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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51] 현실에서 답을 찾아라!
암행어사 등 반대에도 ‘강제징집’ 관철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5호] 승인 2014.09.29  12:07:18

▲ <한산도 활터>


원균 패전후 현장답사로 옥포승첩 이끌어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 다만 사람에 따라 혹은 조직에 따라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또는 풀려는 의지가 있느냐가가 문제다. 해답을 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제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오늘의 문제의 현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제의 역사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주지 못한다. 어제의 역사는 교훈이며, 문제를 풀 수 있는 아이디어일 뿐이다. 현재의 문제는 오직 현실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순신은 전투를 준비할 때나 업무처리를 할 때도 현재를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봤다. 각종 정보를 수집해 분석했고, 자신의 역량을 판단해 그 역량 안에서 해결을 모색했다. 조정이나 상급기관이 빈번하게 저질렀던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에도 무작정 동의하지 않았고 자신이 현실에서 고민했던 해결책을 역으로 제안해 성사시켰다.

▲ 1593년 9월 3일. 순찰사(이정암)의 공문이 왔는데, 무릇 군사의 일가족들에 관한 일은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 1593년 9월 7일. 순찰사(이정암)에게 폐단을 아뢰는 공문과 군대를 개편하는 일에 대한 공문을 작성해 보냈다. 종일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 1594년 2월 16일. 암행어사 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의 임시방편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고 변명하는 말만 듣고 있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秦檜)가 무목(武穆)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전쟁기간 동안 부하들을 지휘해 전투해야 하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병력 부족과 병역 기피는 큰 문제였다. 때문에 이순신은 병역기피자들을 잡아오거나 기피자의 가족에게 병역을 대신 지웠다. 전쟁의 시작과 끝이 군사였기 때문이다. 지휘관으로서 이순신은 승리를 위해 단호하고 과감했다. 이순신의 강력한 조치로 인해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의 《난중일기》는 그 반발의 결과이다. 항의민원이 빈발하자 이를 받아들인 순찰사 이정암과 암행어사 유몽인이 이순신의 강제징집 조치를 반대한 모습이다.

이순신은 이정암과 유몽인의 정책들이 현실을 전혀 모르는 임시방편이라 단언했다. 전쟁 중에는 민생보다 국방이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순신은 당면한 전투 상황을 일시의 민원해결을 위해 탁상공론으로 풀려고 하는 리더들을 비판하면서, 조정에는 급박한 현안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결국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진영 한산도서 무과시험

이순신의 그와 같은 현실주의는 1594년에도 재현됐다. 그것이 비록 훗날인 1597년 초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게 된 원인된 진중과거시험이다. 이순신의 진영에서 무과 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본래 진중과거는 세자인 광해군이 전주에서 실시했던 것으로, 광해군은 이순신의 수군들에게도 자신이 머물고 있던 전주로 올라와 과거시험을 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광해군의 명령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던 한산도에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과거 시험장소가 먼 거리에 있던 전주였기에,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과거시험을 위해 수군들이 이동하는 것은 불합리한 조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이순신은 자신의 수군만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불공평을 시정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실시했던 진중과거를 사례로 들면서 자신의 진영인 한산도에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과거시험의 과목까지도 변경해달라고 했다. 섬이라는 한산도 공간의 특수성으로 무과 시험 과목인 말타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이순신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관례 대신 활을 쏘는 것만으로 급제를 판정할 수 있도록 건의했다. 광해군은 이순신의 요구에 동의했고, 한산도에서 무과시험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순신이 현실적인 상황을 중시하지 않았다면 부하들은 시험을 볼 수 없었고, 비현실적익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시험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철저히 인식하고 현실에 맞는 대책까지도 제안하며 관철시켰다. 1594년 4월 6일, 이순신은 자신의 한산도 진중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했고, 100명의 급제자를 뽑았다. 

이순신의 현실주의의 꽃은 뭐라 해도 원균의 칠천량 패배 후 공황상태에 빠진 원수 권율의 도움요청에 대해 이순신이 남해안 지역을 답사하면서 대책을 수립한 것이다.

현장에서 현실을 보라

1597년 7월 18일.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시(巳時)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했다.

이순신은 이 현장답사의 결과로 인해 얼마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됐을 때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수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장을 돌아보면서 완전히 붕괴된 수군을 되살릴 대책을 현실의 입장에서 찾아냈다. 자신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과 문제의식으로 직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 만들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민들은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1592년 5월 10일)>에서도 나타난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오직 육지에서 성(城)을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수 백 년 기업이 하루 아침에 적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적이 만약 뱃길로 본도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군사들은 전마가 한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 돌산도 백야곶과 흥양 도양장에서 기르는 말 중에 전쟁에 쓸 만한 말들이 많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 나누어 주어서 살찌게 먹이고, 달리기를 훈련시켜서 전쟁에 사용한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의 독단으로 말씀드릴 일이 아니오나, 사태가 급급하여 겸 관찰사 이광에게 감독관을 정해 보내게 하고, 말을 몰아내는 군사는 각 진포에서 뽑혀 온 군사를 동원하여 1~2일 기한으로 잡아내어 훈련시키도록 공문을 내었습니다.”

이순신은 언제나 철저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과거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미래로 책임을 미루기보다 지금 당장, 이 순간에 해결해야 할 임무를 우선시했다. 그 현실에서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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