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11.htm

발해국의 주민구성 : 서론 및 결론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69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1
발해국의 주민구성 : 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0 
발해국의 주민구성 : 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2


발해국의 주민구성 : 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발해가 고구려계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문화적 계승관계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피지배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덜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이 주로 지배층문화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해문화의 특징들에 대한 해석이 주로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발해의 오경터 주변 유적에 집중되어 왔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발해의 고구려문화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발해와 고구려문화의 비교는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발해의 고구려계승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고구려의 강서큰무덤, 진파리1호무덤, 통구사신무덤 등과 발해의 정혜공주묘를 비롯한 六頂山 고분군과 삼령둔 및 북대 고분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측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문화에 대한 비교관찰은 발해문화의 계승성을 밝히는 데에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외교가 隋唐과도 빈번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문화에는 일정하게 외래의 것이 수용되었을 것은 예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예술이나 벽화 등은 외래문화의 영향이 쉽게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적으로 고구려나 발해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외래문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할 수 있는 고분축조 및 성곽 축성방법 등에서는 비교적 고구려의 고유성이 발해에 대부분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귀족들이나 쓸 수 있었던 석실고분 등을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구려인들의 거의가 이러한 무덤들을 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발해의 서민들이 사용했던 무덤들은 말갈묘의 한 특징으로 제기되고 있는 흙구덩이의 土壙墓[土坑墓]계통에서 찾아야 한다. 토광묘의 축조 방식은 오늘날의 매장 방식과도 가장 가까운 것으로써, 일반적인 토광묘는 거의 계획적으로 발굴되지 않고 있다. 토광묘의 발굴은 대체로 지배층의 대형고분 발굴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인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인민중심의 역사를 한다고 하는 북한의 고고학에서도 토광묘에 관심은 소홀하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은 토광묘 유적의 빈약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복원을 위한 계획적 발굴이라는 측면보다 유물찾기 내지 보물찾기식의 발굴이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이 없고 유적이 빈약하다고 해서 이것을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부수적인 묘제로 보거나, 고구려나 발해와 다른 말갈묘로 볼 수는 없다. 사료를 통해 볼 때,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피지배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광묘는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가 지배층중심이라는 사실은 기와무늬를 비교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기와를 썼던 계층이 지배층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舊唐書}(東夷列傳, 高麗)가 입증하고 있다. 즉, {舊唐書}는 기와가 '오직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 등에서만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지붕은 오늘날의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茅草(띠)로 이엉을 엮어'지었다고 한다. 발해의 서민들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舊唐書} 등은 발해의 정치·군사적 관계만을 주로 전하고 있을 뿐 이러한 부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발해문화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 이른바 말갈관(靺鞨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발해의 종족구성을 말갈로 보는 중국학계에서는 말갈관 즉 ?배가 부른 항아리 모양의 단지?[深腹筒形罐]를 말갈인(발해주민)들이 쓰던 그릇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관은 돈화육정산 무덤떼나 상경용천부터 및 다른 주거지에서도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고구려유지였던 자강도 자성군 법동리 하구비와 대성산 기슭의 고구려무덤에서도 나왔다. 그렇다면, 발해의 이른바 말갈관은 누가 쓰던 것인가? 말갈인들이 고구려에서 썼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인들이 발해지역에서 썼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후자의 편에 있다. 지배층과 풍속이 같았던 피지배층 ?말갈?이란 피지배주민들을 부르는 중국측의 일방적 종족명에 불과하였다.

발해의 피지배 주민이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생활터에서도 확인된다. 1977년 黑龍江省 東寧縣 團結遺址에서 발해의 집터가 네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平民住宅'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발해의 주민들이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물론 중국측에서는 이것에 대한 의미를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張太湘과 같이 이와 같은 작은 살림터가 발해의 一夫一妻制를 반영하는 遺址라든지, 이곳에서 五銖錢이 나왔다고 하여 ?黑水?와 ?黃河?의 경제적 교류가 있었다는 등의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고구려인들의 특징적인 살림터로 {舊唐書}도 인정하고 있는 온돌(火?)이 발견되었다. 이 역시 장태상은 이곳의 온돌을 ?地火龍(땅고래)?으로 표현하고 이것이 발전하여 벽난로와 온돌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구들 ???자가 중국에서 온 여진어라고 하여 중원과 이곳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이곳 유지에 대한 해석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발해 만주지역의 고고유지들에 대한 중국측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이곳이 고구려후손들이 온돌(구들) 장치를 하고 살았던 발해의 서민 주거지였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온돌을 고구려인들이 썼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의 {舊唐書}가 잘 보여주고 있다.

