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110_0030_0020


해룡천산성(海龍川山城)


해룡천산성 위치도

해룡천산성 위성사진


형태사항


둘레 3㎞, 총면적 150여만㎡(王綿厚, 2002; 王禹浪·王文轶, 2008; 王禹浪·劉冠樱, 2009; 崔艳茹, 2009; 王禹浪·王文轶, 2011)│둘레 4㎞(國家文物局, 2009); 둘레 6華里 이상(崔艳茹·馮永謙·催德文, 1996; 营口市博物館, 2000)이라는 기록이 있음. 1점 

 

출토지


대석교시 동부 주가진 동금사촌(大石橋市 東部 周家鎭 東金寺村)


 

조사내용

 

2007 왕우랑, 유관앵, 유술흔(王禹浪, 劉冠樱, 劉述昕)
10월 22일, 왕우랑·유관앵·유술흔(王禹浪·劉冠樱·劉述昕)등의 조사. 성곽의 전체 현황에 대해서 조사함.

2009년 왕우랑·유관앵(王禹浪·劉冠樱)이 「大石橋市海龍川山城考察報告」『黑龍江民族叢刊』2009-3을 발표함.


 

구조 특징

 

성은 포곡식 산성임. 산성 평면은 동서가(평면도 상으로는 남북이 조금 더 긴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 약간 긴 불규칙형의 장방형임. 요 건축물들은 산성 아래의 골짜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음. 성벽, 성문, 요망대(瞭望臺), 마도(馬道), 건물지, 샘 등이 남아 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함. 산성 남·북·동 세 면의 산세가 험준한 곳에 돌로 성벽을 쌓았음. 서면은 산 입구임.


전체 성벽 가운데 2/3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음. 성벽의 경우, 기단부 너비 2m, 높이 1~3m 라는 기록(崔艳茹·馮永謙·催德文, 1996; 营口市博物館, 2000; 崔艳茹, 2009). 너비 1m, 높이 1~3m라는 기록(王綿厚, 2002; 王禹浪·王文轶, 2008; 王禹浪·劉冠樱, 2009; 王禹浪·王文轶, 2011). 기단부 너비 3m, 높이 1m라는 기록(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2007년 조사 당시 서벽은 너비 약 3m, 바닥 너비 5~8m이었다고 함(王禹浪·劉冠樱, 2009).


서문 북측은 산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고 산등성이는 매우 험준해서 오르기가 어려운데, 산등성이 위에 돌로 쌓은 성벽이 축조되어 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높게 쌓음. 남부 모서리 높은 산등성이와 서로 연결되는데, 남북방향의 서벽과 동서방향의 남벽의 결합부에 길이 3m, 높이의 1.1m의 성벽이 남아 있음. 모두 푸른색 응회암(靑石)으로 쌓았음(王禹浪·劉冠樱, 2009). 서문 남측에는 토석혼축 성벽이 축조되어 있음. 성 안의 물이 흘러나가는 곳에는 흙을 다져서 성벽을 축조함. 남측 산등성이와 수구문 사이의 구간은 성벽이 끊김.


남벽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산등성이에 축조되어 있음. 산등성이 북측은 성 안이고, 산등성이 남측은 깊은 골짜기로, 기슭은 매우 험준함. 남벽 중단에 산등성이에서 성안으로 통하는 작은 길이 있는데, 고구려시기의 군민(軍民)이 성벽을 수비하던 중요한 길 가운데 하나로 추정됨(王禹浪·劉冠樱, 2009). 남벽 동단은 남북방향의 동쪽 산등성이와 연접되어 있는데, 그 연접부가 산성의 동남모서리임. 그 성벽 외측에는 성벽보다 약간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는 실질적으로는 동부 산등성이의 최남봉(最南峰)이고, 남면 산등성이의 동남면보다 돌출되어 있음. 또한 남쪽 산등성이와 천연협곡을 형성하는데, 동쪽 산등성이 성벽이 그 위까지는 올라가지 않고 남쪽 성벽과 가까운 곳에 연결됨. 또한 성벽의 바깥쪽과 이 산봉우리의 사이에 참호를 파서 남쪽 성벽의 외측에 있는 협곡을 방어할 수 있는 장애물을 조성하였음.


동벽은 남북방향으로 이어지는 산봉우리 사이의 산등성이에 축조되어 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돌면서 올라가고, 중간의 낮은 양측에는 높은 성벽이 축조됨. 성벽은 모두 돌로 쌓았는데, 대부분 자연석괴로 쌓았고, 가지런하고 정연한 돌은 매우 적게 보임. 성벽은 평균 너비가 2.5m임. 동벽 바깥에는 서북~동남 방향의 깊은 골짜기가 있음. 동벽에 서서 동쪽과 동남쪽을 보면 개활한 산간곡지와 천, 마을에 심어진 나무 등을 볼 수 있음.


