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509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칼로 하늘에 맹세하다”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39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53호] 승인 2014.07.07 14:08:10
장검 길이 2 미터 무게 4.3kg 장검의 위용
장검속에 숨겨진 비밀 코드 인물 도량 밀접
현충사에 가 본 사람들이 가장 놀라고, 궁금해 하는 것은 보물 제326호인 이순신 장군의 두 자루 장검이다. 길이는 각각 197.2cm, 196.8cm이고, 무게는 4.3kg이다. 웬만한 보통 사람들은 칼을 휘두르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이 장검은 기존의 대부분의 전통 칼과 달리 만든 사람과 제작 시점이 나온다. “갑오년 4월 태귀련(太貴連)ㆍ이무생(李茂生)이 만들었다.” 갑오년은 1594년이다. 만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불경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장검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다. 제작자중 태귀련은 《난중일기》에도 두어 차례 등장한다.
▲ 1595년 7월 14일. 태구련(太九連)·공태원(孔太元) 등이 들어왔다.
▲ 1595년 7월 21일. 태구련(太九連)과 언복(彦福)이 만든 환도(環刀)를 충청 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눠줬다.
현충사에 소장된 장검에 새겨진 태귀련(太貴連)과는 태구련(太九連)과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학계의 통설이다. 7월 21일의 환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다.
현충사 장검은 의장용
태귀련과 함께 장검을 만들었다는 공태원(孔太元)도《난중일기》에 공태원 혹은 공대원(孔大元)으로 나오나 같은 인물이다. 공태원은 특히 이순신이 1593년 웅포 해전을 한 뒤 쓴 보고서인 <토적장(討賊狀)>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에 왜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태원은 《선조실록》에도 나온다. 선조 33년(1600년) 1월 28일, <좌의정 이항복이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논하는 차자를 올리다>에 따르면, 1590년 일본에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일본 망명자 사화동(沙火同)과 우리나라를 침입했던 왜구 신삼보라(信三甫羅)·긴요시라(緊要時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을 보내올 때 함께 풀려난 우리나라 포로 130여 명의 한 사람이었다. 일본 글자를 아는 사람으로 특기되어 있다.
공대원은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일본어를 익히고, 일본문화도 배웠던 사람이다. 때문에 이순신 막하에서도 일본군을 사로잡았을 때 심문을 하거나, 일본 진영의 정보를 파악할 때 파견되었다. 장검의 생김새 등과 제작자 공태원 등으로 인해 현충사의 장검이 일본도라는 논란이 있지만, 최근의 학계의 다수설은 일본도라고 보지 않는다. 그와 관련해 우리나라 전통검 전문가인 이석재 경인미술관장은 장검 제조 420주년 맞아 발표한 논문에서 “충무공의 장검은 조선 환도를 기본으로 외래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결합돼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칼”이라며 일본도설을 반박하기도 했다.
이 관장은 장검을 본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 하는 것, 즉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그 칼을 휘들렀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히 했다. 그는 칼을 실제 사용했을 때 생겨나는 검이 부딪친 흔적, 즉 격검흔(擊劍痕)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전용이 아니라 ‘의장용’이라고 보았다.
장검 속의 비밀 코드
이 관장의 논문으로 기존의 의문들, 이순신 장군이 실제 사용했을까? 혹은 전통검이 아닌 일본도 여부(?)등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장검을 통해 이순신은 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비밀코드는 아직도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 코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 했듯 제작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실명제(實名制)’이다. 1990년대 삼풍백화점 이후부터 시작된 각종 공사의 실명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장검에 비하면 우리 시대의 실명제는 저차원이다. 우리 시대의 실명제는 부실공사를 막기 위한 것,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순신 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가 강한 시대였다.
장인(匠人)은 세 번째 순위로 농민에 비해 낮은 신분이었다. 그런 신분시대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정신 훈련용, 의장용으로 바라보는 칼에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불경한 행위이다. 그러나 장검에는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420년 동안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다양한 신분의 인재를 그 능력에 따라 적극 활용하고,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장검에 새겨진 제작자 이름은 결국 이순신의 인재 활용의 비밀 코드이고,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큰 도량을 보여주는 인격 코드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사람을 모으고 활용할 때, 가짜 이름이나 헛된 명성에 기초한 허명(虛名)을 간파하려고 했고, 실제 능력과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위해 실명(實名)을 우선했던 것이다.
다른 비밀 코드 하나는 바로 검명(劒名)이다. 검명은 검을 만든 사람 혹은 검의 제작을 주문한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나와 적의 생사를 결정하는 검에 새겨 넣은 이름은 그 사람의 정신 그 자체이고, 그가 추구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순신의 장검에 새겨진 검명은 이순신 자신의 친필이다. 제작자들이 쓴 것이 아니다. 이순신 자신이 쓴 글귀를 제작자들이 새긴 것이다.
장검에는 각각 “三尺誓天, 山河動色”과 “一揮掃蕩, 血染山河”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은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구나”란 뜻이다.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란 뜻이다. 이 두 검명은 모두 어렴풋이 그 한글 뜻만 보아도 느낌이 확 온다. 이순신이 침략자 일본군을 멸망시키겠다는 열망,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 검명은 이순신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악의 무리인 일본군의 완전한 섬멸을 하늘에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이 검명들은 이순신이 생각해 만든 글일까? 두 검명 중 하나인 “三尺誓天, 山河動色”은 《난중일기》에도 거의 비슷한 글이 메모 형태로 나온다. 검명과는 한 글자 차이다. “尺劍誓天, 山河動色(척검서천, 산하동색)”이다. 그 뜻은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구나”이다. 三尺(삼척)과 尺劍(척검)의 차이다.
그런데 사실 《난중일기》속의 이 메모, 장검의 검명이 될 이 메모는 이순신의 글이 아니다. 이순신이 존경했고, 이순신과 같이 충무공 시호를 받았던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 1103~1142)의 말과 글, 삶을 정리한 《정충록(精忠錄)》이라는 책에 나온다. 그것도 이순신의 멘토였던 서애 류성룡이 쓴 <발문(跋文)>의 문장이다. 류성룡은 전쟁 직전에도 이순신에게 자신이 편집한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책을 이순신에 전해 주기도 했다.
검명, “三尺誓天, 山河動色”는 바로 그런 사연을 간직한 것이다. 그 사연이 의미하는 이순신의 비밀 코드는 전쟁 중에도 독서를 하는 장수, 책 속의 멘토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멘토로부터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얻으려는 자세이다. 책은 멘토를 가장 쉽게, 가장 싸게 만나는 방법이다. 이순신은 책을 통해 악비라는 명장을 멘토로 얻었다. 생존한 멘토와 적극적인 관계맺기를 통해 그의 지혜를 얻었다. 이순신의 두 번째 비밀코드는 멘토를 찾는 자세와 방법인 것이다.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조선 > 이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50) 이겨놓고 싸우는 법 - 일요서울 (0) | 2019.10.17 |
---|---|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51) 현실에서 답을 찾아라! - 일요서울 (0) | 2019.10.17 |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43) 전설이 된 명량해전 - 일요서울 (0) | 2019.10.17 |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42) 단 한척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 일요서울 (0) | 2019.10.17 |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41) 세상에 태어났다면 ‘쓰임새’ 위해 목숨 걸어야 - 일요서울 (0) | 2019.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