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202.22022211819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0> 만리장성, 초원과 중국을 가르다

초원과 농경문화의 경계 '長城'… 한족 중심 역사관의 치명적 오류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2-01 21:23:14 |  본지 22면


- 장성 관광 단골코스 북경 위쪽 '바다링', '위황무 문화' 유적…중국 변경 괴롭혔던 유목민족 흔적 증명

- 만리장성은 한족이 초원민족과 자신들의 경계 구분, 영토 분리의 표시

- 일체다원·동북공정…팽창주의 중화 사관 모순의 역사적 실체


지금의 만리장성. 바다링(팔달령)에서 본 모습이다. 중국의 일체다원 역사인식과 한족 중심 역사관의 허구성의 산 증거다.


베이징(북경)을 여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코스는 만리장성이다. 특히 북경 위쪽의 바다링(팔달령·八達嶺) 장성은 교통도 좋고 개발이 잘 돼 있어 장성을 관광하는 단골코스다. 바다링에서 구절양장 굽은 길을 따라 장성을 관통하여 연경현으로 들어서면 베이징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앞에는 쥔두샨(軍都山) 산맥이 병풍처럼 거대하게 늘어서 있고, 갑자기 기후도 조금 서늘해지며 산 사이사이에 너른 언덕들이 나타난다. 이 지역은 전체 면적 112㎢의 인공호수인 룽칭샤(용경협·龍慶峽)로 유명하다.


룽칭샤 일대가 개발되면서 약 2500여 년 전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이 다수 발견됐다. 이들은 고고학적으로는 '위황무(玉皇廟)문화', 역사적으로는 산융(山戎) 또는 동호(東胡)라고 불리던 유목민족이었다(필자는 동호라고 생각하지만, 중국학계에서는 산융이라고 하는 학자가 많은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에 만리장성 북쪽에서 중국의 변경을 괴롭혔던 유목민족들이 살았음이 고고학과 역사로 증명된 것이다.


룽칭샤 주변의 유목민족 유적 중에는 '위황무' 무덤군이 대표적이다. 이 무덤군은 쥔두샨 산기슭의 너른 대지 위에 만들어진 수백 개 유목민 무덤들로 이뤄졌다. 한 곳에서 대량의 무덤이 수백 년간 만들어졌으니, 이 지역에 유목민들이 꾸준히 살아왔음이 증명됐다. 위황무문화의 주민들은 땅속 2m 깊이에 목관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허리에 단검을 차고, 여성들은 다양한 장신구를 착용했다. 특히 무덤, 마구, 동물장식은 기원전 7~3세기 유라시아 초원에 퍼져 있던 유목문화를 대표하는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것이다.


■초원민족은 장성을 무서워했을까


중국 역사지도책에 그려진 만리장성. 동쪽 끝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이들을 그리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라 '스키타이문화'라고도 한다. '스키타이문화'라고 하면 마치 흑해연안의 스키타이족이 기원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기원지가 시베리아라고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키토-시베리아'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처음 쌓은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 이전에 춘추시대부터 연, 제, 진 등 초원지역과 접경한 중국의 제후국들은 수백 년에 걸쳐서 토성을 쌓았다. 즉, 중국이 막고자 했던 세력은 바로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이라고 불리던 유목민족들이었다. 바다링 장성 북쪽의 위황무문화는 유라시아 전역을 제패했던 유목문화의 동쪽 종착역이었던 셈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은 실제로 명나라 때 만든 것이며, 그 이전에는 흙으로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초원의 유목민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연 이 장성들이 초원의 유목민들을 방어할 수 있었을까? 선진시대 대표적 문헌인 '시경'(詩經)에는 중국의 제후국이 장성을 쌓고 그를 찬양하는 시가 종종 보인다. 아니면 남편을 장성으로 보냈다는 맹강녀의 설화처럼 중국 백성들의 원망과 한이 어린 노역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장성 덕택에 유목민들이 넘어오지 못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유목민들은 정착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살아왔다. 또 유목민은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났다. 장성이 있다 해도 변방의 장수를 매수해 성문을 열든지, 벽의 한쪽만 무너뜨려도 쉽게 장성은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만리장성 건축은 지극히 농경민족다운 발상이었다. 농경민은 농사를 짓고 항구적으로 살 터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땅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래서 장성을 쌓아서라도 자신의 영토를 항구적으로 가지고 싶어했다. 반면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 장성은 큰 의미가 없었다. 세계사를 보아도 중국을 제외하고, 로마를 비롯하여 유목민족과 접경한 나라들이 장성을 쌓은 적은 없었다. 즉 만리장성은 정작 유목민들보다는 중국 내부 사람들에게만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관심을 돌리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심시키는 일종의 내부결속용이었다.


