교, 밭이 들어서서 없어졌다고 기록함.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북벽 바깥에서 서쪽으로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축조한 성벽이 있는데, 산 아래까지 이어져 초철하(炒鐵河)에서 끝남. 높이는 1~3m, 너비는 약 4m, 길이는 약 500m임.
성문에대해서는 성문의 수와 관련하여 동, 서문 2개(王綿厚, 2002; 王禹浪·王文轶, 2008), 서, 북, 동문 3개(富品瑩·吳洪寬, 1994; 여호규, 1999; 魏存成, 2002). 陳大爲(1995)는 3개라고만 기록함. 동조·전중준명(東潮·田中俊明, 1995)은 서북, 동북, 동남문 있다고 기록함. 임직수(林直樹, 1994)는 서문, 북문, 서남문이 있다고 기록함.
동, 서, 남, 북 4개(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李殿福 1994; 馮永謙, 1997; 营口市博物館, 2000;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王禹浪·王文轶·王宏北, 2010)라는 기록이 있음. 팔목장삼랑(八木奘三郞/야기 쇼자부로, 1929)은 수구문과 활구를 성문으로 보고 5개로 기록함.
서문은 서벽 중간에 있는데, 방향은 270°로 성의 정문임. 성벽토가 허물어져서, 성문의 원래 너비를 알 수가 없음. 서문 외벽 기단부에는 돌로 쌓은 벽이 있는데, 대부분 허물어져서 돌들이 안팎으로 흩어져 있음. 돌은 쐐기형 혹은 사다리꼴모양으로, 크기는 대체로 30×20×50, 40×25×60㎝임. 1958년 조사에서는 서문 바깥 우측에 높이 20여m의 다져진 흙층이 있었다고 함. 다져진 층의 두께는 3~5㎝임. 바깥은 석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높이는 1.6m이었다고 함. 성문 자체에서는 옹성구조를 발견할 수 없으나 서문이 위치한 토벽이 골짜기 입구 안쪽에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옹성구조라고 할 수 있음. 즉 수구문 남쪽과 서문 북쪽의 산등성이가 토벽 바깥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면서 토벽과 그 양단의 서문·수구문을 감싸는 형세를 이루고 있음. 이는 요하유역 고구려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자연지세를 이용한 함입형(陷入形; 內凹式) 옹성구조임(林直樹, 1994; 여호규, 1999). 성 안 임국향(任國卿)의 집에서 서문 문둔테석이 발견되었는데, 장방형이고, 길이는 80㎝, 너비는 50㎝, 두께는 24㎝임. 중간 한 측면에는 16×16㎝의 요형(凹形) 착갱(鑿坑)이 있음.
동문이 있는 지점은 정동쪽이고 가장 높은 지점으로 뱡향이 90°이고, 문 양끝 사이의 거리는 현재 7m임. 내요식의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음. 동문지는 큰 석조(石條)를 깔아 축조하였는데, 지역 주민에 의해 파괴됨. 축조방법은 고이산성 성문과 유사함. 동문과 서문과의 거리는 약 1㎞임. 풍이창·손진기·풍영겸(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과 풍영겸(馮永謙, 1997) 등은 2餘里라고 기록함. 그리고 남문을 설정하면서, 남·북문의 거리를 1餘里로 기록함.
북문은 북벽 중간에 위치하며 방향은 10°이고, 현재 너비는 7m임. 북문 동쪽 근처에 고구려 기와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각루(角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성의 서남모서리, 서북모서리, 동북 모서리, 동남 모서리 등에 요망대가 있음. 네 요망대 가운데, 동남 모서리의 요망대가 가장 규모가 큼. 동남 모서리의 요망대(瞭望臺)는 동문에서 남측으로 3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함. 요망대의 서벽은 성벽과 연결되어 있음. 높이는 동벽보다 2.65m 정도 높음. 장체(墻體)는 인공적으로 축조하였음. 내측 높이는 5.95m이고, 외측은 높이가 17m임. 요망대 정상부는 평평하고, 사다리꼴인데, 외벽은 길이가 26m이고, 내벽은 너비·길이가 42m이며, 양허리부분은 각각 30m임. 토질은 운모암 풍화토인데, 다져진 층의 밀도는 비교적 작음. 요망대 외측 기저의 길이는 약 40m임. 현재 요망대 정상부에는 남북방향으로 7층 계단밭이 개간되어 있음. 주변에 고구려 기와가 흩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적갈색의 복선 연화문와당도 출토되었다고 함. 지역주민들은 이 곳을 점장대(点將臺)라고 부르고 있었음(林直樹, 1994).
