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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48] 시(詩)를 노래하는 이순신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리더십은 예술 영역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62호] 승인 2014.09.05 10:39:39
▲ <박은식, 《한국통사》 속의 이순신과 거북선, 1915>
- 어느 봄 날 “꽃비에 흠뻑 젖기도 했다”
- 조선 중기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 영웅
스티븐 샘플(Steven B. Sample) 미국 남가주대(USC) 총장은 리더십은 예술이라며, “음악·미술·시에 가깝다”고 말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하고, 목표와 비전을 함께 공유하는데 ‘리더의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명장 이순신, 영웅 이순신, 리더 이순신이 시인 이순신이었던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는 탁월한 시인의 감성으로 삶의 목표와 비애를 노래했다. 국문학자 조윤제 교수는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에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이순신을 꼽기도 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그의 대표적인 시는 ‘한산도가’이지만, 이순신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던 조경남은 이순신이 한산도에서만 20수를 지었다고 했다. 이순신이 진중에서 시를 쓰고, 노래한 것은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난중일기 등에 자작시 적혀
▲ 이날 삼도의 사수와 본도의 잡색군에게 음식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술에 취했다. 이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에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1595년 8월 15일).
▲ 혼자 수루에 기대어 시를 읊조렸다(1596년 5월 17일).
체코의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은 “위대한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도 시를 잘 썼고, 2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시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아름답게 글을 썼다. 시저, 처칠, 맥아더와 같은 탁월한 군인들이 시를 쓴 것은 자신들의 감성을 갈고 닦아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들이기에 자신과 타인의 삶을 아픔으로 지켜봐야 했고, 또 고난 속 길을 찾기 위해 시인의 열린 눈과 마음을 활용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시(詩)는 꼭 힘써야 할 것은 아니나 성정(性情)을 갈고 닦으려면 시를 읊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다. 때로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하려고 방황하며 안타까워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지닌 뒤에라야 바야흐로 진짜 시가 된다. 자신의 이해(利害)에 얽매인 것이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다.
이순신의 시는 정약용이 말한 ‘진정한 시’ 그 자체이다. 그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서 생겨난 고독과 고뇌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를 썼고, 검은 바다 위에 떠있는 차가운 달빛, 부드러운 달빛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기 위해 시를 썼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어울리지 않던 시를 통해 번득이는 칼날을 감동으로 녹여냈다.
시인의 관찰력, 창조의 시작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 리더들도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 많다. 시를 통해 감성적 공감력은 물론 상상력, 관찰력을 키우고 기업과 삶의 경영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시집을 곁에 두고 수시로 읽는 애플의 CEO 고(故) 스티브 잡스((Steve Jobs)다. 시는 관찰과 상상력 없이 제대로 노래할 수 없다. 관찰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만이 가진 특징, ‘남다른 무엇’을 찾는 일이다. 시인들의 관찰법은 전체를 본 후 부분으로 관점을 옮기고 그 다음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보는 방식이다. 시는 그러한 관찰과 발견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만든 창조물이다.
시인 이순신의 관찰력과 상상력은 그가 쓴 일기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1595년 10월 15일 일기에서 “저녁에 달을 타고(乘月) 우수사 경수에게로 가서 전별했다”고 하면서 배를 타고 간 것이 아니라 달을 타고 갔다고 했다. 배를 타고 한동안 가다보니 어느새 자기 자신이 배가 아니라 달을 타고 가는 듯한 착각과 상상에 빠진 것이다. 석양이 질 무렵에는 지는 해를 타고기도(乘暮) 했다(1596년 4월 13일). 또한 비가 많이 내린 어느 봄 날에는 “꽃비(花雨)에 흠뻑 젖기도 했다(1592년 2월 23일).” 꽃피는 봄과 비를 절묘하게 섞어 화사한 봄날의 정겨움을 표현했다. 《난중일기》에는 일기라고 볼 수 있지만 일기를 시처럼 쓴 경우도 있다.
▲ 바다에 뜬 달은 청명하고, 티끌 하나 일지 않는구나. 물과 하늘이 한 빛을 이루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海月淸明, 一塵不起. 水天一色, 凉風乍至, 獨坐船舷, 百憂攻中). (1593년 7월 9일)
자신이 직접 지은 시도 세 편이나 《난중일기》에 써있다.
▲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秋氣入海客懷擾亂)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은 몹시 번거롭다(獨坐 下心緖極煩). 달빛이 뱃전에 드니 신비로운 기운이 서늘하다(月入船舷神氣淸冷).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寢不能寐鷄已鳴矣) (1593년 7월 15일)
1595년 9월 14일 일기에는 젊은 시절 함경도에서 함께 근무했고, 또 나이가 들어 남쪽에서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동료 선거이(宣居怡) 장군과 헤어질 때 이별의 정(情)을 노래한 시도 써 놓았다.
▲ <선거이 수사와 작별하며 준 시(贈別宣水使居怡)>
북쪽에서도 같이 고생하며 힘써 일했고(北去同勤苦) 남쪽에서도 생사를 함께 했었네(南來共死生). 한잔 술, 오늘 이 달빛 아래 나누면(一杯今夜月) 내일은 이별의 정(情)만 남으리(明日別離情).
그의 시에는 시인의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소명을 다하려는 자세가 가득하다. 기쁨보다 슬픔, 웃음보다 분노가 가득한 시인 이순신의 마음은 승리에의 결의를 다지는 가슴 속 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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