C. (고구려인들의) 주거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대개 茅草(띠)로 이엉을 엮어 잇고, 오직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만이 기와를 쓴다. 일반인의 생활은 대부분 가난하고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한다. 밭농사와 누에치기는 대개 중국과 같다({舊唐書}卷199上, [東夷, 高麗]).
 
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고구려의 주거생활이 중국과 다른 점이 몇가지가 있는데, ① 산골짜기에서 산다 ②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지은다 ③ 기와는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에서만 사용한다 ④ 일반인들은 대개 가난하고 ⑤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장치를 한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은 거의 중국인들 특히 기록자의 위치에 있던 唐, 五代의 지성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반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고구려나 唐·五代인을 막론하고 지배귀족들의 입장을 반영한다.

이것은 분명 고구려인들이 唐과 五代인들과 다른 주거생활을 누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온돌은 북한의 고구려유적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온돌이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와 함께 발해의 주민구성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또한 구들 장치는 지배층유적의 하나인 上京龍泉府의 궁성 서쪽 '침전터'에서 7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발해인들에게 일반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구려인의 온돌은 발해의 수도나 지방에 상당히 많이 보급되었던 난방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발해인들이 온돌시설을 하였던 근거는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발해의 지방문화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하는데, 노보고르데예프까, 스타로렌첸까, 꼬르싸꼬프까, 꼰쓰딴띠노프까 유적들에서 모두가 온돌이 나왔으며, 발해유민들이 살았던 아나니예프까 유적에서도 역시 나왔다. 그런데, 이곳이 고구려시대에도 변방의 말갈지역으로 꼽히고 있다는 데에 온돌발견의 의미가 있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이원론대로 하자면, 이곳은 발해인이 아닌 말갈인들의 전형적인 문화가 발견되어야 할 지역이다. 즉, {隋書}[靺鞨] 등에서 보이는 말갈은 온돌이 아닌 땅구덩이를 파고 사는 鑿穴[竪穴] 생활을 하였다.

