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37잡지 제6 > 고구려 성 목록 >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성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성.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註 849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이다. 절성(節城)註 850은 본래 무자홀(蕪子忽)이다. 풍부성(豐夫城)註 851은 본래 초파홀(肖巴忽)이다. 신성주(新城州)註 852는 본래구차홀(仇次忽)〔혹은 돈성(敦城)註 853이라고도 이른다.〕이다. 도성(桃註 854城)註 855은 본래 파시홀(波尸忽)이다. 대두산성(大豆山城)註 856은 본래 비달홀(非達忽)이다. 요동성주(遼東城州)註 857는 본래 오렬홀(烏列忽)이다. 옥성주(屋註 858城州)註 859. 백석성(白石城)註 860. 다벌악주(多伐嶽州)註 861. 안시성(安市城)註 862은 옛날 안촌홀(安寸忽)〔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이른다.註 863〕이다.
註) 849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 본래 후기 부여의 중심지로 494년 부여가 고구려에 투항한 다음 고구려가 부여성으로 삼았다. 631년부터 축조한 천리장성의 기점이기도 한데, 지금의 중국 지린/길림성(吉林省) 눙안/농안(农安/農安) 서남쪽 일대로 비정된다. 668년(보장왕 27) 2월에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성의 명칭 말미에 ‘주(州)’자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욕살)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6: 1999, 232~233쪽 및 242~246쪽). 북부여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27년 2월조 ‘부여성’ 참조.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50
절성(節城): 북부여성과 신성의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된다(노태돈, 1996; 1999, 233쪽). 이에 지금의 농안과 푸순/무순 사이의 서풍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하고, 고구려 후기의 중간급 지방관인 처려근지(處閭近支)가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른다면 절성은 당군이 북부여성을 함락하던 668년(보장왕 27) 2월 직전에 함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02, 263~269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여호규, 2002, 「요하 중상류 동안지역의 고구려 성과 지방지배」, 『역사문화연구』 17
註) 851
풍부성(豐夫城): 북부여성과 신성의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된다(노태돈 1996; 1999, 233쪽). 이에 지금의 농안과 푸순/무순 사이의 철령 성자산산성으로 비정하고, 고구려 후기의 중간급 지방관인 처려근지(處閭近支)가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른다면 절성은 당군이 북부여성을 함락하던 668년(보장왕 27) 2월 직전에 함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02, 263~269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여호규, 2002, 「요하 중상류 동안지역의 고구려 성과 지방지배」, 『역사문화연구』 17
註) 852
신성주(新城州):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훈허/혼하(浑河/渾河) 유역으로 진출하며 축조한 성곽이다. 지금의 랴오닝/요녕성(辽宁/遼寧省) 푸순/무순시(抚顺/撫順市) 혼하(渾河) 북안의 고이산성(古爾山城)으로 비정된다. 667년(보장왕 27) 9월에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성의 명칭 말미에 ‘주(州)’자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욕살)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6; 1999, 233~234쪽 및 242~246쪽). 신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5년 정월조 ‘신성’ 참조.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53
돈성(敦城):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신성(新城)이 두 곳 나오는데, 동북방에 위치한 신성이 ‘돈성’으로 불렸다. 「광개토왕릉비」에도 동해안 방면의 ‘돈성(敦城)’이 보인다. 이 기사의 신성은 서북방의 혼하(渾河) 유역에 위치한 신성을 지칭하므로 본서 찬자가 동북 신성과 혼동하여 ‘돈성’이라고 주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7년 4월조의 ‘신성’ 항목 참조.
註) 854
본서 정덕본(正德本)에서는 ‘䄻(도)’로 되어있으나, 『삼국사절요』에 근거하여 ‘桃(도)’로 교감한다.
註) 855
도성(桃城): 신성과 요동성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위치는 미상이다.
註) 856
대두산성(大豆山城): 신성과 요동성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위치는 미상이다.
