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992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유비무환이 중요한 까닭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54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8호] 승인 2014.10.20 13:53:21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크게 잃는다’
전라좌수사 임명되자마자 전쟁 대비
유비무환(有備無患)은 많이 쓰면서도 잘 실천하지 않는 말이다. 그 결과는 언제나 크게 잃는다는 뜻의 ‘대실(大失)’를 낳는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략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선조 18년인 1585년이었다. 임진왜란이 있기 7년 전이다. 선조 20년인 1587년에는 히데요시가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에게 조선침략 준비를 지시했다.
그 해 대마도에서는 일본의 조선침략 문제로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종의지(宗義智)가 들어와 선조를 만났다. 임진왜란때 위력을 발휘했던 최첨단 무기 조총도 그때 선물로 가져왔다. 그러나 조총은 기술의 변화에 무지했던 리더들의 무관심 속에서 창고에 들어갔다.
또한 세계사의 변화를 외면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내부에서 논란만하다가 2년이 지난 1590년 3월에야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다. 약 1년 후에 돌아온 통신사들의 보고는 완전히 상반됐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각각 전쟁 가능성과 그 반대 주장을 펼쳤다.
8개월 동안을 일본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치고는 극과 극이었다. 게다가 1591년 여름에는 종의지가 부산포에 들어와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급한 상황을 알렸지만, 그 정보는 조정에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들이 시끄럽게 논쟁해서 기껏 만든 대책은 몇몇 장수들을 남쪽 지방에 재배치하는 수준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기적같이 그 장수 중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실 막으려 고심한 장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마자 철저히 전쟁을 대비했다. 그럼에도 예상했던 것처럼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늘 군사가 부족했다. 각 부대는 각각의 군사 확보를 위해 소속이 다른 군사를 서로 빼앗기도 했고, 군사들은 조금 편한 부대, 덜 위험한 부대로 옮겨갔다.
이순신의 수군은 수군이라는 악조건과 악습이었던 수군 신분 세습 문제로 더 심각했다. 수군에 입대해야 할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육군과 의병에 입대하거나,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갔다. 남아 있는 늙고 허약한 백성들은 군대 보급품을 운반하는 노역에 끌려 나가 가혹한 채찍질에 죽어나갔다. 이순신은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말했다.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나라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소망하는 것들을 크게 잃고 있어서(大失, 대실) 바다 한 모퉁이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며 슬픔이 가득하여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이순신은 배를 몰 격군과 전투를 할 사부가 필요했지만 입영대상자들이 도망가고 다른 부대로 가버렸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법을 집행해야 했다. 입영대상자의 친척이나 이웃에게까지 책임을 지워 대신 군역을 지게 한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지나치게 징병을 한다고 민원이 그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민원을 이유로 과도한 징병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도 조정의 명령에 대해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며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했다. 그러나 징병 제한 명령이 알려지자 10명의 병력을 보내던 고을에서 3~4명을 보낼 정도로 징병 대상자의 수는 더욱 급격히 줄었다.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은 조정에 징병 제한 명령을 제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군 복무자가 날로 줄면 진포의 장수들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하는 것을 누구와 함께 하고, 성을 지켜 항전하는 것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례를 지켜 징병한다면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되고, 분부를 따르면 복무자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이순신에게는 비변사에서 전선(戰船)을 넉넉하게 만들라는 명령도 내려온 상태였다. 전선을 만들 군사와 만들어진 전선을 모는 격군과 사부가 더 필요했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현실과 백성들의 민원에 따른 조정의 명령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지혜를 발휘해 절충안을 만들었다. 징병대상자의 친척이나 이웃 중에서 ‘사람이 죽었거나 자손이 끓어진 집안’은 제외하는 방법이었다.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병력을 모을 수 있도록 했다. 다른 한편으로 병력부족의 근본원인이었던 육군과 의병의 수군 모병을 중지시켜야 했다.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까지 미친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으니 또 다시 똑같은 실수, 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며 육군과 의병들이 수군을 징병하지 말도록 조처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순신이 말한 크게 잃는다는 ‘대실(大失)’은 병법서인 《육도》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聖人)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현인(賢人)은 백성을 바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백성을 바르게 만들지 못해 다툼이 일어나게 합니다. 윗사람이 피로해지면 곧 형벌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형벌이 잦으면 곧 백성들은 걱정에 많아집니다. 백성들이 걱정이 많아지면 곧 살 곳을 잃고 유랑하게 됩니다. 상하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지면 몇 세대가 지나도 쉴 수 없습니다. 이를 크게 잃는 것, 대실(大失)이라고 말합니다.
이순신은 《육도》에서 말하는 대실의 의미를 이용해 조정에서 내린 비현실적인 징병 제한 명령이 가져올 더 큰 피해를 늦기 전에 예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가 만든 불철저한 전쟁 대비, 어설픈 백성 사랑론이 가져온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전쟁은 모든 사람을 고통에 몰아넣는다.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굶어 죽고, 전염병으로 죽는다. 이순신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면 아무리 징병을 제한해도 군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다. 병역기피자를 이런저런 이유로 허용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빠져 나가고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백성도 나라도 모두 피해를 입게 된다. 정말로 백성들을 살리는 길은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니다. 조정의 눈가림 정책이 가져올 재앙을 이순신은 백성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염려한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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