서벽 내측 경사진 면에 장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장대 근처에서 기와편이 출토됨.
서문의 남쪽에는 틈이 나 있는데, 성 안에 산수가 밖으로 흘러 나가는 주요 수구문임. 방향은 255°이고, 현재 너비는 약 40m임. 수문 남측 성벽은 자연암반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고, 북측 성벽은 황토를 다져서 축조함. 북측 성벽은 계곡물에 의해 상당 부분 유실됨.
활구는 남벽에 위치하는데, 동남모서리 고대(高臺)와는 69m 떨어져 있음. 과거에 일부 학자는 남문으로 보기도 하였으나(八木奘三郞, 1929), 활구양단 사이의 거리가 서·북·동문의 너비와 같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남문으로 보기 힘듦(富品瑩·吳洪寬, 1994). 방향은 155°, 기본 너비는 5m, 높이는 2m, 활구의 현재 너비는 4.5m 임.
1994년 4월 조사때 남벽에서 길이 200m의 회곽도가 발견됨. 현재는 과수원으로 개간됨.
치는 도전호(島田好) 등이 조사하였을 때, 성벽 바깥에 치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움.
건물지는 총 3가지 유형이 있음. 첫 유형은 수구문에서 서북방향으로 70m 떨어진 지점의 농가 뒤에 움푹 들어간 구덩이로 구덩이 안에서 방형 주춧돌이 발견되었는데, 변의 길이는 0.9m, 두께는 0.28m임. 구덩이의 동서 길이 50m, 남북 너비 30m의 범위 안에 많은 홍색, 회색의 평기와편이 흩어져 있음. 과수원과 경작지를 정리했을 때, 대형의 건축자재가 발견되었다고 소개되었고, 용봉문(龍鳳文) 로 장식된 회색의 용마루 장식부재(房脊構件)가 출토되었다고 함.
둘째 유형은 성벽 정상부 안쪽 0.4m 지점에는 20m 간격으로 직경 3m의 움푹 들어간 구덩이로, 이러한 구덩이는 산성 대부분에 분포되어 있음. 다만 서벽 성벽 꼭대기는 계단식 밭·과수원 등으로 개간되었기 때문에 구덩이의 흔적을 볼 수가 없음. 북벽과 동벽에서는 구덩이가 매우 규칙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남벽에 있는 구덩이들은 불규칙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일부는 25m, 일부는 30m 간격으로 위치하고 있음. 북벽에서 동쪽으로 꺾이는 동북모서리의 돌출부에 위치한 요망대 북쪽에도 구덩이가 있음. 고구려 군대의 수병(戍兵)주거지로 추정됨. 성내 각지에서 5개 이상의 초석들이 발견되었다고 함(林直樹, 1994).
셋째 유형은 성 안에 돌로 쌓은 원형 건축지로 3곳이 있는데, 수뢰(水牢)라고 불리고 있음(李殿福, 1995; 王禹浪·王宏北, 1997; 馮永謙, 1986; 王綿厚, 2002; 國家文物局, 2009). 서문 안 좌측, 성내 중앙 수구 옆, 성내 서문 안 도랑 좌측 민가 등에 위치함. 성내 중앙 수구 옆에 있는 건축지는 돌로 쌓았고, 깊이 3m, 직경 20여m임(王綿厚, 2002). 길림시 용담산산성의 수뢰, 한뢰(旱牢)와 유사하다는 견해가 있음(李殿福, 1995).
우물은 총 4곳이 있음(富品瑩·吳洪寬, 1994; 魏存成, 2002). 이전복(李殿福, 1995), 왕우랑·왕굉북(王禹浪·王宏北, 1997), 왕면후(王綿厚, 2002),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등은 1개, 풍영겸(馮永謙, 1997)은 10개라고 기록함. 우물 1곳은 수구문(水口門)에서 동북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함. 우물벽은 쐐기형의 돌을 쌓아 축조함. 외구(外口) 직경은 1.2m, 내경(內徑)은 0.7m, 깊이는 7m 이하임. 현재 우물입구는 지역주민들이 시멘트로 발라 개축하였다고 함.
또 다른 우물 한 곳은 서쪽 수구문에서 약 150m 떨어진 임국원(任國園)의 주택에 있음. 주인에 말에 의하면, 우물이 있는지 모르고, 우물을 팠는데, 지표 1m 정도 팠을 때, 정(井)자 모양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대형 목재를 발견하였다고 함. 직경은 1.7m임. 이 우물 북쪽으로 같은 형태의 우물이 2곳이 더 있다고 함.