성문은 동·서·남·북 한 개씩 모두 4개의 성문이 있다고 하나, 북문에 기록은 보이지 않음. 대신 동문을 두 개로 보기로 함(王禹浪·王文轶, 2008). 서문은 요하 하류평원과 대면하고 있는 서부의 산골짜기에 서문이 있음. 흙을 다져서 쌓은 성벽이 산성의 서문(정문)임. 또한 모든 성 안의 물이 흘러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이기도 함. 남문은 성벽 위의 병사와 성 내부 간의 연락에만 쓰이는 전용문길로 생각됨(王禹浪·王文轶, 2008). 동남문은 남부 산등성이 동부와 동측 산등성이 남부의 결합부에 작은 문이 있음. 그리고 산 아래와 동벽으로 통하는 회곽도가 있음. 이곳의 성벽은 안팎을 엇갈리게 축조한 후, 2줄기의 부장(附墻)을 증설하여, 산 아래에서 성 안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고자 함(王禹浪·王文轶, 2008). 동문은 동·남 두 성벽모서리에서 동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동벽 남쪽임. 여기에서 꺾어 북쪽으로 20m 가면 동문이 있음(동벽 가운데 부분). 동문은 서문에 서로 대응하는 산골짜기 아래에 축조되어 있음. 동문은 매우 좁으면서 옹문구조를 볼 수 있음. 동문에서 나오면 산 아래 구곡(溝谷)으로 통하는 험준하고 좁은 산길이 있음(王禹浪·王文轶, 2008). 산성 안 평탄한 남쪽대지에 고구려시기의 홍색 니질 포문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함. 이를 통해 산성 안에 건물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성 안에서는 고구려시기 유물 외에 요·금시기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음.


 

역사적 의미

 

산성의 험한 지세와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고구려시기에 요남(遼南)에 축조된 산성 가운데에서도 비중이 큰 중요한 산성이라고 할 수 있음.


축조시기는 404년 광개토대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요동공략을 시도하는데, 모용씨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결국 요동을 확보함. 이 때 고구려는 요동지역에 방어적 성격의 산성을 대거 축조함. 영구지구에 위치한 산성들은 404년 이후 광개토대왕이 요동지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구려 중기 혹은,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음(崔艳茹, 2009).


위치비정에 관해서는 여러 가정이 있음. 崔艳茹·馮永謙·催德文(1996)이 안시성설을 주장함. 645년 당의 요동정벌과 관련하여, 『資治通鑑』券198에 “吾(唐太宗)聞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 對曰: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逾安市而攻建安, 若賊斷吾運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 上曰:以公為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라는 기록이 있음. 『舊唐書』高麗傳에는 “積量遼東, 而西擊建安, 贼将梗我归路”이라는 기사와 長孫無忌가 “夫子行師, 不徼幸, 安市眾十萬, 在吾後, 不如先破之, 乃驅而南, 萬全勢也.”라고 말한 기사가 있음. 이 문헌을 통해 안시성이 건안성의 북쪽 혹은 북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음. 또한 10만 병마가 주둔하고, 수비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견고한 산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음. 한편 『舊唐書』高麗傳과 『資治通鑑』에는 “江夏王道宗督众筑土山于城东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以拒之, …… 筑山昼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顶去城数丈, 下临城”이라는 기사가 있음. 이를 통해, 안시성 동남모서리 성벽에서 수미터 떨어진 곳에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있음을 알 수 있음. 그리고 『資治通鑑』卷 198권에 “上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陳於西嶺;長孫無忌將精兵萬一千為奇兵, 自山北出於狹谷以沖其後。上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北山上, 敕諸軍聞鼓角齊出奮擊. …… 延壽等將餘眾依山自固, 上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樑, 斷其歸路.”라는 기사가 있음. 이를 통해, 안시성 서쪽에는 산령(山岭), 남면에는 산, 북에는 산과 협곡, 동면에는 강과 교량이 있음을 알 수 있음.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안시성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 지리적으로 요동성(지금 요양시)의 남면에 있고, 270華里 정도 떨어져 있음. 두 번째, 안시성은 건안성으로 추정되는 개주시 고려성산성 북쪽에 있음. 세 번째, 안시성은 규모가 크고 둔병 10만이 주둔하며 수비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운 성임. 네 번째, 안시성 서쪽과 남면에는 산이 있음. 다섯 번째, 안시성 북쪽에는 남면을 볼 수 있는 높은 산과 협곡이 있음. 여섯 번째, 안시성 동쪽에는 강이 있음. 일곱 번째, 안시성 동남모서리 성벽 바깥에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있음. 이러한 안시성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산성은 해룡천산성이라고 할 수 있음. 한편 고구려가 안시성을 축조할 때, 한의 건치명(建置名)을 따라 안시성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 요동군 안시현성지는 해성시 석목성진 석목성촌 한성지로 해룡천산성과 매우 가까움. 이 점 또한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음.


