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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50] 이겨놓고 싸우는 법
포로, 간첩 등을 통한 폭넓은 정보 수집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4호] 승인 2014.09.22 11:47:13
▲ <판옥선>
자신이 처한 상황 직시도 승리의 지름길
이순신이 불패의 명장이 될 수 있었던, 최고의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손자병법》의 ‘군형편’에 나오는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先勝以後求戰)”는 사고방식에 있다. 이겨놓고 싸우기 위해 그는 《난중일기》에도 썼듯 《손자병법》의 핵심 주장인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서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을 항상 실천했다. 어떤 조건, 상황에서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았고 적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승리할 수 있는 곳에서 싸웠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만 대결했다.
▲ 1593년 6월 26일. (일본군은) 이미 양식이 떨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편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대하는 셈이어서 그 형세가 마땅히 백 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지리를 조사해 오되 만약 적이 추격해오면 짐짓 물러나 적을 끌어내도록 하라”고 엄하게 지시했다. (<제2차 당포·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 1592년 6월 14일>)
이순신은 명량대첩 직전인 1597년 9월 7일에는 탐망군관 임중형이 적선 13척을 기습하려는 것을 미리 파악해 기습을 저지했고, 명량대첩 당일에는 이른 아침 별망군으로부터 적선의 출현을 보고 받고 전투를 대비했다. 전투 중에는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 안골포에서 투항한 일본인 준사가 전투 중 사망해 바다에 떠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를 알아보자, 이순신은 배위로 끌어올려 시체를 토막 내 일본군들이 볼 수 있게 했다. 마다시의 토막난 시체는 일본군의 사기를 급격히 저하시켰다. 투항 일본군 정보를 현장에서 활용해 전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순신이 주도면실하게 확인하려고 했던 정보는 일본군의 동향, 지형 정보는 물론 조정의 움직임,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선 공식적인 경로, 비공식인 경로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활용한 정보원은 조정의 고위층 관료는 물론 피난민, 포로 귀환자, 투항 일본군, 간첩까지 다양했다. 획득한 정보도 철저히 검증했다. 정보 획득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정보제공자의 자발성이다. 그들은 대가를 받는 이유로만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순신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이다.
전투와 직접 관계된 적군의 동향은 대부분 부하들을 시켜 수색과 정탐을 통해 확인했다. 육지와 바다에 정보 부대를 파견하거나 정보요원을 배치했다. 육지에는 현역 군인으로 구성된 정찰부대, 특별 정찰부대, 망장(望將, 망보는 장수), 탐망군관 등을 활용했고 때때로 민간인으로 보이는 탐후인, 체탐인 등을 운용했다. 바다에서는 정탐선, 복병선, 탐망선, 수색선 등의 다양한 명칭의 선박을 활용했다. 정탐선의 경우, 1593년 장계를 보면 싸움하는 전선 수와 비슷하거나 더 많기도 했다. 당시 이순신의 통합함대는 96척이었으나, 정보 수집 선박인 초탐선은 106척. 1594년에는 전선이 120척, 초탐선은 110척이었다. 명량해전에서는 13척의 전선이라는 불리한 전선 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보다 정확한 정보 획득을 위한 초탐선 32척을 운용했다.
▲ 1592년 6월 7일. 아침에 출발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이 율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복병선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 보게 했더니, 적선 5척이 먼저 우리 군사를 알아채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났다.
▲ 1593년 5월 20일. 새벽에 대금산 망군이 와서 보고하는데 역시 영등포의 망군과 같았다. 오후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은 형적도 없다”고 했다.
▲ 1593년 6월 18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닷새 만에 여기에 온 것이다. 매우 잘못되었기에 곤장을 쳐서 보냈다.
이순신 부대의 끊임없는 정보활동의 결과는 크고 작은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적진에 첩보원을 투입하거나 일본인 간첩을 활용해 정보를 얻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얻은 정보를 간첩을 통해 검증하기도 했다. 또한 간첩에게는 지속적인 정보 확보를 위해 대가를 지불했다.
이순신은 부산에 거주하는 간첩 허내은만을 통해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았다. 허내은만은 보고서를 보내오거나 직접 진영으로 찾아와 정보를 주고 쌀과 소금 등을 지급 받았다. 그의 정보는 부산 인근 지역인 김해부사의 정보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했다. 때문에 이순신은 김해부사의 정보와 허내은만의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된 허내은만의 정보를 수하 장수들과 각급 관청에 돌려 공유했다. 이순신의 정보 공유는 적군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 한 사례를 보면 자신과 부하들이 발명한 조총도 그 제조방법과 샘플을 조정과 다른 부대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 1593년 9월 15일 일기 이후의 메모 글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도내(道內)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리게 했다.
반면에 일본군의 간첩 활동에도 철저히 대비했다. 장사꾼으로 가장해 염탐했을 때는 타일러 쫓았고 심문을 통해 간첩으로 확인됐을 경우에는 처형했다. 공식적인 수색 및 정찰부대, 간첩 외에도 이순신의 정보원으로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포로가 됐다가 이순신이 구출한 사람이거나 탈출자, 피난민, 체포한 일본군, 투항 일본군 등으로 다양했다.
이순신은 정보들을 취합하고 분석해 자신의 전략전술에 활용했다. 특히 일본 수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해 그들의 배와 전술, 무기체계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이 가볍게 제작돼 속도가 빠르고, 전술은 근접전으로 조총과 칼, 활을 이용한 백병전을 주로 하지만, 충돌시 쉽게 부서지고, 일본 전선보다 큰 조선 전선에는 접근이 어려워 백병전이 곤란하고, 포를 실을 수 없어 조총의 사거리 이상에서는 전투 자체가 불가능함을 파악했다. 일본 수군 정보는 이순신의 함포사격 전략의 바탕이 됐고, 조선 수군은 언제나 원거리에서 공격해 대승할 수 있었다.
이순신에게 정보는 단기적으로 전투 승리, 중장기적으로는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자신의 수군을 정비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자원이 됐다. 이순신은 가장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고, 그 다음 적의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의 상황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적을 상대로 전투를 했고 승리했다. 이길 수 있는 곳, 이길 수 있는 상황, 이길 수 있는 상대와 싸웠다. 이길 수 있도록 철저히 첩보를 수집하고 활용한다면 이순신처럼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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