註) 857
요동성주(遼東城州): 고구려가 400~402년 사이에 요동평원을 점령하고, 종전의 중원왕조가 설치했던 요동군의 치소에 둔 성곽이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랴오양/요양시(辽阳/遼陽市)의 요동구성으로 비정된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시에 함락된 바 있지만, 666~667년에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곽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뒤 고구려가 요동성을 복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667년 9월 신성 함락 이후에 당군에게 점령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명칭 말미에 ‘주(州)’자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96; 1999, 233~234쪽 및 242~246쪽). 신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4년 정월조 ‘요동성’ 참조.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58
본서 정덕본(正德本)에는 자형이 명확하지 않지만, 주자본(鑄字本)에 근거하여 ‘屋(옥)’으로 교감한다.
* 교감 : 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들을 바로잡음.
註) 859
옥성주(屋城州): 고구려 서북방의 중진인 오골성(烏骨城)인데,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3월조에 ‘옥골(屋骨)’로 나온다.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펑청/봉성시(凤城/鳳城市) 봉황산산성으로 비정된다. 667~668년 당군의 진격 상황으로 보아 668년 2월 부여성 함락 이후에 당군에게 함락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명칭 말미에 ‘주(州)’자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욕살)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노태돈 1996; 1999, 233~234쪽 및 242~246쪽), 실제 본서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4년조에 ‘오골성 욕살’이 확인된다. 오골성에 대해서는 본서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4년조의 ‘오골성’ 참조.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60
백석성(白石城):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옥성주와 수암 일대로 비정되는 다벌악주 사이에 기재되어 있다. 이에 670년(문무왕 10) 3월에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 지원군이 오골성을 공격한 다음 퇴각하여 머물렀다는 ‘백성(白城)’으로 비정한 다음(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4월 4일조), 611년 수군의 30만 별동대가 퇴각하다가 고구려군에 포위당했다는 백석산(白石山)도 같은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96; 1999, 235~236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61
다벌악주(多伐嶽州):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옥성주와 안시성 사이에 기재되어 있는데, 오골성은 중국 요녕성(遼寧省) 봉성시(鳳城市) 봉황산산성, 안시성은 하이청/해성시(海城市) 영성자산성으로 비정된다. 이에 봉성시와 해성시 사이의 수암현 지역으로 비정하고 낭낭성산성이나 구토성을 다벌악주로 비정한 다음, 성의 명칭 말미에 ‘주(州)’자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 후기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96; 1999, 236~241쪽 및 242~246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노태돈, 1996, 「5~7세기 고구려 지방제도」, 『한국고대사논총』 8
註) 862
안시성(安市城): 645년의 당(唐) 태종(太宗)의 침공을 물리친 중요한 성인데,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省) 해성시(海城市)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비정된다. 본서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4년조의 ‘안시성’ 참조.
註) 863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이른다: 본서 찬자가 안시성을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인 환도성과 동일하다고 본 주석이다. 이에 이 기사의 안시성을 중국 요녕성(遼寧省) 봉성시(鳳城市) 봉황산산성으로 비정한 다음,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 봉황산성에 별도(別都)인 환도성=북평양을 건설했다고 보기도 한다(손영종, 1990, 338~342쪽). 그렇지만 이 기사는 일찍이 정약용이 지적한 것처럼 본서 찬자의 오류이다. 본서 찬자는 “마자수(馬訾水)가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지나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든다”는 『신당서』 권220 고려전의 기사를 보고 위와 같은 주석을 남긴 것으로 짐작되는데(武田幸男, 1989, 410~411쪽), 『신당서』 고려전 기사의 ‘안시’는 ‘안평(安平)’을 잘못 적은 것이다(『한원(翰苑)』 인용 고려기). 안시성을 환도성으로 본 본서 찬자의 주석은 오기(誤記)를 수용한데 따른 두찬인 것이다(이정빈, 2017, 54~55쪽).
〈참고문헌〉
손영종, 1990, 『고구려사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이정빈, 2017, 「고구려의 국내성·환도성과 천도」, 『한국고대사연구』 87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1989, 『고구려사와 동아시아-「광개토왕비」연구서설-(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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