영구시박물관(2000)도 안시성으로 주장함. 비정할 수 있는 조건은 우선, 『舊唐書』高麗傳과 『資治通鑑』卷 198에 강화왕 도종(江夏王 道宗)이 안시성 동남모서리에 토산을 쌓았다고 하는 기사가 있으므로, 안시성 동남모서리에서 멀리 않은 곳에 토산이 있어야 함. 기사에서 60일 동안 50만명의 인력으로 쌓았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매일 0.5㎡의 흙을 운반하였다고 가정할 때, 토산의 규모는 25만㎡의 토량(土量)이었다고 추정됨. 『資治通鑑』卷 198에는 “上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陳於西嶺;長孫無忌將精兵萬一千為奇兵, 自山北出於狹谷以沖其後。上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北山上, 敕諸軍聞鼓角齊出奮擊. …… 延壽等將餘眾依山自固, 上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樑, 斷其歸路”라는 기사가 있음. 이 기사를 통해 안시성의 조건을 살펴보면, 첫 번째 안시성과 요동성(지금 요양시)과의 거리는 약 270華里 정도어야 함. 두 번째, 안시성은 요동성 남쪽 혹은 약간 서남쪽, 건안성(개주 고려성산성)의 동쪽 혹은 동북쪽에 있어야 함. 세 번째, 안시성은 10만 병마가 주둔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어야 하고, 매우 험준한 지형을 갖추어야 함. 네 번째, 안시성 서남에는 령(嶺), 남면에는 큰 산, 북면에는 협곡이 있어야 함. 다섯 번째, 성 북쪽 혹은 동북쪽에는 성 남쪽의 전장을 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있어야 함. 여섯 번째, 성 남쪽과 동남쪽에는 교량이 설치될 수 있는 하천이 있어야 함. 일곱 번째, 산성 동남쪽에는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있어야 함. 해성 영성자산성의 경우, 요양시 서남에 있고, 개주 고려성산성의 동쪽 혹은 동북쪽이 아닌 북쪽에 있으며, 개주시와의 거리가 100華里라는 점에서 270華里와는 차이가 있고, 해발이 높지 않고 험준하지 않으며, 성의 규모가 작아 10만 병마가 주둔하기 어렵고, 동남쪽에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없음. 이로 볼 때 영성자산성은 안시성으로 볼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지 못함. 영성자산성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였을 때 축조한 일반적인 군사성으로 볼 수 있음. 해룡천산성의 경우, 서문에서 나와 탕지진·대석교시·해성시를 거쳐 요양시까지의 거리가 약 270華里임. 그 위치는 대체로 요양시의 남쪽(약간 남서쪽), 개주 고려성산성의 동쪽(동북쪽)에 있음. 산성이 위치한 산세는 험준하고, 규모가 커서 10만 병마가 주둔하는데 문제가 없음. 산성의 서남쪽에는 서령(西嶺)이 있고, 성 남쪽에는 큰 산이 있으며, 북벽에는 협곡이 있음. 산성 동북모서리에는 해발 663.5m의 산봉우리가 있음. 성 남쪽에서는 대청하 상류의 여러 줄기의 원류하도를 볼 수 있고, 그 위에는 현재 교량이 설치되어 있음. 그리고 산성 동남쪽에는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있음. 이로 볼 때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에 더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음.


왕면후(王綿厚, 2002)도 안시성설을 주장함. 『舊唐書』卷199에는 정관(貞觀) 19年 당태종(唐太宗)의 요동친정(遼東親征)과 관련하여, “車駕進次安市城北, 列營進兵以攻之 …… 八月, 移營安市城東, 李勣遂攻安市 …… 乃令江夏王道宗築土山, 攻其城東南隅; 高麗亦城增雉以相抗.”이라는 기록이 있음. 해룡천산성 남쪽으로 건안성으로 추정되는 개주 고려성산성과 가까이에 있다는 점에서, 영성자산성보다 지리적으로 안시성에 더 적합함. 한편 해룡천산성 북쪽에 한대 안시현(석목성)이 가까이 있음. 고구려는 한대 현이름을 산성이름으로 명명하였는데, 안시성도 “안시현”에서 유래했을 것임. 이로 볼 때, 해룡천산성이 안시성에 더욱 부합된다고 여겨짐.