■'중국 상징 만리장성'의 역설


갈석궁 유적.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한반도 근처가 아닌 요령성 수중현 갈석산임을 보여준다.


초원의 유목민을 경계하는 만리장성은 20세기 들어서 중국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만리장성이 중국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직접 보고 왔을 때부터였다. 이후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유일하게 보이는 건축물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 퍼질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만리장성은 춘추시대 이래 중원 중심의 한족이 주변의 초원민족과 자신들을 경계 짓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다. 장성을 쌓아서라도 유목민족과는 분리된 자신들만의 영토를 구분해 자신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중국은 2000년 넘게 장성 쌓기를 반복했지만, 중국은 이민족에게 점령되기가 다반사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만리장성은 중국이 얼마나 북방의 초원민족을 무서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또 만리장성은 중국에서 주장하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역사인식은 '일체다원'으로 요약된다. 즉, 시작은 다양하지만 한족 중심의 역사에 포괄되며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은 고대부터 중국사의 일부분이라 본다. 아무리 중국이 한족 중심·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바로 만리장성이다. 현재 중국 역사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초원민족은 중국에 동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현재 중국의 주체인 한족이 2000여 년간 지속적으로 만들기를 반복하며 현재 중국을 이분시킨 증거다. 현재 중국의 논리 대로라면 같은 민족 사이에 그 거대한 만리장성을 세운 꼴이니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일인가.


현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 경계지역인 요령성 수중현(綏中縣)의 갈석산(碣石山)이며, 진시황이 세운 장성도 같은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최근 팽창주의적 중화 사관 덕택(?)에 만리장성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동북공정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장성들을 만리장성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사실 1970년대부터 중국 지도에는 만리장성이 한국 평양근처까지 그려진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니, 그에 맞선 진나라와의 경계도 그 근처일 것이라는 문헌 해석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반도에서 진나라 유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기존의 정설인 갈석산이 맞다는 증거가 최근 중국의 고고학적 연구로 확인됐다. 갈석산 근처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진시황의 행궁지가 발견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이 정복한 땅을 순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순시하던 마차 안에서 생을 마쳤다. 당시 진시황은 진나라의 동쪽 끝인 갈석산도 가려 했을 것이며, 그에 대비해 거대한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실제 발굴에서도 진나라 때의 전형적 대형 건물터와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이 유적의 보고서 발간이 임박했다고 하는데,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최근 중국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신장되고 있으며, 세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역사인식은 한족 중심의 쇼비니즘(국수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하다. 현재 중국 분위기는 확장된 중국 영토와 국력에 따라 또 다른 만리장성을 만드는 꼴이다. 중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미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다른 강대국들의 역사인식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사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자신의 영토 내부를 자국 역사의 범주로 기록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미국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서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다른 다민족국가들은 '영토중심의 역사', 즉 국경 내 역사를 균형있게 서술하는 반면 중국은 '영토중심'이 아니라 '한족중심의 역사'로 본다는 점이다.


한족 중심 역사에서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만리장성의 진정한 의미는 초원과 농경민족이 만나는 접점이라는 데 있다. 고대 이래로 장성의 관문 근처에는 관시(關市) 또는 호시(互市)라는 장을 열어서 서로 부족한 물건을 바꿨으며,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는 중심이 형성됐다. 장성은 다양한 농경·초원문화의 교류가 동아시아 역사의 원동력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아닐까.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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