D-1.주거는 대개 山水에 의지하며, 우두머리를 大莫弗瞞돌이라 하는데, 東夷 가운데서는 强國이다. 徒太山이라는 큰 산이 있어 사람들이 매우 숭상하고 두려워 한다. 산 위에는 熊 ? 豺 狼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헤치지 않으며 사람도 이들을 감히 죽이려 하지 않는다. 지대가 낮고 습하여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출입구는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隋書}卷81, [東夷, 靺鞨]). 
2. 집이 없고 모두 산간이나 물가에 의지하여 움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흙으로 덮는데, 모양은 마치 중국의 무덤과 같다. 서로 모여서 사는데, 여름에는 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만 움 속으로 들어간다({舊唐書}卷199下, [北狄, 靺鞨]). 
3. 거처하는 집이 없고 山水에 의지하여 움을 파서 그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는데, 마치 무덤과 같다. 여름에는 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만 움안에 들어가 산다. 오줌으로 세수를 하니 夷狄으로서도 가장 지저분하다({新唐書}卷219, [北狄, 黑水靺鞨]).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말갈인들이 '長坑'이나 '火坑'생활을 하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말갈인들도 고구려인들과 같은 주거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舊唐書}와 {新唐書} 모두는 말갈인들의 주거(사료D)가 분명히 고구려인의 '長坑'(사료C)과 달랐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풍속은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사료A-1,3). 결코 고구려와 말갈(사료D-1) 나아가 발해와 흑수말갈(사료D-2,3)의 주거문화가 같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렇다면, 적어도 高句麗 渤海와 (黑水)靺鞨의 주거문화는 달랐다고 해야 하고, 온돌이 발견되는 주거지는 대개 高句麗 渤海系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온돌이 말갈의 주거지로 알려진 연해주 등의 발해지역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 말갈족의 실체를 인정하고 고구려와 말갈을 이질적으로 보는 기존의 견해대로 하자면,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한다. 첫째는 고구려인들이 말갈지역까지 동북상하였을 가능성과, 둘째는 말갈인들이 고구려 문화를 전승하여 생활하였을 가능성, 셋째는 말갈도 위의 {舊唐書}와 {新唐書} 내용과 달리 고구려와 같은 주거문화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세번째 견해는 온돌문화는 고구려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동북방 각족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주거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갈을 동북방 주민의 범칭으로 보고 흑수말갈을 제외한 지역의 주민을 대체로 예맥계의 고구려계로 보는 견해대로 하자면, 이른바 말갈지역에서 나오는 온돌문화는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고구려인들의 일반적인 온돌문화가 변방의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돌문화에 대한 중국학계의 견해는 온돌의 고구려기원설을 부정한다. 크게 두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숙신기원설과 둘째는 동북방 각족 기원설이다. 전자는 渤海와 女眞, 滿族 등이 온돌을 사용하였던 것은, 그들의 조상이 숙신이기에 숙신이 온돌을 발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사료 D에서 본 바와 같이 숙신계의 흑수말갈인들은 온돌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위의 고구려인들이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사료C를 살피지 못하고 있고, 고구려와 발해후손을 자처하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주거문화가 온돌이라는 것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이 견해는 사료 C의 '長坑'을 온돌의 기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앞의 {舊唐書}의 '長坑'에 의거하여 온돌문화의 기원을 고구려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중국의 王世蓮은 長坑은 사계절용인 火坑(온돌)과 다르며 이것은 겨울에만 임시로 쓰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長坑 기록에 근거하여 火?(온돌)의 기원을 고구려에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온돌은 일개 민족과 왕조에서 발명된 창조물이 아니며 만주(중국 동북) 지역 주민들이 추위와 싸우면서 이룩한 문화산물이며, 이것은 고구려만이 아닌 다른 北方 各族도 서로 익혀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여진도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돌의 기원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는 몇가지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 즉, 온돌은 처음부터 수준높은 것이 아니었으며, 이것도 역시 역사발전과 함께 꾸준한 발전을 하여 왔고, 온돌의 고구려 기원설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사의 발전과 형성과정이 중요한 논거가 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고구려의 민족과 문화가 B.C.년간의 건국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건국초와 같은 소수의 종족과 좁은 문화를 소유하였던 것이 아니라, 700년의 역사와 함께 광대한 민족과 문화를 형성 발전시켜왔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고구려의 온돌을 발전된 시기의 여진의 것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여진 시기의 것은 발해문화를 거친 한 단계 높은 온돌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王世蓮이 고구려의 온돌(長坑)과 여진의 온돌(火坑)을 비교하는 것은 여진은 고구려계가 아니라는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여진이란 발해 멸망 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어진 종족명으로써, 이것 또한 말갈의 용례에서와 같이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을 범칭하였던 종족명이다. 발해가 고구려영역을 대부분 차지한 국가였고, 이들 문화가 대부분 고구려후손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여진지역에 고구려적 요소가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이 지역에서 여진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흑수말갈인이 남하 번성하여 형성된 그런 종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적 발해유민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온돌문화의 형성시기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는 사실은 북한의 고구려유적에서 확인되고 있고, 또한 문헌적으로도 '長坑'이 곧 온돌을 의미하는 '火坑'이라는 사실은 중국의 유명한 {辭源}과 {中華大字典}에 따른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의 온돌이 '火坑'이기에 이것의 기원이 '長坑'일 수 없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것 중의 하나인 주거문화의 상징인 온돌이, 오늘날 고구려 후손을 자처하며 고구려문화를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세계에서 온돌을 주택난방의 가장 쾌적한 장치로 인식하면서, 아파트에서까지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사실도 온돌의 역사적 내력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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