안시성 부정설도 있음. 왕우랑·유관앵(王禹浪·劉冠樱, 2009)이 부정설을 주장함. 해룡천산성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갖추고 있음. 첫 번째, 성의 둘레는 3,000m 정도임. 두 번째, 산성 평면은 불규칙형임. 세 번째, 산성은 8개의 산봉우리를 점유하고 있음. 네 번째, 산성 안은 지세가 개활하여 병사를 모으고 군량을 저장하는데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 다섯 번째, 산성 안의 수원은 풍족한데, 현재도 남·북 산골짜기 암벽 틈으로 흐르는 두 줄기의 샘을 볼 수 있음. 여섯 번째, 산성에는 모두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음. 일곱 번째, 성 내 서북모서리에서 요망대(瞭望臺) 두 좌(座)를 볼 수 있고, 너비 1m, 높이 1~3m의 성벽을 볼 수 있음. 여덟 번째, 성 안에는 “연병장(演兵場)”이라 불리는 인공적으로 축조한 평탄한 대지 세 곳 있는데, 중요한 건물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음. 아홉 번째, 산성 내 남쪽대지에서 고구려시기의 포문이 있는 니질의 홍색 토기가 출토됨. 열 번째, 해룡천산성 동남 모서리에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 있음.


한편 문헌에서 안시성(安市城) 관련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음.


첫째, 『舊唐書』卷3


夏四月癸卯, 誓師於幽州城南, 因大饗六軍以遣之. 丁未, 中書令岑文本卒於師. 癸亥, 遼東道行軍大總管, 英國公李勣攻蓋牟城, 破之. 五月丁醜, 車駕渡遼. 甲申, 上親率鐵騎與李勣會圍遼東城, 因烈風發火弩, 斯須城上屋及樓皆盡, 麾戰士令登, 乃拔之.


六月丙辰, 師至安市城. 丁巳, 高麗別將高延壽, 高惠真帥兵十五萬來援安市, 以拒王師. 李勣率兵奮擊, 上自高峰引軍臨之, 高麗大潰, 殺獲不可勝紀. 延壽等以其眾降, 因名所幸山爲駐蹕山, 刻石紀功焉. 賜天下大酺二日. 秋七月, 李勣進軍攻安市城, 至九月不克, 乃班師.


주석: 요동성은 지금의 요양임. 이적(李勣)은 고연수·고혜진(高延壽·高惠眞)과 주필산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성을 포위하고 원군을 쳤다는 점에서, 안시성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고, 안시성 주변의 어느 성에서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보임.


둘째, 『舊唐書』卷64.


及大軍討高麗, 令道宗與李靖為前鋒, 濟遼水, 克蓋牟城. 逢賊兵大至, 軍中歛欲深溝保險, 待太宗至徐進, 道宗曰: 「不可. 賊赴急遠來, 兵實疲頓, 恃眾輕我, 一戰必摧. 昔耿弇不以賊遺君父, 我既職在前軍, 當須清道以待輿駕.」 李靖然之. 乃與壯士數十騎直衝賊陣, 左右出入, 靖因合擊, 大破之. 太宗至, 深加賞勞, 賜奴婢四十人. 又築土山攻安市城, 土山崩, 道宗失於部署, 為賊所據. 歸罪於果毅傅伏愛, 斬之. 道宗跣行詣旗下請罪, 太宗曰: 「漢武殺王恢, 不如秦穆赦孟明, 土山之失, 且非其罪.」 捨而不問. 道宗在陣損足, 太宗親為其針, 賜以禦膳.


셋째, 『舊唐書』卷 211.


(李勣)車駕進次安市城北, 列營進兵以攻之. 高麗北部薩高延壽·南部薩高惠貞率高麗·靺鞨之衆十五萬來援安市城. 賊中有對盧, 年老習事, 謂延壽曰 : 吾聞中國大亂, 英雄起. 秦王神武, 所向無敵, 遂平天下, 南面爲帝, 北夷請服, 西戎獻款. 今者傾國而至, 猛將銳卒, 悉萃於此, 其鋒不可當也. 今爲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驍雄, 斷其饋運, 不過旬日, 軍糧必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此不戰而取勝也. 延壽不從, 引軍直進. 太宗夜召諸將, 躬自指麾. 遣李勣率步騎一萬五千於城西嶺爲陣; 長孫無忌率牛進達等精兵一萬一千以爲奇兵, 自山北於狹穀出, 以衝其後; 太宗自將步騎四千, 潛鼓角, 偃旌幟, 趨賊營北高峯之上; 令諸軍聞鼓角聲而齊縱. 因令所司張受降幕於朝堂之側, 曰 : 明日午時, 納降虜於此矣! 遂率軍而進.