샘은 성의 안쪽에 있는데,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흘러, 성 바깥으로 나감.
토산 추정지는 성 동남 모서리 바깥쪽에 사다리꼴의 작은 토산으로, 성벽이 축조된 산등성이와 연접되어 있음. 다만 성벽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가 보면, 산등성이가 아래로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은 낮고 편평함. 높이는 성벽보다 2.65m 높음. 정상부에는 아형(牙形) 평대(平臺)와 건물지가 있고, 홍색 기와가 매우 많이 있음. 토산의 남쪽기슭과 서쪽기슭에는 山水가 뚫고 나온 깊은 도랑이 있음. 도랑 내에는 수평 토층이 퇴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퇴적물은 깬돌이 들어간 흙임. 이 같은 현상을 토산이 인공적으로 쌓았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보면서(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李殿福, 1994; 王綿厚, 2002), 당(唐)의 이도종(李道宗)이 안시성 동남모서리에 쌓았다는 토산으로 보기도 함(魏存成,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魏存成, 2011).
반면, 산등성이 정 가운데가 동벽 기단부라고 하면서, 동벽과 그 위의 건축물이 붕괴된 후에 남은 흙덩이로 보고, 인공적으로 축조한 토산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음(营口市博物館, 2000).
출토유물은 금제 고리편, 도, 검, 모, 전두(箭頭) 등의 철기, 회색 승문 벽돌, 홍색 승문, 방격문 암키와편, 연화문 와당(林直樹(1994)는 연화문 와당을 5세기 중~후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함.), 옹(瓮)과 단지 등 토기편, 돌절구, 투석용 석환석, 주춧돌, 명도전, 오수전, 개원통보 등 화폐(개원통보가 가장 많이 출토) 등이 출토됨. 개원통보와 회색 승문 벽돌은 당대의 유물임. 요대의 유물로서는 보습, 호미, 쟁기 등 철제 농기구, 회색 적수와(滴水瓦), 수면문 와당, 집선문 벽돌, 백자편, 치미편, 회색도기편, 불상 등이 출토됨. 산성 각지에서는 금운모(金雲母)가 결입된 편마암계 암석이 분포하고 있음. 금운모는 산성 내 흩어져 있는 토기와 기와에 혼입되어 있음. 토기와 기와의 생산지와 공급처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음(林直樹, 1994).
역사적 의미
위치에 관해서는 3가지 설이 있음.
첫째, 안시성설로 도전호(島田好, 1926), 금육불(金毓黻, 1941), 풍영겸(馮永謙, 1986), 손진기·풍영겸(孫進己·馮永謙, 1989), 진대위(陳大爲, 1995), 부품영·오홍관(富品瑩·吳洪寬, 1994), 위존성(魏存成, 2002),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등이 안시성으로 비정하고 있음. 이 외에도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안시성으로 비정하고 있음. 도전호(島田好, 1926)가 최초로 제기함. 당이래의 성이름이 안시성이었다는 점을 주목함.
금육불(金毓黻, 1941)은 산성이 위치한 산을 보면, 동면은 동북과 동남을 포함해서 산이 이어지고, 서남에도 산이 있으며, 서북에는 작은 산이 있으나 약간 먼 것을 볼 수 있음. 태종(太宗)이 이적(李勣)에게 명을 내려 병사를 거느리고 서령(西嶺)에 진을 치게 한 곳은 해성 서남쪽의 산으로 추정됨.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병사들을 이끌고 산에서 협곡으로 나왔고 태종(太宗)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른 북쪽 산은 성 동북쪽에 포함되어 연이어진 산으로, 주필산으로 추정됨. 또한 교량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다는 점에서, 성 부근에 하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해성의 남하로 추정됨. 즉 영성자산성이 갖추고 있는 형세가 『新唐書』, 『舊唐書』, 『資治通鑑』에서 기록된 안시성과 부합된다고 주장함.
동조(東潮)와 전중준명(田中俊明, 1995)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우회에 들어간 골짜기를 영성자의 동남쪽 석목(析木)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사하(沙河)라고 지적하면서, 실제지형의 사료에 보이는 안시성 지형과 영성자산성이 부합한다고 주장함.
