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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회 건물에서 폭탄이?…파란만장 ‘80년 역사’ 개방
등록 :2015-08-18 20:05수정 :2015-08-19 08:41

시의회, 다음달 역사탐방 투어 추진
일제 땐 ‘폭탁의거’ 경성부민관, 해방 이후엔 미군 사교장으로 써. 당시 쓰던 당구대 남아 있어 
한국전쟁 전 국립극장 사용하다 서울 수복 뒤엔 국회의사당.
1975년부터 15년간은 시민회관, 1991년부터 시의회 공간으로

서울시의회 건물.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역사가 중첩돼온 도시다. 서울 한가운데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에는 특히나 많은 역사가 담겨 있다. 그래서 세대에 따라 다른 장소로 기억되곤 한다.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오영호(68)씨에게는 국회였고, 그보다 한 세대 앞선 누군가에게는 미군의 사교장이었다. 이곳의 단절된 기억이 하나로 꿰어져 문화상품으로 되살아난다.

서울시의회 관계자는 18일 “건물의 역사가 담긴 사료를 수집해 ‘역사탐방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음달께 개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시의회는 이를 위해 외부 업체에 투어 프로그램 개발을 의뢰했다.

1969년 9월 22살의 젊은이였던 오씨에게는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김두한 인분 투척 사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신문에 크게 났죠. 경기고가 예전에 종로에 있었잖아요. 저랑 친했던 경기고 선배가 싸움질을 좀 하고 다녔는데, 종로 바닥에서 유명했던 김두한이 그 선배한테 ‘경기고 갔으니 이제 공부하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그 김두한이 신문에 나왔으니 기억이 선명하지요.”


이 건물은 한국전쟁기인 1950년 9월 서울 수복 뒤 처음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됐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쓰지 못하다, 휴전 이후인 1954년 6월부터 1975년 7월까지 다시 국회로 사용됐다. 근대민법 제정, 내각책임제 개헌, 유신헌법 제정, 월남파병 동의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서울시의회 건물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다. 일제는 1934년 7월 이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35년 12월 완공한 뒤 ‘경성부민관’이라 이름 붙였다. 부민관의 대강당은 1800석에 달하는 좌석을 갖추고 있어 연극과 강연회, 음악회 등이 열렸다. 이곳에서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은 1945년 7월24일 친일 어용대회를 열었고, 조문기·류만수·강윤국 등 대한애국청년단 단원들은 이를 막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로 꼽히는 ‘부민관 폭파 사건’이다.

1945년 해방 뒤에는 미군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됐다. 지금도 건물 안에 당시 미군이 쓰던 당구대가 남아 있다. 1949년 서울시로 소유권이 이전됐고 1950년 4월29일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국립극장으로 사용됐다. 이어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다 1975년 9월부터 1990년까지는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이용돼 각종 공연이 열렸다. 현재의 서울시의회 건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1년부터다.

이창현 국민대 교수(전 서울연구원장)는 “공간은 변화하며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억을 남긴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에 대한 세대간의 상이한 기억을 통시적으로 제시한다면 세대·진영간 소통과 공감의 영역을 넓히고 역사 발전의 전망을 공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음성원 기자 e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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