明日, 延壽獨見李勣兵, 欲與戰. 太宗遙望無忌軍塵起, 令鼓角作, 旗幟齊擧. 賊衆大懼, 將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李勣以步卒長槍一萬擊之, 延壽衆敗. 無忌縱兵乘其後, 太宗又自山而下, 引軍臨之, 賊因大潰, 斬首萬餘級. 延壽等率其餘寇, 依山自保. 於是命無忌·勣等引兵圍之, 撤東川梁以斷歸路. 太宗按徐行, 觀賊營壘, 謂侍臣曰 : 高麗傾國而來, 存亡所繫, 一麾而敗, 天佑我也. 因下馬再拜以謝天. 延壽·惠眞率十五萬六千八百人請降, 太宗引入轅門. 延壽等膝行而前, 拜手請命. 太宗簡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 授以戎秩, 遷之內地. 收靺鞨三千三百, 盡坑之, 餘衆放還平壤. 獲馬三萬疋·牛五萬頭·明光甲五千領, 他器械稱是. 高麗國振駭, 後黃城及銀城自拔, 數百裏無復人煙. 因名所幸山爲駐山, 令將作造《破陣圖》, 命中書侍郞許敬宗爲文勒石以紀其功. 授高延壽鴻卿, 高惠眞司農卿. 張亮又與高麗再戰於建安城下, 皆破之, 於是列長圍以攻焉.


八月, 移營安市城東, 李勣遂攻安市, 擁延壽等降衆營其城下以招之. 城中人堅守不動, 每見太宗麾, 必乘城鼓以拒焉. 帝甚怒, 李勣曰 : 請破之日, 男子盡誅. 城中聞之, 人皆死戰. 乃令江夏王道宗築土山, 攻其城東南隅; 高麗亦城增雉以相抗. 李勣攻其西面, 令拋石撞車壞其樓雉; 城中隨其崩壞, 卽立木爲柵. 道宗以樹條苞壤爲土, 屯積以爲山, 其中間五道加木, 被土於其上, 不捨晝夜, 漸以逼城. 道宗遣果毅都尉傅伏愛領隊兵於山頂以防敵, 土山自高而陟, 排其城, 城崩. 會伏愛私離所部, 高麗百人自頹城而戰, 遂據有土山而塹斷之, 積火盾以自固. 太宗大怒, 斬伏愛以徇. 命諸將擊之, 三日不能克.


太宗以遼東倉儲無幾, 士卒寒凍, 乃詔班師. 歷其城, 城中皆屛聲偃幟, 城主登城拜手奉辭. 太宗嘉其堅守, 賜絹百疋, 以勵事君之節.


주석: “車駕進次安市城北, 列營進兵以攻之.”라는 기사는 이적(李勣)의 대군이 안시성에 도착한 후 개시된 공격임. 당태종(唐太宗) 등이 고연수·고혜진(高延壽·高惠眞) 등 고구려의 15만대군에 맞선 주된 전장은 주필산 부근임. “太宗夜召諸將, 躬自指麾. 遣李勣率步騎一萬五千於城西嶺爲陣; 長孫無忌率牛進達等精兵一萬一千以爲奇兵, 自山北於狹穀出, 以衝其後; 太宗自將步騎四千, 潛鼓角, 偃旌幟, 趨賊營北高峯之上; 令諸軍聞鼓角聲而齊縱.”이란 기사를 볼 때, 당태종의 주필산(駐蹕山)전투에 대한 전술배치는 안시성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이 아님. 주필산전투는 3만 정예가 고구려군 15만 원군에 완승을 거두었던, 즉 소수로서 다를 이긴 전투였는데, 당군이 승리함으로써, 평양방향에서 안시성으로 오는 원군의 경로가 끊어짐. 그 다음 수로대군(水路大軍)이 장량(張亮)의 지휘아래, 건안성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안시성은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지경에 처함. 장량(張亮) 등은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분명히 요동반도 남단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건안성을 공격하였을 것임. 즉, 고구려 비사성으로 비정되는 대흑산산성을 점령한 이후에 계속 북진해서 안시성 남부의 건안성을 점령하였던 것으로 보임. 건안성은 지금의 개주 남부 경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적산산성이 건안성으로 추정됨. 이러한 상황에서, 당태종은 8월에 병영을 안시성 동쪽으로 이동하여 안시성 동남과 서면에 대해 공방전을 시작하였고, 아울러 강하왕 도종(江夏王 道宗)에게 명을 내려 토산을 쌓고 그 성 동남모서리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음. 토산을 계속 쌓다보니, 점점 성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 거대한 압력으로 동남모서리의 벽이 붕괴됨. 그런데 당군수장 복수(伏受)가 제멋대로 소관부서를 떠나면서 우두머리가 없었음. 이 때 성안에 있던 고구려병사 100명이 성에서 나와 무너진 성에서 전투를 벌여, 결국 토산을 점령하였고, 토산에 참호를 구축하여 당군의 공격을 막았음. 이 후 당태종이 스스로 모든 군대를 이끌고 3일 동안 강공을 펼쳤으나 점령하지 못함.