풍영겸(馮永謙, 1997)은 영성자산성은 성바깥 동남부에 보이는 인공적으로 쌓은 작은 토산이 특징적이고 이는 『舊唐書』高麗傳에서 안시성을 공격할 때, 당태종(唐太宗)이 “乃今江夏王(李)道宗築土山, 攻其城東南隅, 高麗亦埤城增雉以相抗”했다는 기록과 부합함. 『資治通鑑』卷198 唐紀에는 당과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과 관련하여 “諸軍急攻安市, …… 江夏王道宗督众筑土山于城东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 士卒分番交战, 日六七合, 冲车砲石, 坏其楼堞, 城中随立木栅以塞其缺. 道宗伤足, 上亲为之针. 筑山昼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顶去城数丈, 下临城中, 道宗使果毅傅伏爱将兵屯山顶以备敌. 山颓, 压城, 城崩, 会伏爱私离所部, 高丽数百人从城缺出战, 遂夺据土山, 堑而守之, 上怒, 斩伏爱以徇, 命诸将攻之, 三日不能克. …… 上以辽左早寒, 草枯水冻, 士马难久留, 且粮食将尽, 癸未, 敕班师.”라고 기록하고 있음. 『資治通鑑』卷198 唐紀에는 또 “李勣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军粮皆在辽东, 今逾安市而攻建安, 若贼断吾运道, 将若之何?”라는 기록이 있음. 건안성은 지금의 개주 고려성산성임. 안시성이 그 북쪽에 있다고 한다면, 해성 영성자산성이 그 위치에 부합함. 이로 볼 때 영성자산성이 안시성으로 추정함.
여호규(1999)는 『漢代』地理志에는 ‘大遼水 즉 遼河 河口 부근에 漢代 安市縣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요하의 변천을 생각하면 대석교시 탕지향보다 북쪽으로 추정됨. 또한 한대 안시현은 평지성으로 추정됨. 그러므로 한대 안시현과 고구려 안시성의 관계와 위치는 분리해서 보는 것이 합리적임. 영성자산성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으로 진출한 다음 새롭게 축조하였다고 파악함.
둘째, 안시성 부정설로 왕우랑·왕문일(王禹浪·王文轶, 2008)이 『新唐書』에는 “夫子行師, 不徼幸, 安市衆十萬, 在吾後, 不如先破之”라는 기록을 통해 안시성에는 군, 민(軍, 民) 10만명이 머물렀다고 하였으나, 해성 영성자산성의 규모는 10만명이 살기에는 부족하고, 3~4만명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함. 영성자산성은 서·북 산세가 편평하고 완만하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산세가 험준하다고 볼 수 없음. 그리고 성벽은 대부분은 흙을 다져서 축조하였음. 그러므로 당군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아내기 어렵다고 추정됨. 위의 기사가운데 “在吾後”란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당시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당태종(唐太宗)이 안시성에 대해 의논할 때, 요동성 혹은 백암성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在吾后”에서 위에 언급한 두 성을 요하 하류의 남부에서 구할 수 있는지는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함. 이로 볼 때,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을 안시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고 주장함.
셋째, 은성(銀城)설로 왕면후(王綿厚, 2002)가 『資治通鑑』貞觀 19년조에는 은성과 후황성(後黃城)이 동시에 보임을 근거로 위치를 볼 때, 두 성 모두 안시성과 서로 근접하였던 것으로 추정함. 『翰苑』卷 三十引 高麗記에서는 은성이란 이름은 은산에서 유래하였고, 은산은 안시 동북 100里에 있었다고 기록 안시성이 해룡천산성으로 추정되는 바, 은성(銀城)은 행룡천산성(海龍川山城) 동북 100여里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해룡천산성과 호각지세를 형성하고 있는 성으로 추정됨. 이로 볼 때,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이 은성(銀城)으로 추정됨. 은산(銀山)은 요녕성 영구, 해성(遼寧省 營口, 海城) 사이이고, 은백색 미광(镁矿)이 많이 생산되어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함.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임직수(林直樹, 1994)가 영성자산성은 안시성으로 비정되는데, 문헌에서 안시성은 645년 기사에 처음 등장하고, 한편 산성 내에서 출토된 와당의 제작연대가 5세기 중~후엽이라고 추정될 때, 바로 이 시기를 상한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함.
