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803150407444


고구려는 천하(天下)의 중심이다.

[고구려사 명장면 25] 

임기환 입력 2017.08.03. 15:04 


모두루묘지.중국 길림성 집안시 하해방촌 소재 모두루무덤 벽면에 쓰여진 묵서. 광개토왕때 북부여 수사(守事) 벼슬을 지낸 중급 귀족인 모두루의 묘지명이다. 광개토왕비문과 대교하여 5세기 고구려 역사상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있는 모두루 무덤에 쓰여 있는 묘지(墓誌)에는 이런 표현이 담겨 있다.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이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셨으니,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리라…."


자부심 넘치는 이 표현은 곧 당시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던 천하를 바라보는 당당한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광개토왕의 왕호에 보이는 '태왕(太王)'은 고구려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다. 태왕은 중국 천하의 최고 통치자인 '천자(天子)' '황제(皇帝)' 및 유목 세계의 최고 통치자인 '칸(可汗)'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의 존재다. 그러기에 '태왕'이란 칭호에는 고구려 독자의 천하관이 자리하고 있다.


위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왕비에서 보듯이 고구려 태왕이 갖는 정당성은 시조 추모왕이 '천제(天帝)의 아들' '일월(日月)의 아들' 즉 천(天)의 혈통을 이어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런 생각은 바로 시조신화 즉 주몽의 건국신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태왕과 천(天)이 직접 혈통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중국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천자(天子)'를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로 강조하는 점과 구분된다.


그러나 이런 신성한 혈통적 관념만으로 현실에서 태왕의 정통성을 다 보장할 수는 없다. 정통성에는 정치적 맥락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관념이 필요하다. 유교에서 '천명'이 인치(仁治)와 덕치(德治)로 표현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구려의 태왕관에도 이런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다.


광개토왕비에서 태왕은 은택(恩澤)을 베푸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런데 태왕의 은택은 고구려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문에는 정벌 이후 상대국에 대한 고구려의 조처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대개 태왕의 은덕을 베푸는 형태였다.


백제에 대해서 "태왕은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순종해온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고 했으며, 또 신라왕이 구원을 청하자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겼다(太王恩慈矜其忠誠)"고 했다. 동부여에 대해서도 "태왕의 은덕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太王恩普覆)"는 표현을 썼다.


비문에는 7건의 정벌 전투 기사가 기술되어 있는데, 그중 태왕의 은덕을 베푼 대상은 곧 과거에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다고 밝힌 국가 즉 백제·신라·동부여에 한정되었다. 나머지 대상인 비려(碑麗)·왜(倭)·후연(後燕) 등에 대해서는 태왕의 은덕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렇게 태왕의 은덕을 받는 '속민'까지가 곧 태왕이 다스리는 고구려 천하(天下)의 범주였다. 노태돈 교수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다중적 구조로 파악하는 탁견을 제시한 바 있다. 즉 태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고구려민이 1차적 천하이며, 백제·신라 등 속민이 2차적 천하였다. 그리고 2차적 천하의 외곽이 바로 3차적 천하로서 중국 황제의 천하와 칸이 다스리는 유목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온 세계가 해당된다.


그런데 1차적 천하와 2차적 천하가 고구려 태왕의 백성이며, 이들 민에 대한 통치는 구체적으로 태왕의 신료인 '노객(奴客)'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모두루 묘지에서 북부여를 통솔했던 모두루는 광개토왕의 노객이었다. 또 광개토왕비에는 백제왕과 신라왕도 모두 태왕의 노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 천하는 '태왕-노객-민·속민' 구조 아래에서 태왕을 정점으로 운영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천하관의 이면에는 고구려와 백제·신라·부여 사이에 종족적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의 동류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노태돈 교수는 파악하고 있다. 물론 아직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이러한 고구려 천하관과 연계된 어떤 관념과 의식이 통일신라 이후 '일통삼한(一統三韓)' 등 삼국민의 동일체 의식으로 성장하였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이러한 상정은 민족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고구려적 천하관은 이미 그 이전부터 서서히 싹트고 있었겠지만 그러한 고구려의 천하를 영역으로 확보하고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며 실제로 구현한 인물은 바로 광개토왕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광개토왕을 고구려를 고구려답게 만든 군주라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 천하관은 하늘(天) 아래 세계 공간에 대한 이해 방식으로서, 고구려인들이 자신과 주변 국가, 종족을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는 유교적,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갇혀 있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천하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고구려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답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을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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