넷째, 『資治通鑑』권 198.


丁未, 車駕發遼東, 丙辰, 至安市城, 進兵攻之。丁巳, 高麗北部耨薩延壽, 惠真帥高麗, 靺鞨兵十五萬救安市。上謂侍臣曰: 「今為延壽策有三:引兵直前, 連安市城為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潦為阻, 坐困吾軍, 上策也;拔城中之眾, 與之宵遁, 中策也;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高麗有對盧, 年老習事, 謂延壽曰: 「秦王內芟群雄, 外服戎狄, 獨立為帝, 此命世之材, 今舉海內之眾而來, 不可敵也。為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斷其運道;糧食既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上猶恐其低徊不至, 命左衛大將軍阿史那社爾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偽走。高麗相謂曰: 「易與耳!」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陳。


上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麗至, 皆拔刀結旆,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陛下未冠, 身親行陳,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算而已。今日之事, 乞陛下指蹤。」上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為諸公商度。」乃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高麗, 靺鞨合兵為陳, 長四十里。江夏王道宗曰: 「高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眾可不戰而降。」上不應, 遣使紿延壽曰: 「我以爾國強臣弒其主, 故來問罪;至於交戰, 非吾本心。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延壽信之, 不復設備。 問計


上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陳於西嶺;長孫無忌將精兵萬一千為奇兵, 自山北出於狹谷以沖其後。上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北山上, 敕諸軍聞鼓角齊出奮擊。因命有司張受降幕於朝堂之側。戊午, 延壽等獨見李世勣布陳, 勒兵欲戰。上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舉旗幟, 諸軍鼓噪並進, 延壽等大懼, 欲分兵御之, 而其陳已亂。會有雷電, 龍門人薛仁貴著奇服, 大呼陷陳, 所向無敵;高麗兵披靡, 大軍乘之, 高麗兵大潰, 斬首二萬餘級。


주석: 이 문헌기록은 주필산 전투에 대한 중요한 보충자료임. 이적이 안시성에 병사를 보낸 후,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고혜진(高延壽·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15만군으로 안시성을 구원코자 함. 당태종은 병력을 유인하기 위해 안시성 40리 밖에 유병(誘兵)을 배치하였고, 고연수·고혜진(高延壽·高惠眞)이 이끄는 대군을 안시성 동남쪽 8리 위치에 유인하고 산에 의지해 군영을 설치케 함. 당태종의 “上悉召諸將問計”와 그 후의 전략배치를 근거로 판단해 볼 때, 당태종이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산에 의지해 병영을 설치하도록 유인한 곳은 미리 계략이 짜여진 곳으로 추정됨. 당태종의 고구려군에 대한 매복배치를 살펴볼 때, 연수·혜진(延壽·惠眞)의 군영이 의지했던 산은 그 군영의 동쪽이고, 그 군영의 맞은 편은 길게 이어진 서부의 산령(山岭)이며(李勣이 보·기병 1만 5천을 주둔시킨 곳), 군영의 북쪽은 높은 산봉우리임(당태종이 “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 觀山川形勢”와 보·기병 4천이 잠복하던 산봉우리, 그리고 나중에 당태종이 공적을 새기고, 친히 행차하였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주필산). 이렇게 세 면의 길이 끊기는 지리환경과 당태종의 세밀한 배치로 말미암아, 고구려 15만 대군이 포위되는 상황에 빠졌음. 또한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의 진의 길이가 40리나 되었기 때문에, 산을 따라 포위한 전장에서 우세한 병력과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게 됨. 이로 인해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참패함. 이 기사는 안시성에 대한 중요한 지리좌표를 제공해주는데, 즉 안시성은 주필산 서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다는 것임.


다섯째, 『新唐書』卷 236.


帝與勣議所攻, 帝曰: 「吾聞安市地險而眾悍, 莫離支擊不能下, 因與之。建安恃險絕, 粟多而士少, 若出其不意攻之, 不相救矣。建安得, 則安市在吾腹中。」勣曰: 「不然。積糧遼東, 而西擊建安, 賊將梗我歸路, 不如先攻安市。」帝曰: 「善。」遂攻之, 未能下。延壽, 惠真謀曰: 「烏骨城辱薩已耄, 朝攻而夕可下。烏骨拔, 則平壤舉矣。」群臣亦以張亮軍在沙城, 召之一昔至, 若取烏骨, 度鴨淥, 迫其腹心, 計之善者。無忌曰: 「天子行師不徼幸。安市眾十萬在吾後, 不如先破之, 乃驅而南, 萬全勢也。」乃止。


여섯째, 『資治通鑑』卷 198.