부품영·오홍관(富品瑩·吳洪寬, 1994)은 404년 고구려가 선비족인 모용희로부터 요동지역을 장악한 후, 이 지역에 산성들을 축조하였는데, 영성자산성은 이 시기에 축조된 산성으로 토축성으로 무순 고이산성(신성), 심양 진상둔 탑산산성(개모성) 등이 남아 있고, 영성자산성은 위에서 서술한 산성의 기본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음. 이러한 축성형태는 5세기 즈음의 고구려시기 건축수준과 특징을 대표하는 것보고 있음.
여호규(1999)는 현재 영성자산성의 축조시기를 추정할 만한 명확한 자료는 없고, 안시성에 대한 문헌기록도 7세기에 처음 출현하였다고함. 다만, 고구려가 4세기 말~5세기 초경에 요동평원으로 진출하였고, 산성 내부에서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와당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늦어도 5세기 중반에는 축조되었다고 추정함.
영성자산성의 특징은 여러 측면에서 요하 지류 연안에 위치한 고구려산성과 유사함. 입지조건을 보면, 이들은 요동평원에서 요하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충적평지 쪽으로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음. 그리고 축성방식에 있어서도 지형조건에 따라 토벽과 토석혼축성벽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였으며,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정문은 자연지세를 이용한 합입형(陷入形)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음. 따라서 영성자산성의 성격이나 기능은 요하 지류 연안에 위치한 다른 고구려산성과 유사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영성자산성은 요동반도 남부의 중요한 산성 가운데 하나임. 그 남쪽에는 개주시 고려성산성과 대석교시 해룡천산성이 있고, 북쪽에는 백암성이 있음. 즉 요동을 방어하는 산성 방어선의 중요 조성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 다른 고구려산성 방어체계의 조성부분으로는 안산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5개의 산성이 있음. 남쪽으로 7㎞ 떨어진 지점에 해성, 동북쪽으로 16㎞ 떨어진 지점에 산성자산성, 30㎞ 떨어진 지점에 마운산성, 33㎞ 떨어진 지점에 성자산산성, 동쪽으로 18㎞ 떨어진 지점에 용풍욕산성이 있음. 이러한 산성의 분포는 고구려인이 평상시에 각부(各部)가 각자 지역에 머물면서, 평상시에는 민, 전쟁시에는 병이 되었음을 보여줌. 이러한 축성 원칙은 인력 전환에 유리하고, 또한 주변 고구려군대와의 연계를 더욱 강화해주는데 유리한데, 상호 간에 군대를 파견하여 영성자산성의 방어능력을 강화시킴(富品瑩·吳洪寬, 1994).
영성자산성은 요동평원에서 사철하, 대양하를 거쳐 압록강 하류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645년 당태종이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케 함. 이때 고구려군은 안시성에서 40里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가 동남쪽 8里까지 접근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사철하를 따라 동남에서 서북 방향으로 안시성에 접근하였던 것임. 반면 당군은 백암성에서 서남쪽으로 요동평원을 따라 안시성으로 진군하였다고 추정됨. 645년 양 군의 이러한 행군로는 영성자산성이 요동평원에서 사철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현재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는 본계~봉성로(세하~초하로), 해성~수암로(사철하~대양하로), 개주~장하로(대청하~벽류하로) 둥 세 루트가 있음. 이 가운데 영성자산성은 중앙 루트인 해성~수암로 입구에 위치함. 한편 645년 당태종은 안시성보다 군사방어력이 미약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제의를 하나, 이동(李動)은 당군의 군량이 북쪽의 요동성에 있는데, 안시성을 건너 뛰어 곧바로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하면, 보급로가 끊기게 되어 곤경에 빠질 수 있다면서 반대함. 또한 당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이 오골성(봉성 봉황섬성)을 거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자고 건의하자, 당의 장손무기는 “오골성으로 곧바로 향하면 건안성, 신성 등의 고구려군이 배후에서 추격할 것이라면서 반대한 바 있음. 이는 요동평원에서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각 교통로의 고구려성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음을 보여줌. 영성자산성은 이러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 가운데 중간 루트의 입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 공격하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 더욱이 신민 고대산~반양의 북로, 태안 손성자~안산의 중로, 반산~고평~우장~해성의 남로 등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 가운데, 영성자산성에서는 남로와 곧바로 이어지며 안산을 거쳐 중로로도 나아갈 수 있음.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영성자산성은 요동평원에서 사철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군사중진이었고, 요동평원~압록강 일대의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영성자산성은 둘레 2.5㎞로서 대형산성에 속하고, 주거용 공간도 비교적 넓은데, 아마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 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노태돈, 1996). 안시성 성주는 민정권과 군사지휘권을 동시에 지닌 지방관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자연환경
해성시 동남쪽으로 7.5㎞ 떨어진 팔리진 영성자촌 동쪽 200m의 산 위에 위치함.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은 영성자촌(英城子村) 동면 산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짐. 해성시 팔리진 영성자촌(海城市 八里鎭 英城子村)의 처음 명칭은 고려영성자(高麗营城子)였는데, 이후에 영성자(營城子)로 불리다가, 다시 영성자(英城子)로 불리게 됨. 성 이름도“營城子山城”혹은“高麗城”으로도 불렸음. 『盛京通志』에는 산 이름이 영성산(赢城山)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예전에 성 바깥 사당지(廟址)에서 건륭(乾隆) 51년 6월에 주조된 철제 종이 발견되었는데,“奉天府海城縣, 城東南高麗營子”라는 명문이 있었음. 이를 통해 산성이 위치한“英城子”는 건륭(乾隆) 이후 잘못 전해져 내려온 명칭임을 알 수 있음.
