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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52] 책상 대신 현장으로 가라
매달 10일 이상 현장 순시·문제 해결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6호] 승인 2014.10.06 11:56:00
앞장 선 지휘로 사천해전서 총상 입기도
사무실 안과 책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늘 탁상공론에 빠져 현실을 잊거나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이순신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앞장서서 이끌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후의 일기를 분석해 보면, 1592년 1월의 경우,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에서 일했다고 명확히 기록한 것은 20일이다. 2월은 동헌에서 12일 동안 일했고, 현장점검은 14일을 했다. 3월은 동헌에서 13일, 현장 점검은 7일이었다. 4월은 동헌에서 7일, 현장점검 7일을 했다. 매달 최소 1/3이상을 자신의 사무실인 동헌이 아니라, 현장을 순시하고 점검했다.
미국 2차대전의 영웅 패튼도 항상 일선 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최전선의 부대를 방문해 벌어지는 상황을 직접 보고 들었고, 그것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 효과 만이 아니라 사기 진작용이기도 했고, 다른 장교들을 자극하는 본보기 효과를 가져왔다. 패튼은 말했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지 마라. 전방에 나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라. 거기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 자네들의 병사들이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들이 무엇에 맞서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순신은 현장에서 부하들과 함께 하면서 현장에서 듣고,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1월 16일부터 3월 27일까지 16일 동안 5관 5포를 순시하며 현장을 점검했다. 군사 소집, 성벽을 쌓는 것, 전투선을 점검하는 것, 거북선 건조 등 현장에서의 전쟁준비 상황을 일일이 확인했다. 비가 온 뒤에는 새로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성벽을 점검했다. 준비가 제대로 안된 경우는 처벌하기도 하고, 잘 된 경우는 격려를 했다. 전쟁준비에 열심히 노력한 장수들과는 술자리를 갖고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반면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관리들에 대해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처럼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며 한탄했다.
패튼은 부하 장교들에게 현장으로 가서 군사들의 복지와 배급을 점검하고, 발생할 수 있는 병의 징후나 예민한 긴장감까지 파악해야 하며, 부하들의 발을 보면서 제대로 맞는 신발을 신었는지, 양말이 잘 맞는지까지도 살폈고, 날씨 변화에 따른 적절한 옷을 입도록 지시했다. 이순신은 패튼보다 더했다.
▲ 1594년 1월 20일.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듯 했다.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 1596년 1월 23일.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이순신은 부하를 시켜 확인을 하게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자신이 항상 군사들과 함께 있었다. 전쟁 발발 전의 현장점검은 전쟁 대비를 위한 전선(戰船) 상태나, 신호체계인 봉화대 구축, 성벽 구축, 군대 점검, 거북선 대포 발사 시험 등을 주로 했다.
▲ 1592년 2월 15일. 석공들이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가 많이 무너졌기에,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 1592년 2월 22일. 먼저 흥양 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기구를 직접 점검하고, 그길로 녹도로 갔다. 만호(정운)의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양 현감과 능성 현감 황숙도와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겸하여 대포 쏘는 것도 관찰하느라 촛불을 한참 동안 밝히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 1592년 3월 27일.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기둥 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
전쟁중에도 이순신은 항상 현장을 찾았다. 특히 전쟁기간 중에는 사람이나 물건의 숫자까지 세세히 기록할 정도로 치밀하게 확인했다.
▲ 1593년 6월 22일. 전선을 토괴(土塊)에 얹어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목수가 214명이다. 물건 나르는 일은 본영 72명, 방답 35명, 사도 25명, 녹도 15명, 발포 12명, 여도 15명, 순천 10명, 낙안 5명, 흥양과 보성 각 10명이 했다. 방답에서는 처음에 15명을 보냈기에 군관과 색리를 논죄하였는데, 그 정상이 몹시 간교했다.
이순신은 병사들과 일을 자주 했다. 병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패튼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구상하는 작전의 80%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에 할애해야”는 것과 같다. 장수가 앞장서서 함께 일하고, 함께 뛰었을 때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장수가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켜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는 행동이 된다.
맥아더는 연합군의 첫 번째 상륙 부대 바로 뒤에서 해안을 걸으며, 그의 군사들이 참여한 모든 작전에 함께 했다. 아이젠하워는 빡빡한 일정에서도 항상 그의 병사를 방문했고, 마셜은 워싱턴에 묶여있었음에도 병사들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대서양을 건너가서 전장을 순시했다. 패튼은 자신이 최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의도적으로 적군의 사격에 노출되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장군도 총에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순신도 사천해전에서 지휘를 하다가 조총에 부상을 당했다. 이는 패튼의 과시적 행동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현장 리더의 모습이다. 대장이 가장 앞장서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서양의 군사 리더와 같은 쇼맨십이 전혀 없었다. 화려한 모습의 이순신을 보여주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성룡이 이순신의 모습을 단아한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수수한 모습이었고, 내적인 수양을 우선하는 선비의 모습이다. 그가 현장에서 부하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도 자주 나온다. 물고기를 잡을 때는 같이 물고기를 잡고, 돌을 실어올 때는 함께 돌을 실어오고, 칡을 캘 때는 칡을 캐는 사람의 모습이다.
▲ 1592년 2월 1일. 선창(船艙)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水場)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다.
▲ 1594년 8월 19일. 칡 60동을 캐고나서 원 수사가 그제야 왔다.
이순신은 군사, 백성들과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친구처럼, 선배처럼 이끌었다. 위압적이거나 겉치레 대신 친근감으로 부하들의 신뢰를 얻었다. 사람들을 알려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부터 이해해야 하며, 수영을 배우고 싶으면 물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싶으면 먼저 달걀을 깨야 한다.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행하지 않으면 제대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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