上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不能下, 因而與之。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今逾安市而攻建安, 若賊斷吾運道, 將若之何?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上曰: 「以公為將, 安得不用公策。勿誤吾事!」世勣遂攻安市。


주석: 『新唐書』卷236과 『資治通鑑』卷198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안시성의 위치는 요동성과 건안성의 사이에 있고, 건안성의 북쪽에 있음. 그리고 안시성과 건안성은 요동성 서남에 있음. 한편 안시성의 소위 십만은 군(軍)과 민(民) 모두 합친 수라고 할 수 있음. 그 증거는 두 가지임. 첫 번째, 『資治通鑑』권 197에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上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 鼓噪聲震天地。甲申, 南風急, 上遣銳卒登沖竿之末, 爇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麾將士登城, 高麗力戰不能敵, 遂克之, 所殺萬餘人, 得勝兵萬餘人, 男女四萬口, 以其城為遼州.”라고 기록되어 있음. 안시성의 등급과 건축규모는 위에서 언급한 요동성과 대체로 비슷함. 요동성을 지키는 병사가 2~3만에 불과했고, 군·민 모두 6~7만이었음. 이로 볼 때 안시성에 주둔한 군사가 십만명이었다는 것은 불가능함. 두 번째, 『資治通鑑』卷198에는 “江夏王道宗曰: 「高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眾可不戰而降。”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고구려가 국가가 흔들릴 만큼 동원한 군사가 15만이 있었는데, 만약 안시성의 주둔군이 10만이었으면 적국보다 강했을 것임. 안시성의 주둔한 군사는 요동성 군·민수에 의거해서 추산해 볼 때, 안시성의 주둔한 군사는 3~4만이었고, 민은 6~7만 정도라고 추정됨.


일곱째, 『遼史』卷 38.


高麗, 本扶餘別種也. 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济, 西北度辽水与营州接. 北靺鞨 …… 水有大遼, 小遼,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小遼 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주석: 이 기사는 대요수(대요수) 즉 요하가 말갈 서남산에서 남쪽으로 흘러 安市城을 지난다고 설명하고 있음. 소요(少遼)는 즉 소요수로, 지금의 태자하임. 양수(梁水)는 즉 지금의 혼하임. 태자하와 혼하가 합쳐진 후 유입되는 요하는 예전에는 대요수라고 불렀음.


여덟째, 『遼史』卷 38.


鐵州, 建武軍, 刺史.本漢安市縣, 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即此.渤海置州, 故縣四:位城, 河端, 蒼山, 龍珍, [八]皆廢.戶一千. 在京西南六十里, 統縣一 : 湯池縣

주석: 고구려 안시성이 한 안시현 부근에 있었고, 발해와 요대에는 철주(鐵州) 관할내에 있었다고 추정됨.


위의 문헌을 분석하여 보면, 안시성은 아래의 특징에 부합해야 함. 첫 번째 안시성은 주필산의 서북에 위치하고, 당리 수로 8리 정도 떨어져 있어야 함. 두 번째, 안시성의 규모는 최소한 3~4만명의 군대를 갖추어야 하고, 매우 풍부한 수원도 갖추고 있어야 함. 세 번째, 안시성의 동남쪽에 토산이 있어야 함. 다만 당군이 철수한 후, 고구려군이 토산을 제거하였는지는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일종의 가능성임. 네 번째, 당태종은 동남과 서남 양로에서 안시성을 공략하였는데, 이는 반대로 안시성의 서면과 동남면이 가장 공성군이 공격하기 쉽고, 수성군이 수비하기는 어렵다는 뜻임. 그러므로 서면과 동남은 이에 합당한 지형을 갖추어야 하고, 성의 서면에 성벽과 각루가 있어야 함. 다섯 번째, 안시성의 위치는 요하 하류와 멀지 않아야 함. 여섯 번째, 한 안시현과 탕지현 부근에 있어야 함. 해룡천산성의 경우, 문헌에 나타난 안시성의 위치와 부합하지 않음. 해룡천산성 동남모서리 쪽에 있는 성벽보다 높은 산봉우리에 근거하여 안시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산봉우리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인공적으로 쌓은 것이 아님. 산성 서남 모서리에는 성 안으로 경사져 있는 산비탈이 있고 서벽 남단 일부분을 덮고 있는 산언덕이 있는데, 산언덕은 돌이 적고, 토양이 매우 부드러우며 그 위에 식생은 대부분 관목임. 이에 반해 그 왼쪽에 인접한 남벽 성벽에 있는 산령은 산석이 노출되고, 식생 대부분이 수목이라는 점에서 명확하게 대비됨. 이 외에, 산성 전체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인데, 서남모서리에 축조된 토산이 동남모서리에 축조된 토산보다 명확하게 우수함. 해룡천산성 서남 모서리 산언덕은 『新唐書』에 기재된 “동남우토산(東南隅土山)”의 위치와 부합하지 않음.


