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49] 명량대첩, 승리의 리더십
4가지 핵심비결 ‘리더가 앞장서라’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3호] 승인 2014.09.15  13:03:35


기록의 나라 일본도 패전 언급 삼가

1597년 9월 17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기적의 드라마를 썼다. 그 전투로 일본은 서기 663년 신라와 당 연합군에 맞서 백제를 구원하려다 참패한 이후 약 900년 동안 꿈꾸던 설욕의 야망을 포기해야 했다. 최소 130척 이상의 일본 전선은 불과 13척의 이순신 조선 수군에 치욕을 안겼다. 

명량대첩 그 패전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치욕적이었는지 록의 나라라고 불리는 일본의 수많은 기록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확인 가능한 기록을 보면 다만 “명량해협 벽파정 아래에서 조선 수군에 패배했고, 장수 간 마사가게(菅正蔭)가 전사했다” 정도다. 전투 과정이나 참전 장수들의 이름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패배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도 흔치 않다. 이순신의 각종 전투결과 보고서는 물론 다양한 보고서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만 명량대첩을 기록한 전투보고서는 전해오지 않는다. 가장 자세한 기록은 이순신 자신이 쓴 명량해전 전후의 일기뿐이다. 그 일기를 통해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었는지 살펴보자.

비결1: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1597년 7월 중순 발생한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은 전투 중 전선을 이탈한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끈 12척의 전선을 제외하고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6년 동안 일궈낸 전선과 군사들이 모두 바다에 수장시켰다. 당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을 하며 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한산도의 동향과 일본군의 동향을 확인 중이었다. 7월 16일, 패전 소식에 다급했던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을 찾아가 대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순신의 결론은 현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제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한 뒤 길을 떠났고 사실을 확인하며 대책을 고민했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즉시 수군 재정비를 위해 경남 진주 초계에서 9명의 군관과 출발해 이동중에 핵심 지휘관들을 모아 8월 18일까지 약 33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한 뒤 전남 장흥 회령포에 도착했다. 

그 때 그가 모은 지휘관은 120여 명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일본군의 대승에 따른 공포감이 감돌던 민심을 안정시켰다. 우는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심시켰고, 이순신을 믿고 자원 입대하려는 건장한 장정들을 막하 군사로 받아들였다. 그의 휘하에는 위로는 전직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승려와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 편으로는 일본군이 무서워 무기와 창고 곡식을 버리고 떠난 지방관들을 다시 불러내 행정시스템을 재건했다. 신상필벌로 군기를 확립했고, 흩어진 군수 물자를 모아 결전에 대비했다.

비결2:무한낙관주의와 자기 확신

그 와중에 선조와 조정은 수군 폐지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민심과 군심을 모았고, 수군 폐지 명령을 단호히 반대했다.

“신에게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운다면 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전부 폐지한다면, 이는 적들 행운으로 여기고 호남과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이를 것이니, 신은 이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우리를 감히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以爲幸. 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

이순신의 이 장계는 그의 무한 낙관주의와 엄청난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그는 패배감과 공포에 휩싸인 백성과 군사들과 달리 리더로서 자기 비전을 보여줬고,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낙관주의와 자기 확신을 갈고 닦았다. 조정에서도 이순신의 주장에 공감했고 마침내 그의 비전, 즉 승리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선을 8월 18일, 배설로부터 인수했다.

이순신은 8월 20일부터 소수로 다수를 이길 수 있는 승부처를 찾아 이동했다. 8월 20일 이진, 8월 24일 도괘, 어란 앞바다, 8월 28일 장도, 8월 29일 벽파진, 9월 15일 전라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했다. 그 시기의 일기에는 인간 이순신과 리더 이순신의 고통과 열망이 모두 나온다. 이진으로 이동한 다음날부터 3일 동안 그는 몸이 엉망이었다. “토하고 설사를 하며 심하게 아팠다.” 일어나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황까지 됐다. 참혹한 현실 속 정신적 고통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비결3:적보다 한걸음 앞서라

그럼에도 그의 독수리의 눈은 쉬지 않았다. 일본군의 이동 상황을 확인했다. 시시각각 추격해 오는 일본군 보다 그는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이동했고, 일본군의 기습을 철저히 대비했다. 23일까지 머물렀던 이진에는 사흘 뒤인 26일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8월 28일에는 8척의 일본 전선이, 9월 7일에는 13척의 일본 전선이, 9월 9일에는 염탐하는 일본 적선이 출현했다. 

오판과 작은 실수라도 있었다면 두려움에 빠진 조선 수군은 완전히 패망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의 염탐과 기습 의도를 간파하고 격퇴했다. 전임 통제사 원균이 패배했던 이유인 ‘경계의 실패’를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동향을 철저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불의의 기습을 철저히 막아냈다. 공포에 떠는 부하들을 대신해 가장 먼저 나아가 싸웠다. 반복되는 작은 승리들 속에서 조선 수군은 죽음의 공포 대신 승리의 희망과 열망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그 위기의 순간에 맨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적선이 가깝게 다가왔을 때 나각을 불고 깃발을 휘둘러 뒤쫓게’ 했다. 일본군의 야습도 미리 대비케 해놓은 뒤 자신이 선봉이 돼 싸워 물리쳤다. 공포에 떠는 부하 장수 대신 솔선수범해 두려움을 걷어냈고 자신이 승리의 화신임을 증명했다.

비결4:위기 때 리더가 앞장서라

명량해전 당일에도 그는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둘러쌌다. 상선(上船, 이순신이 탄 지휘선)이 홀로 적선들 속으로 들어갔다. … 배 위의 사람들도 서로 바라보며 놀라서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논하며 설명하기를, ‘적선이 비록 1,000척일지라도 감히 우리 배로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라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도록 이끌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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