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706150608963
고구려가 칭제 안한 이유는 자주의식 반영 '태왕' 때문
[고구려사 명장면 23]
임기환 입력 2017.07.06. 15:06
광개토대왕명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높이 19.4 cm.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와 바닥에 쓰여진 명문. 명문을 풀이하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www.museum.go.kr )
왕조시대에는 왕(王)의 권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왕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도 결코 작지 않다. 따라서 어느 왕조든 그 사회에서 모범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왕의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대부분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이라면 아마도 광개토왕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광개토왕은 고구려 당시에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을 받았을까?
광개토왕의 본래 시호는 매우 길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여기서 '국강상'은 왕의 무덤이 국강상이란 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광개토왕 이전 대부분 왕들의 시호는 왕릉이 입지한 장지명을 따서 지어졌는데, 그러한 전통에서 나온 시호이다. 예컨대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장지가 고국원인데, 고국원은 국강상으로도 불리었기에 국강상왕이라고도 했다. '국강상'이라는 장지명으로 보아 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의 왕릉은 아마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을 것이다.
다음 '광개토경'은 땅을 널리 개척하였다는 왕의 업적을 보여주는 칭호이다. '평안'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다는 칭송쯤 될 터이고, '호태왕'은 이런 뛰어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12자나 되는 긴 이름에서 광개토왕은 당시에도 크게 존경을 받은 왕이라는 점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광개토경'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왕의 정복활동이 당시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는 군사활동과 정복전쟁이 두드러진 나라였다. 그것이 고구려국가 발전의 중요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왕이 가져야 할 덕목에는 군사적 능력이 필수였다.
예컨대 광개토왕은 군사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당시 백제인들이 몹시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왕실의 내력이었다. 시조 주몽왕은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는데, 주몽이란 이름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대무신왕도 설화에 의하면 7세에 군사를 지휘하여 부여군을 격파하여 왕이 될 자질을 인정받았고, 장성한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부여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왕의 신체 조건에 대해서도 체격이 장대하다거나 힘이 세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고구려왕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수렵행사를 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배양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또 전쟁을 할 때에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두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무신왕이나 동천왕 등이 좋은 예이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이는 국왕이 앞장서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사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왕이 전투에서 사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이런 점이 고구려 국왕이 갖는 독특한 덕목의 하나였다. 광개토왕비문을 보아도 7회의 전쟁 기사 중 4회의 정벌전에서는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왕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그것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전쟁은 땅이나 주민 등을 획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는데, 전쟁의 승리는 자연스럽게 국왕의 업적으로 칭송될 수 있고, 전쟁의 성과물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국왕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영토를 넓혔던 광개토왕은 강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태왕(太王)을 칭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광개토경'이란 시호와 연관되는 '태왕' 칭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군주의 칭호 중에 황제(皇帝) 왕(王)의 구분이 있는데, 왕보다는 황제가 격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의 통치자는 황제를 칭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왕이라 칭한 것은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황제라 칭하였는데, 후일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황제를 모두 왕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면서, 동명성제(帝), 광개토대제, 장수대제라는 식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북방의 유목국가들이 처음에는 왕(王)을 칭하다가 세력이 커지면 황제를 칭한 경우가 많은데, 대제국인 고구려도 황제를 칭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으리란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고구려에서는 결코 황제라 칭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황제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에 사대한다거나 중국 왕조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다른 칭호를 사용하였다. 바로 '태왕(太王)'이라고 불렀다. '광개토호태왕' 이렇게 칭한 것이다. 이 태왕은 황제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칭호였다. 황제는 중국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의 칭호이다. 고구려인들은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천하와는 다른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고구려의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가 바로 '태왕'이다.
태왕이라는 칭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모두루묘지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이라고 칭한 사례가 처음이다. 아마도 고국원왕 때부터 태왕이라 칭한 듯하다. 그러면 태왕은 왕보다 높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광개토왕비문에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이라 하고, 모두루묘지에도 추모성왕(鄒牟聖王)이라 하여 초기 3왕의 왕명을 굳이 태왕이라고 바꾸지 않은 것을 보면 태왕이 왕보다 높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 듯하다. 만약 태왕과 왕을 위계상으로 구분하였다면, 자신은 태왕이라고 부르고 선조 왕들을 그대로 왕이라고 부른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한 태왕이라는 칭호는 백제, 신라에 전해지고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도 사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세종대왕'이라는 칭호가 바로 그러하다.
광개토왕의 '태왕'은 바로 고구려적 천하를 대표하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용어이다.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구려의 자존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왕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는 것은 바로 고구려에 대한 모독이 된다.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고구려 태왕을 황제로 만든 이들이야말로 '태왕'보다 '황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대주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사대주의나 식민주의가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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