 

자연환경

 

대청하(大靑河) 상류 좌안(左岸) 약 2㎞에 위치함. 산성 서문 산기슭 아래는 주가진 동금사촌(周家鎭 東金寺村)임. 성 남쪽 산 아래에는 대석교(大石橋)에서 수암(岫巖)으로 통하는 도로가 가까이 있고, 성 북측에는 해성(海城)~수암(岫巖) 간 도로가 있는데, 한 성에 두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로, 군사와 교통지리 모두 중요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서쪽으로 탕지진(湯池鎭)까지의 거리는 9㎞임. 서쪽으로 요동만까지의 거리는 38㎞임. 산성과 바다와의 거리는 비교적 멀다고 할 수 있고, 요동반도에서 요동 중심지역으로 가는 중요 요충지의 산지 사이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해룡천산(海龍川山)은 해발 663.5m이고, 여러 산봉우리가 첩첩히 싸여 있으며, 산세는 험준함. 舊『海城縣志』에는 해룡천동산(海龍川東山)을 “海城 東南의 산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기록함. 산성은 해룡천 주봉(海龍川 主峰) 아래 서남쪽의 연속되는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어 있음. 산성은 8개의 산봉우리를 공유하고, 안으로 세 개의 산등성이를 포괄하고 있는데, 3개의 산봉우리는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음. 정 가운데 산등성이는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고, 성의 제고점(制高点)이 소재하고 있음. 남북 양측의 산등성이는 정 가운데의 산등성이보다 높이와 크기 모두 약간 뒤떨어짐. 세 줄기의 산등성이는 지세가 가파르지만 험준하지 않아서, 성을 축조하고 병사를 주둔시키는데 이상적인 지형임. 성의 동·북 양면은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협곡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음. 동부 산등성이와 북부 산등성이의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서는 각각 성내로 산비탈이 하나씩 뻗어 내림. 성 동북모서리는 해룡천(海龍川)의 여러 산들 가운데 주봉(主峰)임. 성 남쪽에는 높은 산이 있음. 성 바깥 서남으로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봉우리가 있음. 북부 산등성이와 북측 산봉우리로 형성된 산골짜기는 기슭의 지세가 비교적 가파르고, 면적이 약간 협소하며, 나무가 밀집분포하고 있어서 경작지로서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 남면 산등성이와 동면 산봉우리로 형성된 골짜기는 촌민이 개간한 밭이 있음. 구릉은 완만하고 면적은 다른 골짜기와 비교해 볼 때 개활함. 성안 전체 환경을 보면 고구려시기 둔병수양(屯兵修養)의 장소였던 것으로 보임. 산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평탄하고 개활한 지역이 있음. 서쪽이 산골짜기 입구인데, 성 안의 물이 흘러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이기도 함.


산성 동남부 성벽 바깥에 인공적으로 쌓은 원주형의 크고 높은 흙더미가 있는데, 현재는 성벽 쪽으로 무너져 있음. 바닥 직경은 30m, 높이는 20m임. 산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함. 산성 서남모서리에 원추형의 산언덕이 있음. 산언덕에서는 산석을 선명히 볼 수 있고, 토양은 부드러운데, 남부 산등성이가 대부분 암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음. 그리고 산언덕에 있는 나무는 대부분 차생림(次生林)으로, 관목(灌木) 가운데 90%가 떡갈나무임. 이는 인공적으로 쌓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음(王禹浪․劉冠樱, 2009). 산성 남쪽과 동남쪽에는 대청하(大淸河) 상류 강줄기가 있는데, 현재 강줄기 위에 다리가 있음.


 

유물 정보

 

홍색니질포문기와편(紅色泥質布紋瓦片) 1점


 

참고문헌

 

· 崔艶茹·馮永謙·催德文, 『營口市文物志』, 遼寧民族出版社, 1996

· 营口市博物館, 「關于安市城址的考察與硏究」『北方文物』 2000-2,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劉冠樱, 「大石橋市海龍川山城考察報告」『黑龍江民族叢刊』 2009-3, 2009

· 崔艷茹, 「營口地區山城調査與檢討」『東北史地』 2009-3, 2009

· 王禹浪·王文轶·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轶, 「營口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1-9, 2011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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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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