좌표지리는 북위 40° 46′48.39″, 동경 122° 46′36.78″임. 평균 해발은 160m임.
서쪽으로 약 7.5㎞ 떨어진 지점에 해성시(海城市), 동남쪽으로 약 12.5㎞ 떨어진 지점에 석목성(析木城), 동쪽으로 약 5㎞ 떨어진 지점에 패루향(牌樓鄕), 산성 서쪽 약 350m 떨어진 지점에 해수(海岫)철로가 있음.
성 아래에는 석목성(析木城)과 수암(岫巖)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음. 발해만 방면에서 수암(岫巖)을 거쳐 압록강 하류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는 것임. 석목(析木), 수암(岫巖)으로 향하는 도로 동쪽으로 평야에서 산지로 들어 오는 입구를 막는 곳에 산성이 위치함. 산성은 해성(海城)에서 수암(岫巖)으로 오는 길 가운데, 맨 처음에 있는 산에 축조됨.
성 북쪽에는 해성하(海城河) 지류인 초철하(炒鐵河)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다가, 다시 해성하(海城河)로 유입됨. 해성하(海城河)는 서북으로 흘러 태자하 하류로 유입됨. 하천과 산성 간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350m임. 사철하(沙鐵河) 상류를 따라 동남쪽으로 나아가면 충적평지와 산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점차 험준해지다가 천산산맥 본줄기를 만나게 됨. 천산산맥을 넘어 대양하(大洋河)유역으로 진입한 다음, 대양하(大洋河) 연안 교통로를 통해 봉성(鳳城)을 비롯하여 요동반도 남쪽 해안가, 압록강 방면 등으로 나아갈 수 있음.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은 요동평원에서 사철하(沙鐵河)와 대양하(大洋河) 유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임.
성 서북쪽으로는 요동평원이 펼쳐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사철하(沙鐵河) 연안 충적평지가 기다랗게 뻗어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산봉우리들이 이어짐. 북쪽에는 산성보다 조금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음.
산성의 방향은 좌동면서(左東面西)로 산성 동·북·남 세 면의 지세는 비교적 높고, 서면이 비교적 낮으며, 중간에 작은 산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음. 동북모서리에서 서남과 동남 두 갈래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산성을 감싸고 두 줄기가 만나는 서쪽에 골짜기 입구가 있음.
산등성이 바깥쪽의 산비탈은 비교적 가파른 반면, 안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이 펼쳐져 있음. 성 안은 평탄한 지세가 매우 적음. 성안에는 민가들이 있음. 팔목장삼랑(八木奘三郞/야기 쇼자부로, 1929)이 1928년에 조사할 때, 성벽내외를 합쳐서 100戶이상이 거주하였고, 성 안에는 13~15호가 있었다고 함. 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동남모서리에 오르면 토산 꼭대기와 네 주위를 조망할 수 있음. 다만 남쪽은 산이 막고 있어 전모를 볼 수 없음.
유물 정보
평기와편(平瓦片) 2점, 암키와(板瓦) 1점, 벽돌(塼) 1점, 토기(土器) 2점(雙耳, 無耳), 투석용석환석(石丸) 1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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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시 영성자산성 위치도1
해성시 영성자산성 위치도2(35만분의 1)
해성시 영성자산성 주변지형도1
해성시 영성자산성 평면도1
해성시 영성자산성 평면도2
해성시 영성자산성 평면도 3
해성 영성자산성 서문 둔테석 평면도, 측면도
해성시 영성자산성 위치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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