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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白城) = 백석성(白石城)? = 박작성? 
 
 
설오유와 고연무가 크게 승리하다 ( 670년 04월 04일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6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설오유와 고연무가 크게 승리하다
 
〔10년(670)〕 여름 4월 4일에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워 우리 병사가 크게 이겼다. 목 베어 죽이고 사로잡은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나라 병사가 이어서 도착하자, 우리 군대는 물러나 백성(白城)註 001을 지켰다.
 
註) 001
백성(白城): 위치가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 현재의 경기도 안성시 안성동이나(정구복 외, 222쪽), 황해도 재령의 백수성(白水城)에 비정한 경우도 있지만(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인정할 경우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조에 보이는 압록강 이북의 백석성(白石城)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209쪽).
 
〈참고문헌〉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만선사연구(滿鮮史硏究)(상세 제2책/上世 第2冊)』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의 지방 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37잡지 제6 > 고구려 성 목록 >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성.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註 849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이다. 절성(節城)註 850은 본래 무자홀(蕪子忽)이다. 풍부성(豐夫城)註 851은 본래 초파홀(肖巴忽)이다. 신성주(新城州)註 852는 본래구차홀(仇次忽)〔혹은 돈성(敦城)註 853이라고도 이른다.〕이다. 도성(桃註 854城)註 855은 본래 파시홀(波尸忽)이다. 대두산성(大豆山城)註 856은 본래 비달홀(非達忽)이다. 요동성주(遼東城州)註 857는 본래 오렬홀(烏列忽)이다. 옥성주(屋註 858城州)註 859. 백석성(白石城)註 860. 다벌악주(多伐嶽州)註 861. 안시성(安市城)註 862은 옛날 안촌홀(安寸忽)〔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이른다.註 863〕이다.
 
註) 860
백석성(白石城):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옥성주와 수암 일대로 비정되는 다벌악주 사이에 기재되어 있다. 이에 670년(문무왕 10) 3월에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 지원군이 오골성을 공격한 다음 퇴각하여 머물렀다는 ‘백성(白城)’으로 비정한 다음(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4월 4일조), 611년 수군의 30만 별동대가 퇴각하다가 고구려군에 포위당했다는 백석산(白石山)도 같은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96; 1999, 235~236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고구려사 명장면 130] 고구려 부흥전쟁 (3) 고연무와 오골성 전투 - 매경
 
고구려군과 신라군 연합군은 말갈군을 대파했음에도 당군과의 전투를 피해 백성(白城)으로 후퇴했다. 여기의 백성은 압록강의 요충지인 고구려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된다. 당 본군과의 전투를 피한 것은 가급적 당과의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신라 측 전략으로 보인다. 어쩌면 당의 입장에서는 오골성 전투를 벌인 상대가 고구려 부흥군으로만 알고, 신라군이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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