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군
한국사DB > 삼국사기 > 잡지 제4(雜志 第四) > 지리2 신라(地理二 新羅) > 백성군
白城郡, 本髙句麗奈兮忽, 景徳王改名. 今安城郡. 領縣二.
赤城縣, 本髙句麗沙伏忽, 景徳王改名. 今陽城縣.
虵山縣校勘 005, 本髙句麗縣, 景徳王因之. 今稷山縣.
校勘 005 정덕본에는 虵山縣(사산현)으로 되어 있다. 虵(사)는 蛇(뱀 사)의 속자(俗字)이다.
백성군(白城郡)註 056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나혜홀(奈兮忽)註 057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5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안성군(安城郡)註 059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적성현(赤城縣)註 06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사복홀(沙伏忽)註 061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62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양성현(陽城縣)註 063이다.
사산현(蛇山縣)註 06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현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065이 그대로[사산현] 따랐다. 지금은 직산현(稷山縣)註 066이다.
註 056
백성군(白城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으로 경기도 안성시 소재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608쪽; 정구복 외, 1997d, 239쪽). 적성현(赤城縣)과 사산현(蛇山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나혜홀(奈兮忽)을 백성군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 열전7 소나(素那)전에 따르면 소나가 인평(仁平) 연간(634~647년)에 백제군을 용감하게 물리쳐 백성(白城)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백성 지역이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였음을 보여준다.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백성(白城)’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백성군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안성시 명륜동의 비봉산성이 있는데, ‘본피(本彼)’명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단국대학교박물관, 1999, 136~146쪽; 서영일, 1999; 박성현, 2010, 260쪽). 안성천 상류를 따라 안성 당왕동, 사가동, 동평리 등에 신라고분군이 분포한다(김진영, 2021, 321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천안부 안성현(安城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안성’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수주(水州)에 소속시켰다가 천안부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홍건적을 물리친 곳으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고, 수원(水原) 관할의 양양(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 등 네 부곡(部曲)을 이관하여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 안성군조에 따르면 조선도 군으로 삼았다가 태종 13년(1413)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소속을 옮겼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단국대학교박물관, 1999,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김진영, 2021, 『신라 한주지방의 고분과 사회구조』, 서경문화사
서영일, 1999, 「안성 비봉산성 수습 ‘本彼’명 기와 고찰」, 『문화사학』 11·12·13 합집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註 057
나혜홀(奈兮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백성군(白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한다. 나혜홀의 ‘내혜(奈兮)’는 백성의 ‘백(白)’의 훈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홀(忽)’은 백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499~500쪽; 503쪽). 안성 도기동산성에서 고구려가 백제 성곽을 재활용하여 성벽을 개축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김진영, 2017), 고구려 나혜홀의 치소일 가능성이 있다(여호규, 2020, 247~249쪽).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김진영, 2017, 「안성 도기동산성의 발굴성과와 성벽구조에 대한 소고」, 『고구려발해연구』 58
여호규, 2020, 「고구려의 한반도 중부지역 지배와 한성 별도의 건설」, 『한국고대사연구』 99
註 058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059
안성군(安城郡): 신라 백성군(白城郡: 현 경기도 안성시 소재지)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백성군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60
적성현(赤城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백성군(白城郡) 소속의 현(縣)으로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608쪽; 정구복 외, 1997d, 240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사복홀(沙伏忽)을 적성현으로 고쳤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적성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적성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안성시 양성면의 무한성이 있고(단국대학교박물관, 1999; 박성현, 2010, 260쪽), 안성천 중류 연안을 따라 안성 반제리, 이현리, 평택 장당동, 지제동, 동삭동, 죽백동, 용이동 등에 신라고분군이 분포한다(김진영, 2021, 322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수주 양성현(陽城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양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종(顯宗) 5년(1014)에 수주(水州)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5년(1175)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경기 양성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소속을 옮겼다고 한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단국대학교박물관, 1999, 『안성 운수암 삼성각 건립부지 발굴조사보고서』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김진영, 2021, 『신라 한주지방의 고분과 사회구조』, 서경문화사
註 061
사복홀(沙伏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적성현(赤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한다. 사복홀의 ‘내혜(沙伏)’은 적성의 ‘적(赤)’의 훈에 상응하는 표현이며, ‘홀(忽)’은 적성의 ‘성(城)’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고유어이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0쪽; 503쪽).
註 062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063
양성현(陽城縣): 신라 적성현(赤城縣: 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적성현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64
사산현(蛇山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백성군(白城郡) 소속의 현(縣)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4·608쪽; 정구복 외, 1997d, 240쪽). 신라 경덕왕 16년(757) 지명 개칭 시에 종전대로 사산현으로 하였다고 한다. 본서 열전7 소나(素那)전에 따르면 소나가 백성군 사산 출신이었는데, 인평(仁平) 연간(634~647년)에 이 지역은 신라와 백제 국경이 서로 교차[相錯]하는 접경지대였다고 한다. 사산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천안시 직산면의 사산성(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4)과 북면의 위례산성(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7) 등이 있다(서영일, 1999, 104~106쪽; 박성현, 2010, 260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천안부 직산현(稷山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직산’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천안부에 내속(來屬)하였다가 그 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충청도 직산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2년(1393)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가 태종(太宗) 원년(1401)에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4, 『직산 사산성』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7, 『천안 위례산성 – 시굴 및 발굴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註 065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066 직산현(稷山縣): 신라 사산현(蛇山縣: 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사산현에 대한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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