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ilyoseou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669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53] 강구대변(江口待變)의 긴급한 자세
강 입구서 전쟁 대비하듯 위급상황 대처해야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7호] 승인 2014.10.13  13:09:34

몇 년 전에 있었던 모 소방서 상황실의 일이다. 
“도지사입니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도지사입니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도지사가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도 안 합니까?”
“뚜~ 뚜. 뚜. 뚜.”
“도지사입니다.”
“뚜~ 뚜. 뚜. 뚜.”
“도지사입니다.”
“뚜~ 뚜. 뚜. 뚜.”

어느 도지사가 소방서에 전화를 건 상황이다. 그가 관할 지역의 한 요양병원을 방문했었다. 때마침 위급한 암환자를 보았다. 도지사는 선의로 다급한 마음에 119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위태로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다. 9차례에 걸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은 위와 같았다. 도지사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소방서 관계자는 전화를 끊었다. 소방서 관계자는 도지사의 전화를 장난전화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의 통화내용을 보면, 문제의 핵심은 그 도지사가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 자체를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그는 급한 마음에 그것을 잊었다. 소방서 관계자도 사실 확인을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관행적인 장난전화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순간에 놀라 당황한 리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관계자가 만든 상황이다. 이 상황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른 한 장면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모습이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4월 14일 원균이 보낸 공문을 받고 전쟁 발발 사실을 알았다. 곧 소속 관포에 긴급 상황을 통보하고 자신이 들은 정보와 자신의 대처 계획을 조정에 보고했다. 원균이 보낸 보고서를 보고는 일본 선박이 보통 왕래하던 세견선박이 아니라고 생각해 “신도 군사와 병선을 정비해 강 입구에서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江口待變, 강구대변)”라고 했다. 잇따르는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경상 우수사 원균의 공문을 받을 때마다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각각 올려 보냈다.

“이같이 적의 세력이 극히 사나우니 부대를 나누어 침범해 올 기미가 없지 아니하므로 신도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강 입구에서 사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江口待變).”(<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2) 因倭警待變狀二>, 1592년 4월 16일 오전 8시) 

이순신은 특이 동향을 듣자마자 비상을 걸고 대비했다. 이순신이 말한 “강 입구에서 사변에 대비한다는 ‘강구대변(江口待變)’”은 바로 오늘날의 119가 사시사철 24시간 위급상황을 대비하는 것과 같은 비상대기 상태를 말한다. 강구대변은 《임진장초》에만 나오는 말이다.

이순신이 비상대기 명령을 내릴 때 이순신이 용건, 즉 일본선박의 특이동향, 일본군의 침략 가능성 등을 말하지 않고, 무조건 “나는 이순신이다. 비상이다!, 비상이다!”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군사와 백성들은 우왕좌왕하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가 왜(Why), 무엇을(What), 어떻게(How)를 말하지 않았다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도 이웃 경상좌·우수영처럼 혼란에 빠져 병사들은 도망가고 백성들은 피난 보따리를 쌌을 것이다.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조정에 장계로 보고한 것처럼 먼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부하장수들에게 군사와 전선을 정비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전선들을 바다 입구에 대어놓고 기다리라고 한 것이다. 그는 “나는 이순신이다”만을 외치지 않았다. 긴급한 용건을 명확히 말했다.

이순신의 강구대변의 자세는 이순신이 군대 생활을 하는 모든 기간에 나타난다. 그가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대비해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나, 발포 만호 시절에 이용의 불시점검 때 가장 우수한 상태를 유지했던 것, 당시 전라도 도사였던 조헌까지 이순신의 업무능력을 최고로 평가했던 것이 그것이다. 이순신의 직무평가를 악의적으로 폄하하려는 것을 들은 조헌이 말했다. “군사를 다루는 법이 이 도에서는 제일이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다른 여러 진을 모두 하하(下下)로 할 수는 있어도 이순신은 어떤 경우에도 깎아 내릴 수 없다”

또한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면서 수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도 그의 철저한 강구대변의 자세를 말한다. 1591년 조선 조정에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대한 첩보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선조와 조정은 설마 설마 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이순신, 이억기, 권율 등을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신립을 순변사로 임명해 남쪽 지방의 방어태세를 점검하게 했다. 

점검을 끝낸 신립은 조정에 돌아와 일본군이 섬에 근거를 둔 집단이기에 때문에 수전(水戰)은 익숙하지만 육전은 익숙하지 않다며 수군을 없애고 육전에 전력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립의 주장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적에 대한 정보가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 자신의 나라만 돌아보고 주장한 것이다. 첫 단추가 완전히 잘못 꿰진 것이다. 그 때 이순신이 신립의 육전 우선론을 반박했다.

해도(海道, 경상·전라·충청)의 수군을 없애고 장사(將士)들을 육지에 올라가 방어하도록 명했는데, 전라 수사 이순신이 급히 아뢰기를, ‘해구(海寇)를 막으려면 바다와 육지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으므로 호남의 수군만은 온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순신의 전라도 수군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수군들은 모두 육지에 올라가 육상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지역의 수군은 역사 기록처럼 유명무실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경상도 지역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파악한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육지의 높은 봉우리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일본배를 구경한 것뿐이다. 배가 세견선인지 전선(戰船)인지, 선박의 수가 90척인, 150척인지, 몇 백 척 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바다에 수군이 없었던 것이다. 신립의 주장대로 육지에서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전라도 지역의 수군들은 이순신의 수군 유지 주장으로 온전하게 전쟁대비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거나, 봉수대를 점검하는 모습, 성의 해자를 점검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순신이 조정의 육전 중심 전략을 무시하지 않고 동시에 준비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 수군이 신립의 말처럼 수전에 강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경상도에서 전해 온 각종 정보를 듣고는 곧바로 수군들을 집결시켜 비상사태를 대비했다. 강구대변(江口待變)은 임박한 위기를 대처하는 이순신의 경계명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