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9_0070


고구려 귀족 세력의 분열과 갈등


[欽命天皇 六年] 是年, 高麗大亂, 被誅殺者衆.【百濟本記云. 十二月甲午, 高麗國細群與麤群, 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 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 狛國香岡上王薨也】


[七年]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百濟本記云.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麤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日本書紀』卷19, 「欽命天皇」


[흠명천황 6년(545)] 이 해에 고구려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피살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월 갑오(甲午)에 고구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며 전투하였다. 세군은 패하였지만 3일이나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고 세군의 자손은 모조리 잡혀 죽임을 당했다. 무술(戊戌)에 박국향강상왕(狛國香岡上王)이 훙(薨)하였다.】


이 해(546)에 고구려에서 난리가 크게 일어나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인이었다.【『백제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구려에서는 정월 병오(丙午)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나이가 8세였다. 박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은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 외가(外家)가 추군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외가가 세군이었다. 박왕의 병이 심해지자 추군과 세군이 각자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세군에서 죽은 자가 2000여 인이었다.】

『일본서기』권19, 「흠명천황」


이 사료는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의 사망을 즈음하여 왕위 문제를 둘러싼 외척 세력 간의 내전(內戰)을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6세기 중반을 전후로 고구려의 정치 체제가 국왕 중심에서 귀족 연합적 정치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사료에서는 고구려의 대란을 545년과 546년의 기사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이 때문에 두 기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분리해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545년 기사는 안원왕의 사망을 중심으로, 546년의 기사는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의 즉위를 중심으로 그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안원왕의 사망은 545년 겨울 10월로 나오고, 『양서(梁書)』에서는 548년으로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본기」의 분주에서 지적하였듯이 『양서』의 오류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에는 안원왕의 사망과 관련하여 어떠한 정치적 변란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안장왕⋅안원왕⋅양원왕의 왕위 계승은 순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반면 『일본서기』는 안장왕 역시 피살되는 등 세 왕의 사망과 왕위 계승은 모두 정치적 변란의 결과였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이 참고된다. 551년(양원왕 7년) 혜량법사(惠亮法師)는 거칠부에게 “금일 우리나라의 정치가 혼란하여 멸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 당시 고구려의 정치가 불안정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6세기 중반 고구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신라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특히 신라에 죽령(竹嶺) 이북의 여러 군현을 빼앗길 만큼 대외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대외적인 위기는 정치적 혼란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이렇듯 각종 자료를 종합해 보면, 6세기 중반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은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일본서기』에 보이듯 왕위 계승 분쟁이 전개되며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6세기 중반의 정치적 불안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중앙 정계에서는 국내성에서 도읍하였을 때부터 활동한 기존의 귀족 세력이 여전히 요직을 차지했지만, 새롭게 부상한 귀족 세력도 비중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낙랑⋅대방의 지배 세력과 중국계 망명인, 그리고 4~5세기 군공(軍功)을 통해 성장한 무인 세력 등이 상정된다. 이 점에서 기존의 전통적 귀족 세력과 신진 귀족 세력 사이에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참고문헌


논문「고구려 평양천도의 동기」,『한국문화』3,서영대,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1981.

저서『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한국고대사의 연구』, 이홍직, 신구문화사, 1971.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편저『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2)』, 김현구 외, 일지사, 2003.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m_001r_0160_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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