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61125060408600


대제국 고구려의 기틀은 공공성 갖춘 인재들 덕분

[고구려사 명장면 7] 

임기환 입력 2016.11.25. 06:04


필자가 신대왕 혹은 고국천왕의 왕릉으로 추정한 중국 집안시 칠성산871호무덤. 국내성에서 왕릉다운 규모를 갖춘 초기 고분이라는 점에서 혹 신대왕과 고국천왕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흠모를 담아 축조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구려 8대왕의 왕호는 신대왕(新大王)이다. 즉 '새 대왕'이다. 새로 왕위에 오르면 누구나 '새 왕'이 될 터인데, 왜 이 왕에게만 이런 왕호가 붙었는지 음미해 볼만하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생각할 때 그 전과는 다른 새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하게 '새 대왕'이란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신대왕의 행적을 통해 다소 드러난다.


165년(차대왕 20년)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않자, 명립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였다. 이에 신하들은 차대왕의 동생 백고를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냉큼 받지 않았다. 세 번이나 사양한 뒤에야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태조대왕이 살아 있음에도 왕위를 양위받은 차대왕과는 그 즉위 과정부터가 달랐다. 신대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 일종의 즉위교서라고 할 수 있는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과인은 본래 임금이 될 만한 덕망이 부족하다. 보잘 것 없는 몸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편안할 겨를이 없고 마치 바다를 건너는 것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멀리 미치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나라에 크게 사면을 베풀고자 하노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런 교서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뜻을 음미해볼 수 있도록 원문을 인용하였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새 대왕의 덕이 크구나"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차대왕의 태자가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새 정치(新政)'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나타나 죄를 아뢰자, 신대왕은 죄는커녕 오히려 식읍을 내리고 양국군(讓國君)으로 책봉하였다. 앞서 차대왕이 선왕인 태조대왕의 태자를 살해한 것과는 전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너그러움의 정치, 화합의 정치를 바로 '새 정치'로 내세운 셈이다. 신대왕이란 왕호는 바로 이러한 '새 정치'의 뜻을 담아 왕호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신대왕의 새 정치는 그의 아들 고국천왕으로 이어져 더욱 꽃을 피운다. 고국천왕 재위 13년(191)에 백성들 괴롭히기를 일삼던 왕후의 친척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에 고국천왕은 다음과 같은 교를 내렸다.


"근래에 총애하느냐에 따라 관직을 주고 덕이 없어도 벼슬에 나아가니,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제 너희 4부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여라." 


그래서 4부는 동부 출신 안류를 추천하였으나, 안류는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라고 사양하며 을파소를 대신 추천하였다. 당시 을파소는 궁벽한 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뒤를 이어 신하와 백성들의 윗자리에 있지만,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오. 선생(을파소)께서는 오랫동안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드러내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시다가,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오셨으니, 단지 나의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부디 가르침을 받으려 하니 공께서는 마음을 다해주시기를 바라오."


이에 을파소가 물러나와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지금 임금께서 나를 두터운 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돌아갈 것인가"하고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백성들 모두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소 장황하게 인용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고국천왕과 신하 안류, 을파소가 갖고 있던 '새 정치'에 대한 생각과 신념을 좀더 생생하게 알기 위함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다른 왕의 기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대 왕이 이런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선왕의 행적과 역사 기록이 후대 왕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었다고 보면, 신대왕이나 고국천왕의 교서, 안류나 을파소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두고두고 곱씹어보던 문장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고구려인들에게만이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가르침임은 위의 인용문들을 다시 읽어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겸양을 잃지 않고 항상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춘 신대왕과 고국천왕, 재상으로 추천되었으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을파소를 추천하고 스스로 물러난 안류, 궁벽진 곳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큰 뜻을 펴고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은 재상 을파소. 이런 군주와 신하들에 의해 고구려는 새 나라의 틀을 마련해갔던 것이다.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가장 큰 덕목은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공공성'이라는 것을 고구려인들도 두고두고 되새겼던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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